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껏 축하받지 못하는 둘째의 성공
어릴 때부터 아빠는 오빠와 나를 많이 차별하셨던 것 같다. 물론 오빠의 기억과 나의 기억은 일부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은 인정한다. 아버지는 오빠가 시험기간일 때에는 거실에서 보던 텔레비전도 끄고 나에게도 조용히 하라고 하셨다. 내가 공부하느라 방에 있을 때에는 거실에서 모든 가족들이 모여 텔레비전을 보았고, 심지어 오빠는 내가 임용시험을 준비하느라 방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에도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며 노래를 큰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하였다. 지금도 강렬했던 그의 노랫자락을 기억한다.
- 본능적으로 느껴졌어, 넌 나의 사람이 된다는 걸, 워어 워어어어
오빠가 다니는 바둑학원에 따라갔다가 바둑판에 앉아서 졸고 있는 오빠만 바라보다 온 나는, 내가 더 잘할 수 있다고, 더 열심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기회를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나는 중학교도 꽤 괜찮은 성적으로 졸업했고, 고등학교 시절에도 전교 1, 2등을 다투며 생활했다. 대부분 정시로 대입을 준비하던 시절이었고 나는 보기 좋게 수능에서 물을 먹어 12년간 쌓아온 것이 물거품이 되는 경험을 했다. 나는 분명 다 쉽다고 생각하며 풀었던 것 같은데. 믿고 싶지 않은 결과가 나왔고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나에게 재수 도전을 권했다.
나는 흥이 꽤 많은 학생이었고, 마침 마음 맞는 친구들과 아주 친하게 지내고 있던 터라 노는 시간이 아주 즐거웠다. 또 워낙 잠이 많아 독서실에서도 조는 시간이 많았고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도 자다가 걸려서 혼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런 단점을 보완해서 일 년간 나 죽었다, 생각하고 학업에 집중하면 좋은 결과를 볼 것도 같았다. 무엇보다 나의 소원이었던 '인 서울해 독립생활하기'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같다.
나는 광고홍보학이나 방송, 언론 쪽으로 흥미가 있었는데 그런 계열을 전공하려면 그래도 인 서울에, 소위 10위권 안에는 드는 꽤 괜찮은 학교를 가야 될 것 같았다. 집에서 슬쩍 운을 띄워보았으나 돌아오는 아버지의 답.
- 그냥 성적 맞춰서 사범대나 가서 선생님이나 해. 여자한테는 그게 최고지. 오빠였으면 내가 빚을 내서라도 재수시킬 텐데 넌 굳이 서울 갈 필요가 있나. 만약에 원서 넣은 학교가 다 떨어지고 정 안되면 전문대라도 가.
15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말씀은 잊히지 않고 이런 일화를 누군가에게 얘기할 때마다 눈물부터 차올라서 담백하게 표현하기가 힘들다. 사실은 내가 사랑받지 못한 딸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일화 같아서 아무에게도 말 못 했던 것 같다. 남편과 나의 상담 선생님에게만 얘기한 에피소드이다.
결국 나는 사범대를 진학했고, 그 해 설날 아버지는 큰집에서 친척들이 모이기 전 나를 불러 서울에 있는 대학에도 붙었지만 지방 국립대를 선택한 거라고 얘기하라고 하셨다.
아, 아버지!
평소에도 아버지는 동생인 나에게 늘 오빠 밥을 차려주라고 하셨고, 설거지도 동생인 내가 하는 게 보기 좋다고 하셨다. 내가 동생이어서인지, 딸이어서인지, 둘 다인지 이유는 정확하지 않다. 오빠는 집에 도착하기 5분 전쯤이면 나에게 전화를 하여 라면 끓일 물을 올려놓으라고 명하곤 했고 나는 오빠가 시키는 모든 것들이 싫었다.
조카들이 6살 아들, 4살 아들인데 부모님 모두 첫째 조카를 편애하는 게 느껴질 때는 마음이 불편해진다. 첫째 조카는 태어나면서부터 거의 전담하여 돌보다시피 하셨으니 어떤 때는 이해가 되지만 어떤 때는 둘째 조카가 꼭 어린 시절 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쓰릴 때가 있다. 말씀으로는 첫째 조카가 여리고 둘째 조카가 욕심이 많아서라는데, 4살, 6살이 욕심이 많아봤자이고 또 당연히 욕심이 많고 자기중심적인 나이 아닌가.
그래서 하루는 엄마에게 조카들을 차별하지 말라고, 첫째 조카를 편애하는 면이 있다고 말했더니 엄마는 수십 년 전 아버지가 했던 말과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 첫째는 애가 여려서.. 늘 걱정이 되어 그러지.
그러곤 덧붙이셨다.
- 첫째가 잘되야하는데 걱정이야.
두둥. 첫째가 잘되어야 한다니?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엄마. 둘째가 잘되면 하늘이 쪼개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첫째보다 잘된 둘째는 환영받지 못할 일인가? 열심히 노력하여 잘된 둘째는 죄라도 지었나? 갑자기 울분이 차올라 나는 이성을 잃고 둘째가 첫째 앞길을 가로막는 것도 아니고 알아서 각자의 길이 있는 것이지 왜 누가 더 잘되야한다느니 그런 말을 하시냐며 쏘아댔다.
당황한 엄마와 흥분한 나. 다행히 아들의 어린이집 하원 시간이 다가와 자연스럽게 전화는 끊어졌고 그 뒤로 엄마와 그 주제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그날 하루 동안 나는 심장이 뻐근했다.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오빠는 정이 많고 여린데 나는 못됐다고 표현하셨다. 나는 아빠에게 욕심 많고 앙칼진, 못된 아이였다. 왜 동생을 놀리거나 동생이 아껴놓은 소중한 용돈을 훔쳐가는 오빠에게 여리다고 하는지, 나는 오빠가 괴롭혀서 화를 내는건데 못됐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늘 부모님은 너는 걱정이 없는데, 하시며 오빠에 대한 걱정과 염려 가득한 말들만 나에게 하셨다. 왜 부모님의 관심과 지원은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지, 왜 늘 관심과 지원은 오빠의 차지인지, 오빠를 향해 원망도 해보았다. 계속 저렇게 도와주니 오빠가 더 의지하는 거라고, 약간의 질투는 숨겨두고서 부모님을 설득도 해보았다. 나는 늘 겉으로는 고고하고 우아하지만 물 밑에서 열심히 발을 휘저으며 헤엄치는 백조처럼 아등바등하며 사는 것 같은데, 왜 오빠는 느긋한 베짱이처럼 부모님이 부지런히 일궈놓은 곡식을 당연하다는 듯이 나눠 먹고 있는 걸까 생각했다. 오빠가 받는 것만큼만, 또는 다른 집의 아이들이 받는 것만큼 더 지원받으면 난 더 잘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은 그것이 내가 더 노력하지 못했고, 그래서 얻지 못한 결과물들에 대해 비겁하게 변명하고 싶은 못난 나의 비합리적인 신념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시간이 더 흘러서는 부모가 더 관심을 쏟고 더 기대하는 환경에서 자란 첫째들도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의 오빠도 첫째라서 견뎌야 하는 무게감도 상당했을 것이다. 어쨌든 모든 엄마들에게 누가 더 잘되야하고, 잘되지 말아야 하고는 없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프레임은 첫째나 둘째 모두의 삶을 테두리 지어버려 그들의 삶을 속박하게 된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첫째와 둘째, 셋째, 넷째들이 태어난 순서에 상관없이 그저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