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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똑순이 둘째 딸입니다

by Nancy

남아선호 사상은 이미 옛말. 아들 키워봤자 남의 남편 키워주는 것이다, 아들은 키우기 힘들다, 엄마는 딸이 있어야 한다, 딸이 커서 효도한다 등. 요즘은 오히려 여아 선호 사상이 대세인 듯하다.


나는 아들의 엄마다. 임신한 후 성별을 알게 된 다음 친구들이나 직장동료들은 진심 어린 축하보다는 안쓰러운 시선들을 던졌다. 어떡해... 라며. 그런데 나는 사실 아들을 낳고 싶었다. 내가 낳은 나의 딸이 나와 같은 인생을 산다는 건 왠지 모르게 싫었기 때문이다. 성별을 알고 난 후, 나는 정말 기쁜데 주위의 반응을 보니 마치 내가 좋아하면 안 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시부모님과 통화하며 아들이란 얘기를 전하자, 아버님은 호쾌하게 웃으시며 "잘했다."라고 하셨는데 그런 반응도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그 사랑의 결실로 우리 아들이 생긴 건데 내가 무엇을 잘했다는 건지, 누구에게 내가 잘해준 일이라는 건지 왠지 모를 찝찝함이 내 속에 남아 맴돌았다. 걱정해줘도 싫고 잘했다고 축하해줘도 싫은 내 마음. 임산부의 호르몬 작용 탓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늘 우리 엄마에게 예쁜 공주였고(실제로 그렇게 부르셨다.) 자랑스러운 딸이었다. 3살 터울의 오빠는 늘 장난치기를 좋아했고 가족모임을 가도 늘 친척들은 까불거리는 오빠와 얌전히 앉아 혼자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는 나와 비교를 하며 칭찬해마지 않았다.


어린 내 기억 속 오빠와의 일화를 남겨보자면, 오빠는 나를 버린 적이 있다. 너무 자극적인 문구이지만 나는 정말 그렇게 느꼈다. 7살 초등학교를 입학하기 전 아버지께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시면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엄마는 나를 한동안 큰집에 맡기셨다. 아마 새로운 사업 준비와 이사 등으로 바쁘셨을 것 같다. 나는 어릴 때 이모집, 큰집, 엄마의 친구네 집 등 다른 집에 자주 맡겨졌던 것 같다. 어릴 땐 이유를 몰랐는데 지금 아이를 키워보니 부모님의 도움 없이 아이 둘을 키우는 것이 여건상 쉽지 않으셨을 것이고, (흔히 육아 흙수저라고 한다.) 양가 부모님이 다 일찍 돌아가신 나의 부모님은 그나마 둘 중 맡기기 덜 미안하게끔 얌전하면서, 학교를 다니지 않는 나를 맡기신 게 아닌가 싶다.

어릴 때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은 없다. 다만 다들 잘해주시지만 왠지 모르게 편하진 않고 눈치가 보였던 기억은 있다. 입맛에 맞지 않아도 맛있게 식사했고, 먹고 싶은 게 있거나 하고 싶은 게 있거나 보고 싶은 TV 프로그램이 있어도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내가 잠시 지냈던 엄마 친구분의 집에 나보다 한두 살 어린 동생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늘 나에게 언니라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부르며 친구처럼 대하는 것도 싫었고, 늘 자기 것이라고 그 나이에 걸맞은 욕심을 내는 것도 싫었지만 나는 내 나이에 맞는 욕심을 내거나, 다른 표현을 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23살 갓 대학을 졸업한 후 사회초년생 시절 때 어린 나이 답지 않게 너무 재바르게 사회생활을 잘한다는 칭찬들을 들을 때면 어렸을 때의 이런 경험이 나의 눈치 경력의 양분이 되었다고 자부하고는 했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면서 이렇게 예쁘고 한창 어리광 부릴 시절에 나는 왜 남의 집에서 가서 눈칫밥을 먹어야 했나 하는 아쉬움은 들곤 한다.


