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본질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고 죽을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너무 어려운 이야기지만 삶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이 글은 불완전한 한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라서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평생 스스로에게 존재적 질문을 수백 번 던졌고 20여 년 전 나만의 결론을 만났다. 존재적 문제를 해결하고 지금까지 삶의 고통과 상관없이 매 순간 기쁨과 충만함을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이 답에 확신이 있다. 어떻게 죽을지 알고 다른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나에 대한 '궁금증'과 제대로 알고 싶다는 '갈증'
우선 내가 누구인지 정말 궁금해야 한다. 제대로 알고 싶어야 한다. 어딘가 적혀 있는 질문과 논제 거리 정도로 볼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에 대해 인생 최대의 갈증이 있어야 한다.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물론 본인 스스로 궁금했다고 생각할 수 있어도 어딘가에 이끌려 궁금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나눌 내용도 스스로 최종적인 결론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사람, 환경 (총합으로는 신의 도움) 등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라고밖에 설명 못하겠다.
만약 '나는 누군가'에 대한 정답이 있어서 그것을 알면 모든 것이 풀리면서 끝날까? 아니다. 위대한 여정은 그 이후 시작된다. 삶의 나침반이 되어 방황해도 돌아볼 진북(眞北)이 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알려는 노력보다 일 잘하고 돈 많이 벌어 성공하거나 원하는 것 얻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 주제가 어렵기도 하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지금의 순간들이 소중해서 그것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답 내려지는 것들에 에너지를 쏟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보편적 합리성을 넘어 더 깊은 본질을 탐구하려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이 세상에는 쉽게 이해되어 얻는 것이 있고 진심으로 원하거나 힘들고 슬픈 경험 뒤에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보물은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나에 대해 물어보면 어떻게 답하나? 우리는 이름을 말하거나 나이, 직업(업 자체), 직위(직책), 좋아하는 것, 취미, 성격(MBTI) 등을 말한다. 이 정도 답변에서도 하나하나 떼어보면 깊이 있게 논할 수 있다. 자신을 설명할 때 개인의 성향으로 분류되는 것도 있고 회사 직위 등 외부 환경에 의해 정해지는 것도 있다.
나는 착하고 좋은 사람인가? 같은 회사에서도 누군가에게는 너무 좋은 사람이고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사람이 될 수 도 있다. 특정 커뮤니티에서는 너무 좋은 사람인데 가족 하고는 관계를 끊은 분들도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怪物)'을 보면 사람의 생각과 시선에 따라 우리 모두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에 근거해도 누군가 우리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다. 나를 정의하는 기준이 계속 바뀐다. 친절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무서운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나 스스로 어떠한 사람이라고 말해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회사에서 대리, 부장, 팀장이면 그것이 우리를 설명할 수 있을까? 디렉터, PD, 디자이너가 우리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본질일까? 마케터, 의사가 우리의 근원적 질문에 대한 해답일까? 다른 사람과 조직이 나라는 존재를 정의할 수 있을까? 내가 태어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까? 일은 우리가 생각하고 살아가는 방식의 하나일 뿐 우리 존재 근원을 설명할 수 없다. (물론 일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인지 깨닫고 성장하는데 너무나 중요한 재료가 되기에 다른 글에서 더 깊이 나누고 싶다) 다른 업을 선택하면 또 다른 내가 되는데 그것이 '나'라고 말하면 될까? 아니면 그 선택을 한 생각과 성향, 욕망을 '나'라고 할까?
친구, 직장과 업계 동료, 회사 등 외부의 것들이 나라는 기준을 정하는 것을 허용할 것인가? 일반적인 삶에서는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고 좋은 정의와 피드백은 도움이 된다. 하지만 지금 주제는 나의 본질이기에 다르게 생각해 보자. 누군가 나를 낙오자라고 정의하고 못생겼다고 하고 빵 사 오라고 하면 계속 사 올 것인가? 그 프레임에 빠져서 진짜 그렇게 믿고 우울한 삶을 살 것인가? 평가표를 나와 같은 인간에게 넘기지 말자. 남이 정해준 나. 예쁘다. 못생겼다. 돈 많다. 돈 없다. 이러한 것들로 나의 존재 권한이 변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자. 또한 한 회사의 임원과 대표가 되고 탁월하게 일하면 우리의 존재가 달라지나? 영원할까? 진짜 영원 말고 이 땅에서만이라도 영원할까?
