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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 May 07. 2020

'괄도네넴띤'을 아시나요?

'개저씨', '꼰대', '라떼충'... 남발하는 혐오표현에 대하여


“라떼는 말이야~”
“어우 그만 하세요, 요즘 애들 또 꼰대라고 욕할라.”


 근 몇 년간 사회가 참으로 조심스러워졌다는 생각을 한다. 그만큼 개개인이 존중받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남자친구 있냐’라고 가볍게 묻는 사람도 줄었다. 자신의 성적 지향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각종 미디어에서도 트랜스젠더와 퀴어 등에 대한 언급이 자유로워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성친구’에 대해 섣불리 묻지 않게 된 것이다. 그 외에도 수직적 사회체계가 점차 수평화되고 있는 걸 나날이 실감한다. ‘Z세대 겨냥’ 을 내세운 기업들은 더이상 어린 고객들을 무시하지 않고 극진히 대우해준다. 덩달아 어린 고객들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어린 직원들도 직장에서 덜 무시받게 됐다. 예전 같았으면 바짝 차렸을 군기도 조금씩 해체되고 있다. 이전에 당연하게 무시되었던 불편함은 비로소 불편한 것이라 인정받기 시작했다. 불편한 장난을 치는 상사는 어느새 ‘꼰대’ 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으며 비판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사회적 서열은 나날이 수평화되고 있는데, 왜인지 ‘젊은’ 사람과 ‘나이든’ 사람의 간극은 자꾸 멀어지는 것 같다. ‘꼰대 같아요’ 라는 따끔한 후배 직원의 말에 상사는 이제 자신의 모든 발언이 꼰대 같으면 어떡할까 불안해진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에서 지영의 남편 대현에게 직장 동료들이 이런 말을 건넨다. “요즘은 사회가 너무 예민하잖아. 아무 말이나 하면 안 돼~” 그 장면을 처음 봤을 때는 화가 났다. 기존의 사회 관습을 타개하고, 옳은 것을 옳고 그른 것을 그르다 말하는 분위기에 편승하려 노력하기는커녕 볼멘소리만 해대는 것 같아 좋게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니, 나 역시 인상을 찌푸린 '젊은 꼰대'가 아니었나 싶은 것이다.


 흰머리가 검은머리와 비슷해진 아빠는 어느덧 60세를 바라보고 계신다. 가정적이고 친절한 사람이라고 늘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직장에서 아빠의 모습에 대해까지 상상해본 적은 없었다. 아빠가 직장에서 내 또래 사람들에게 꼰대라고 비난받으면 어떡하나, 이런 고민이 들자 답답함이 엄습했다. 때때로 아빠와 나의 사고방식이 안 맞다고 느끼는 지점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럼에도 아빠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개저씨’, ‘꼰대’, ‘라떼충’ 이라는 혐오딱지를 갖게 되는 것이 달갑지 않았던 것 같다.


 “요즘 애들은 이거 괄도네넴띤이라고 읽는다며?”


 아빠는 아마도 회사에서 주워들었을 오래된 농담 하나를 들고 와 내게 꺼낼 때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언어유희였다. '팔도비빔면'을 ‘괄도네넴띤’ 으로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단어를 우스꽝스럽게 바꿔 말하고 다니는 게 한때 젊은 세대에서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 아빠가 꺼낸 구시대적 농담에 나도 모르게 아빠에게 타박을 주고 말았다. 


 “그거 유행 지난 지가 언젠데.” 


 늘 그랬듯 퉁명스럽게 내뱉고 생각해보니, 아빠에게 너무 불친절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꼰대가 되고 싶지 않은 아저씨들에게 우리는 너무 불친절했다. 변화를 직접 만들어내는 소수의 사람들만 움직일 것이 아니라, 잘 몰라서 도태될 위험에 처한 사람들까지 이끌 수 있어야 사회는 진정으로 변화할 수 있다. 무조건적인 비난을 앞세우면 사회는 요지부동이 된다. ‘개저씨’ 수준을 운운하기 전에 왜 당신의 행동이 비판받아 마땅했는지를 설명하는 것. ‘틀딱’ 이라고 욕하기 전에 적어도 우리가 만들어낸 변화와 유행을 함께 공유하는 것.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아빠, 요즘 회사에서는 뭐가 유행이야?”


 그래서 묻기 시작했다. 서로에 대해 모르면, 차차 알아가면 되는 거다. 모르는 것에 대해 타박하기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누군가는 지금도 ‘괄도네넴띤’이 무슨 뜻인지 모를 수도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아는 것이다. 알아야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해야 상생할 수 있고, 상생해야 함께 변화할 수 있다. 그렇게 점점 가까워지면 된다. 수평선 끝과 끝의 두 점이 만나 하나의 점이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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