어쨌든, 나는 한동안 큰집에서 지내다가 이사한 우리 집으로 복귀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오빠는 미리 부모님과 이사 와서 지내고 있었기에 지리를 제법 알았고, 나는 알지 못했다. 오빠가 나를 퐁퐁(많은 지역에서는 방방이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트램펄린을 넓게 펼쳐놓고 10분당 300원 정도 받았던 것 같다.) 놀이장에 데려가 주었다. 집에서는 걸어서 15분쯤 걸리는, 어린 나로서는 나름 먼길이었는데 내리막길에서 내가 길에 있던 끈에 걸려 넘어져버린 것이다. 너무 아파서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오빠는 달래고 달래다 내가 계속 우니까 그냥 가버렸다. 한참 울다 정신 차려보니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두려움이 몰려오기도 했고, 울다 지쳐 멍하기도 했고 혼자 서성이며 길을 찾아보려 애써보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내가 어디에서 오고 있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아픔은 느껴지지도 않고 불안과 공포가 나를 덮쳤다. 한참 헤매던 와중에 구세주가 다가왔다. 경찰 오토바이를 탄 순경 아저씨였다. 나에게 길을 잃었는지 묻고 나를 오토바이에 태워 파출소로 데려가 주셨다.


파출소 앞으로 마침 아버지께서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시는 게 아닌가. 주여!(난 무교이다.) 당시 아버지께서 시작하신 사업은 신문사 지국이었고, 요즘은 신문을 받아보는 집이 많이 없지만 예전만 해도 매일 신문을 받아보는 집들이 많았다. 그래서 주로 아버지는 오토바이를 타고 신문을 배달하는 일들이 많았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신 것이다. 내가 파출소에 들어가려던 순간에.


아버지도 너무 황당하셨을 것 같다. 집에 있어야 할 딸이 눈물바람으로 경찰 오토바이를 타고 있다니. 정말 다행히 무사히 반나절도 안돼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아마 그날은 오빠도 제법 혼이 났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우리 집에서 나의 부모님과 행복하게 살 운명이었나 보다 하고 생각한다. 누구라도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이 마침 지나가고 있었거나, 내가 길을 완전히 잃어버려 부모님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때 어린 나를 길에 버리고 간 오빠는 이 날의 일을 아직 기억하는지 잊어버렸는지, 나는 궁금하긴 하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 외에도 우리 집의 말썽쟁이 오빠의 일화는 많다. 나는 어른들에게 용돈을 받으면 아껴두는 편이었는데, 늘 오빠는 과자를 사 먹거나, 오락실에서 탕진해버리곤 내가 숨겨둔 용돈을 귀신같이 도 잘 찾아 몰래 빼쓰곤 했다. 한 번은 사촌오빠가 나에게 손목시계를 선물해준 기억이 난다. 그때 오빠는 무엇을 받았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데, 오빠가 나의 시계를 엄청 탐낸 기억은 난다. 그래서 잘 때 베갯속에 숨겨두고 잤는데 다음날 일어나 보니 시계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 당시 우리는 이 층 침대를 썼고, 2층에 있던 오빠가 어느 틈에 내려왔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이렇게 내 기억 속 오빠는 늘 부모님께 혼날만한 행동들을 많이 했던 것 같고, 이것은 나에게 나름의 학습효과를 안겨주었다. 아, 저렇게 하면 호되게 혼나는구나, 엄마가 속상하구나,

결론은 나는 안 그래야지.


바쁘신 부모님, 마음껏 응석 부릴 조부모님과 같은 어른의 부재, 잦은 타 집살이 등의 콜라보로 나는 어리지만 얌전하고 눈치 빠른 아이로 컸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굉장히 어릴 때부터 말과 행동을 할 때 정말 솔직한 나의 의견을 얘기하기보다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 지부터 먼저 고려했던 것 같다. 어른들이 듣고 싶을 것 같은 말을 하고, 어른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행동을 하고는 했다. 그러니 예뻐할 수밖에!

