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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로운 Mar 11. 2021

이것은 케이크가 아닙니다

눈도 입도 즐거운 케이크 한 입의 마법

오랜만에 브런치에 들어와서 글을 쓴다. 작년 10월 말에 브런치 북 하나를 마무리한 후 한동안 쓰지 않았으니 그동안 큰 공백이 있었다. 그 사이 블로그를 시작했다. 하나는 네이버 블로그이고, 하나는 티스토리 블로그. 영화라는 카테고리로 두 개의 블로그를 운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브런치에서 멀어지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각 글을 기반으로 한 콘텐츠 플랫폼들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브런치에 돌아온 이유도 있다. 그 이야기는 차차 풀어낼 예정.


글을 쓰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는 것, 비슷비슷하지만 다르고 그럼에도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읽을 수 있는 것 또한 즐겁다. 오늘은 좀 더 가벼운 이야기를 써보려고 오랜만에 브런치를 켰다.





나는 오늘부터 이것을 행복이라고 부르기로 했어.


영화 카모메 식당에나 등장할 법한 이 대사를 한 사람은 실제로 내가 아닌, 앞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취준생 내 동생이다. 동생은 산딸기가 아홉 개 올라간 초코 생크림 케이크 한판을 하루 만에 다 먹어치웠다. 보드라운 초코 시트에 포들포들 생크림, 적당히 단 맛이 새콤한 산딸기와 오묘하게 어울려 환상의 맛을 이뤄낸 케이크. 산딸기가 올라간 조각을 하나하나 없앨 때마다 덩실덩실 춤을 추는 모습을 보니, 어찌 케이크를 행복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무렴, 당연하면서도 달콤한 이 문장이 참 귀여워서 말이다.




이제 대학 졸업반인 동생이 준비하는 시험은 미국에서 봐야 하는 시험이다. 코로나 전, 시험을 치러 하와이에 다녀오기도 했다. 가뜩이나 시험을 치는 것도 부담스럽고 떨릴 텐데, 한 번도 안 가본, 그것도 남들은 파도 타러 놀러 가는 하와이에 시험을 보러 간다니. 바리바리 짐을 싸서 혼자 떠나는 걸 보는 마음이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탈락해버린 후, 시험을 다시 봐야 하는 상황이 왔다. 문제는 코로나도 함께 왔다는 것이다. 미국 본토 시험인데 코로나가 심각하게 창궐하는 미국에 쉽사리 갈 수 없는 상황. 진퇴양난이었다.


나는 그런 현실을 생각해 다른 방향으로 취업준비를 권했다. 그러나 기회는 준비하는 자에게 온다고 했던가, 나라면 이 상황에 포기하고 말았을 그 시험을 동생은 다시 붙잡았다. 그리고 코로나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국내에서도 시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내 눈앞에서 세 번째 과목 시험을 앞둔 동생을 보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이 아이의 대단함에 맛있는 것도 먹여가면서.




닿을 듯 안 닿을 듯 손만 뻗으면 잡힐 것 같은 시험이라는 것, 아득하고 먼 합격 후의 미래. 몇 년 전, 임용고시에 매달리던 내 모습이 겹친다. 사범대를 나왔으니 당연하게 임용고시를 생각하던 그 시절의 나는 '이렇게 해서 교사가 되면 행복할까?' 매일 생각했다. 임용 강사들은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무용지물이라며 기계적으로 공부하라 했지만. 오늘, 멀리 떨어져 보는 그때의 내 목표는 마치 고등학생이 무작정 최대한 좋은 대학 들어가려 애쓰듯 막연했던 것 같다. 교사로서 아이들을 만나고 교단에 서서 행복한 사람들은 당연히 많을 것이다. 그저 나는 그 미래가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때의 내 행복은 너무나도 멀리 있었다.


동생은 코로나 때문에 오히려 친구들과 같이 놀지도 못하고 밖에도 나가기 어려워 공부에 더 집중할 수 있다고 했다. 일주일을 집 밖에 나가지 않아도 답답함이 뭔지 모를 정도가 된 상태. 거의 매일매일이 셀프 자가격리 수준이다. 한편 작년 이맘때의 나는 처절하게 무너지는 회사에서 고된 뒤처리를 담당했다. 코로나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는 회사의 연약한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영업직으로서 매출이 내 성장이고 즐거움이며 궁극적인 행복이었던 시절, 작년의 나는 기존의 브런치 글에도 쉼 없이 써 내렸듯 죽기 직전까지 불행했다. 코로나 방역이 생활화된 지금, 동생과 나는 둘 다 집안에 콕 박혀서 살고 있다.


코로나가 가져다준 이 집콕 생활의 가장 좋은 점은 내가 가장 편한 자리에서, 오롯이 나의 시각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전에는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것들이 다 무의미해진다. 먼 미래보다 당장 오늘 집 앞에 나갈 때, 지하철을 탈 때의 걱정이 앞선다는 건 엄청나게 먼 미래보다 눈앞의 것들이 먼저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익숙해질 때쯤, 바쁘게 돌아다닐 때에는 보이지 않던 중요한 것들이 잡힌다. 회사와 실적, 필요 상의 인간관계들을 제치고 진짜 중요한 관계가 무엇인지,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이제야 그 엉키고 엉킨 숲 속에 덩그러니 서있는 내가 보이게 되는 것이다. 나무보다 숲을 보라던, 미시적인 시각보다 거시적인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라는 말은 좋은 시기의 이야기일까.




그러니 사실 동생이 시험을 준비하건, 내가 무슨 일을 했건, 지금이 코로나 시국이건 아무 상관이 없다. 동생과 나는 밥상에 앉아서도 시답지 않은 것에 공감하며 웃고, 창문에 미세먼지가 없는 청명한 하늘이 보이면 상쾌하게 환기로 기분전환을 한다. 이번 주말에 만날 엄마 집 강아지가 보고 싶고, 귀여운 조카 영상에 흐뭇해지며 우당탕탕 우리끼리 만드는 저녁식사도 즐겁다. 저 멀리 미래의 어느 순간이 아닌 달콤한 케이크 한입에 춤까지 출 수 있는 너와 나.


그러니 오늘부터 이것의 이름은 케이크가 아니다. 행복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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