20대까지의 나는 눈치 빠른 내가 좋았다. 사회생활하면서 마이너스보다 플러스되는 요인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다들 칭찬해주는 내 모습이 좋고, 그것이 내 자존감이 높다고 착각하게 된 계기도 되었다. 30대가 되고 보니 눈치가 살짝 없는 것 같은 사람들이 더 편하게 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집안에서나 사회에서나 눈치 빠르게 알아서 일처리를 슥슥 하다 보면 어느새 나의 일이 되어있고, 나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느 순간에는 버거움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임신했을 때도 우리 아이는 살짝 철없이 아이답게 응석도 부리면서 컸으면 하고 많이 바랬던 것 같다. 그때 태교의 효과인지 다행히 아직 4살인 나의 아들은 눈치가 제법 없다. 솔직하면서도 당당하게 이것저것 해달라고 요구하거나 자신의 식판에서 고기만 주워 먹고 야채는 골라내며 호불호를 강하게 드러내는 나의 아들이, 나는 사랑스럽다.


사실 학업에는 별 흥미가 없던 오빠에 비해 나는 독서도 좋아했고 공부도 제법 잘했다. 숙제나 준비물도 알아서 꼼꼼하게 챙겨간 편이었다. 초등학교 때 통일을 주제로 글짓기 대회가 있었는데 오빠 것도 대신해주었다. 그때 오빠가 상장을 받아왔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입학 전 배치고사를 치르는데 피아노 학원만 다녔던 나는 수학시험이 너무나 어려웠다. 나름 초등학교 시절에는 똘똘한 학생으로 신임받던 나였는데 자존심에 완전히 스크래치가 나버렸다. 엄마에게 학원을 보내달라고 얘기했고 오빠가 다니던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어릴 때는 학원을 많이 다니는 오빠가 부러웠다. 오빠는 주산학원, 바둑학원, 단과학원도 다녔던 것 같은데 나는 피아노 학원만 다녔다.

한 번은 오빠가 다니는 바둑학원에 따라간 적도 있었다.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출연자가 자신이 어릴 때 워낙 산만해서 차분해지기를 바라는 부모님이 서예학원을 보냈다고 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예전에 산만한 아이들은 서예학원이나 바둑학원을 많이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차분해지기를 바라며 보냈겠지만 그런 류의 학원에는 대부분 그런 아이들이라 결국 개구쟁이들의 모임터였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나의 부모님도 그런 마음에서 오빠를 바둑학원을 보내신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나는 따라간 바둑학원에서 수업시간 내내 조는 오빠의 모습만 보다 왔다. 나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인데 그런 흥미 있는 시간에 잠을 자는 오빠를 이해할 수 없었고, 또 감사함을 모르는 오빠에게만 배움의 기회를 주시는 부모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중간중간 미술도 잠깐, 영어학원도 잠깐 보내주셨지만 오래 다니지는 못했다. 어렸을 때는 아주 마르고 몸이 약하기도 해서, 어느 날은 내 코에서 피가 나는 것을 보고 미술학원을 그만 다니게 하셨던 기억은 난다. 잠시 두어 달 다닌 영어학원에서 그 당시는 흔하지 않은 핼러윈 축제를 해본 경험도 신선했고, Ann이라는 이름을 지어 외국인들과 대화해볼 수 있는 것도 너무 설레고 좋았는데 한 달 다닌 후 엄마가 그만 다니지 않겠냐고 해서 그냥 그러겠다고 했다. 지금은 후회한다. 솔직하게 더 다니고 싶다고 말을 할걸. 집안 사정에 조금 무리되더라도 '엄마, 다니고 싶어요. 재밌어요. '라고 말이라도 해볼걸. 그런데 다시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더라도 말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늘 연습하고 다짐하지만 아직까지 고치기 힘든 나의 성격 탓이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서야 다른 친구들에 비해 학습이 뒤쳐짐을 느끼고 심각성을 깨달은 내가 처음 적극적으로 요구해서 다니게 된 입시학원 레벨테스트에서는 6개 반 중 가장 수준이 낮은 끝반으로 배정받았다. 자존심에 스크래치. 매일 영어단어를 외우고 수학 문제를 풀었고 그 결과 중학교 1학년 첫 시험에서는 전교 3등을 했다. 그 이후로는 살짝 학습의욕이 줄어들기도 했고 친구들과 노는 게 너무 재미있어 공부를 좀 더 게을리하긴 했지만 거의 전교 10등 안은 놓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와 식탁에 앉아 책을 읽고, 영어단어를 외우고 시험을 치는 활동이 재미있었던 것 같다. 엄마와 같이 무엇을 한다는 게 포근하고 행복한 느낌이었고, 이런 활동으로 학습능률이 오르자 그 이후부터는 나의 전교 등수나 나의 성적이 학업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동상이몽이라 했던가. 엄마는 나와 오빠를 같이 식탁에 앉혀두고 공부를 하셨지만 오빠는 나와는 다른 생각이었던 것 같다. 늘 시계만 쳐다보며 지루해했고 엄마의 영어단어 테스트를 격하게 싫어했다. 나는 오빠가 배부른 투정을 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마치 소시지 반찬을 해주었는데도 왜 내가 좋아하는 반찬은 없냐고 투정하는 아이처럼. 좋은 학원들 다 보내주고, 숙제 봐주고, 관심을 한가득 받고 있는데 대체 왜 공부하지 않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교사가 된 지금에는 많은 아이들을 보며 어린 시절의 오빠도 이해하게 되었다.

이렇게 나는 어린아이 때부터 학창 시절까지 전혀 엄마를 걱정시키지 않고 성장하게 되었다. 그래서 늘 엄마는 우리 딸, 우리 공주, 너뿐이야, 너덕에 산다 등 나에게 늘 고마워했고 그런 말이 듣기 좋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부모님이 하신 부동산 투자가 생각만큼 좋은 방향으로 풀리지 못한 것 같았고, 또 인터넷신문이 대중화되면서 종이신문사업은 사양화되어 집안이 어려워지기도 했는데 그때 엄마의 표정은 늘 안 좋았고, 나가서 혼자 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시기도 했고, 그래도 니 덕에 산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내가 알기론 엄마는 오빠에게는 별다른 내색이나 말씀을 하시지 않았고, 오빠는 우리 집안의 사정을 몰랐던 것 같다. 나는 늘 마음이 묵직했다. 내 덕에 산다는 엄마를 실망시키거나 힘들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런 묵직한 마음은 지금도 늘 나와 함께하는 것 같다.

오빠는 결혼할 때도 집을 구하는 일, 수리, 경제적인 부분 등 대부분을 부모님께서 지원을 해주셨다. 그리고 오빠가 첫 아이를 낳았을 때도 100일도 안된 나의 첫 조카는 부모님 집으로 왔다. 엄마는 일 년간 아예 집으로 데리고 와 아이를 키워주셨고 맞벌이인 오빠 부부는 주말에만 아이를 데려가곤 했다. 그때는 나도 근무지를 옮겼고, 고등학교 3학년 담임을 맡아 거의 매일 야간 자율학습 감독에, 주말 자율학습 감독까지 아주 빡빡한 근무 일정을 소화할 때라서 어쩌다 한번 주말에 본가에 가면 몹시 피곤했고 누워서 뒹굴거리고 엄마가 차려주는 맛있는 밥을 먹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그런데 조카가 깰까 봐 TV 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고, 아이를 돌보느라 정신없는 엄마는 다 큰 성인인 나까지 보살필 기력은 없어 보이셨다. 그리고 6개월쯤 흘렀을 때, 하루는 엄마는 나와 통화를 하며 우시는 게 아닌가. 친구들과 모임에 못 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집안에서 아이만 보고 있으려니 답답함이 몰려오고 수술한 무릎도 더 아프신 것 같았다. 그때 엄마에게는 육아 우울증이 찾아왔던 것 같다. 나도 멀리서 도와드릴 수 있는 것은 없고 답답한 마음에 무릎관절에 좋다는 우슬즙을 집에 보내드리는 것 밖에 하지 못했다. 그런데 옆에 있던 동료 중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 왜 네가 하니?



조카가 첫 돌이 채 안됐을 무렵 나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준비하게 되었다. 나는 본가는 부산, 근무지는 포항이었고, 신랑은 광주에서 살고 있었다. 서로 바쁜 직장생활을 하며 결혼까지 준비하려니 하루가 48시간이어도 모자랐던 것 같다. 혼수, 예단준비, 신혼집 알아보기, 상견례 준비. 그 모든 것은 내가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나에겐 흔히 있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이사온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아무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고기, 과일가게는 어디가 좋은지 동료 선생님에게 물어보았고, 예단 들어가는 날에는 죽도시장에서 유명한 문어를 주문하고 찾아와서 보자기로 포장하고, 은행에서 예단비로 드릴 현금을 찾아 봉투에 바르게 넣고, 한우, 이불 등을 차에 싣고 3시간 반을 달려 광주로 향했다. 예단편지는 교무실에 붓글씨를 잘 쓰시는 어르신께 부탁해서 작성했다. ‘신부의 아버지 드림’이라고 써주셨다.

그 당시에도 엄마와 통화를 하면 늘 조카 돌보며 힘든 얘기, 오빠에게 서운한 얘기, 아버지에게 서운한 얘기들을 털어놓으셨고 나는 들으며 호응하는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일요일에 광주에서 웨딩촬영을 하고 시부모님과 저녁식사를 하고 새벽 3시에 포항으로 돌아오며 졸음운전을 할 뻔했고, 휴게소에 잠시 눈 붙이고 출발하려다 날 지새울뻔한 얘기는 신랑에게 밖에 하지 못했다. 나의 엄마는 나의 얘기를 들을 여유가 없으시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임신을 했고, 아주 길게는 아니지만 초반에는 제법 입덧을 했다. 그 당시 나는 고등학교에 근무 중이라 야간 자율학습 감독 업무가 제법 힘겹게 느껴졌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 해야 하기에 못하겠다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늘 그렇게 남을 의식하며 현재의 나를 견디게끔 살아왔다. 힘들게 하루 일과를 마친 후 퇴근하고 돌아와서 전기밥솥에서 밥 짓는 냄새를 맡고 운 적이 있다. 밥 냄새도 싫고 그저 시큼하고 상큼한 음식들만 생각이 났다. 호르몬의 노예가 되어 모든 것이 서글프고 속상하고 억울한 시기였다.

갑자기 어렸을 때 아버지가 가끔 해주시던 갱시기 죽(김치와 콩나물을 넣고 죽처럼 끓인 경상도 음식)이나 엄마가 해주는 김치찌개를 먹으면 속이 가라앉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침 새언니가 둘째 조카를 비슷한 시기에 임신한 때였는데 엄마와 통화 중 새언니가 먹고 싶어 해서 김치찌개를 끓여서 오빠네 집에 보내려고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전화 너머 입덧이 심하진 않다는 말을 하곤 전화를 끊었다.


아들이 태어나고 10개월쯤 됐을 무렵 신랑은 육아휴직을 하고 나는 복직을 했다. 연말이 되자 한 해 동안의 긴장이 풀렸는지 아주 심하게 감기를 앓았고 아무리 병원을 다니고 약을 먹어도 낫지를 않았다. 마침 그 무렵 우리는 분양받는 아파트 때문에 일이 많았다. 하자보수 점검을 해야 하는데 아들을 데리고 가자니 제대로 보지 못할 것이 뻔하고, 혼자만 가자니 우리의 새 집을 제대로 살피고 오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함이 들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는데 엄마는 내가 꼭 가야 하냐며, 첫째 조카의 어린이집 행사가 있어서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결국 나는 시부모님께 SOS를 했고 다행히 먼길을 달려와주셔서 일처리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감기는 계속 낫지 않았고 한참을 앓아야 했다.


나의 아이와 둘째 조카는 3주 간격으로 태어났다. 아이 하나를 키우며 고충을 털어놓을라치면 엄마는 하나는 낫다, 둘은 정말 다르다, 교사인 너는 아이 키우기에 좋다 등 나의 고충이 무색하리만큼 덮어두고 말씀을 시작하셨다. 특히 코로나 바이러스가 초창기 유행할 무렵 모든 어린이집이 휴원하고 온 국민이 공포에 사로잡혀 집안에만 갇혀 지내던 시기에는 더했다. 맞벌이인 오빠네 부부를 대신해 아들 둘을 보시던 엄마는 다시 2차 육아 우울증이 오는 듯했고 아들 하나인 나의 생활은 그저 평탄하게만 보셨다. 나는 늘 엄마의 고충을 들어야 했고 점점 내 마음은 묵직해져만 갔다.

어느 하루, 여느 날과 다름없이 엄마는 전화기를 붙잡고 한참을 투덜거리셨다. 오빠와 아빠가 조카들을 돌보는 엄마의 고충을 몰라줘서 서운하고 몸도 마음도 힘들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몇십 분간의 통화로 전화기가 끓어오르고 내 마음도 점점 끓어올랐다. 왜 나한테?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것 같다. 원인 제공은 다른 사람들이 했는데 그것의 폐기물 처리는 왜 내가 하는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순간 나도 참지 못하고 욱하며 그럼 애들을 봐주지 말던지 오빠한테 얘기를 하라고, 왜 엄마가 해결할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나한테 얘기하냐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러자 엄마는 당황한 듯

-니한테 뭘 해달라는 게 아니라.. 그냥 엄마도 답답해서 그러지.. 그냥 이렇게 얘기하고 털어버리는 거지.. 딸한테 안 하면 누구한테 하겠노..

라고 하셨다. 어색하게 통화를 마무리하고 나도 좀 더 참을걸 괜히 질렀나 하는 마음 반, 당분간은 이런 말씀 안 하시겠지 하는 후련한 마음 반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엄마는 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말이 다소 극단적 일지 모르지만 이 세상의 많은 엄마들이 감정 쓰레기를 딸에게 처리하며 딸에게 위안받고는 역시 엄마는 딸이 있어야 해, 우리 딸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엄마는 여러 가지 본인의 답답한 심정을 나에게 털어놓곤 했던 것 같다. 아버지가 주방을 어지럽히는 것부터 반찬 투정하는 일과 같은 시시콜콜한 얘기부터 잘못된 부동산 투자로 집안이 힘들어진 일과 같이 심각하고 진지한 얘기들까지. 나는 늘 엄마의 편이었다. 그랬구나, 아빠가 잘못했네. 어릴 땐 그저 나는 엄마 편이라는 생각이 강해서 아무런 죄책감이나 마음의 혼란은 오지 않았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과 나에게 아침밥을 차려주시는 아버지의 손을 보며 조금씩 죄책감도 들었던 것 같다. 그래도 모두 나에게는 소중한 가족인데 나는 언제까지 엄마의 편만 되어야 할까.

내가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왔다는 것을 깨닫자 나도 모르게 원 가족과 사회적 거리를 유지했던 것 같다. 엄마가 조카들을 돌봐주느라 나에게 조금 무관심하더라도, 엄마가 오빠나 아빠 때문에 속상한 일이 생기더라도 나는 한걸음 멀어져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엄마의 감정 소용돌이 속으로 내가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지금도 가끔 신랑이 둘째 딸 계획에 대한 미련을 내비친다. 나는 솔직하게 말하지는 못하고 그저 둘째 계획은 생각이 없다고만 표현했다. 솔직한 내 마음을 털어놓자면, 나는 나와 같은 딸을 낳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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