나는 내가 시작하지 않았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어디서 어떻게 찾고 있나? 명상? 철학자의 글? 스스로 또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 우선 나라는 존재는 내가 시작해서 생겨난 존재가 아니다. 옆 사람과 사회가 만들어 준 것도 아니다. 나라는 존재는 수많은 사건이 지나가는 통로고 자살을 제외하고 내가 끝낼 수도 없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인 듯 주체적으로 살 수는 있어도 진짜 내가 나의 주인일 수 없다. 어느 날 내가 있다는 인식을 뒤늦게 할 뿐이다. 그런데 내가 나의 주인이고 진짜 나를 알 수 있을까? 본질이 아니라면 본질 같아 보이는 수천 가지의 것들로 나를 포장할 수는 있다.
인간은 내가 누구인가를 오랫동안 탐구해 왔다. 정말 놀랍도록 깊이 있는 답변들도 많다. 특히 철학자들의 생각은 흥미롭고 뭔가 깨달아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반대로 이 생각을 멈추고 그저 현재를 누리며 살라고 하는 이도 있다. 계속해서 나의 시작과 본질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면 우주의 근원은 뭘까라는 생각까지 이어질 수 있다. 알 수 없는 물질과 에너지가 폭발해서 나와 당신의 심장을 만들고 이 아름다운 세상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그리고 이 깊은 논의를 다루는 우리들의 사고와 자아(Ego)까지 만들어진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믿을 수가 없었다. 우주 먼지 같은 존재가 나의 뿌리, 선조라고 생각할 수 없기에 인간이 감히 정의하고 생각할 수도 없는 다른 존재와 말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나를 만들지 않았기에 나를 만든 이가 나를 누구라 하는지 듣자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결론이다. 허무한가? 내게는 그 어떤 것보다 최고의 결론이었다. 사실 이 내용 제외하고도 이야기를 끌어갈 수 있지만 본질 이야기하는데 비본질을 계속 이야기할 수 없어서 나눈다. 나를 만든 이로부터 나에 대해 알아가는 것. 누구도 이렇게 명확한 이야기를 제대로 해주는 곳을 본 적이 없다. 물론 이것은 사실과 믿음의 문제로 귀결된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사실도 믿음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 많다. 과학까지도 믿어야 하는 부분이 있다. 과학은 증거에 기반한 확률적 신뢰고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현재까지 알려진 사실을 잘 설명하는 모델이다. 과학에 대한 주제가 아니기에 다시 돌아와서,
그러면 나를 만든 이 가 누군가? 인간, 로봇이 나를 만든 것은 아닐 것이기에 다양한 종교 서적과 글을 보게 되었다. 물론 종교적 접근이 쉬운 환경에 살아왔기에 다양한 관점들을 어릴 때부터 접했다. 나를 만든 이가 신(God)이라고 믿는다면 그때부터 나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된다. (이 내용이 지금까지 나눈 내용과 나눌 내용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가 있다)
인간이 자신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류 최대의 교만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나의 영역을 벗어나 신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그 존재에 기대는 의존은 최고의 반응이라고 믿는다.
관계를 통한 존재 규명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나를 설명할 수 있다. 지구상에 나 혼자만 있다면 나를 누구에게 설명할 것인가? 설명을 해야 하나? 브랜딩이라는 것을 해야 할까? 타인이 나와 함께하기에 존재가 규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남을 너무 의식하며 그 사람에 맞춰서 사는 것 또한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기에 나라는 존재감을 느낀다. 인생 혼자라도 신이 불러준다면 외롭지 않은 길이 된다. (개인적으로 외로움과 두려움으로부터 굉장히 자유하다) 우리가 만나게 되는 분들을 통해서도 내가 어떠한 모습인지 알게 된다. 주변에 뭔가 이상하거나 불편하게 느껴지는 분이 있나? 타인의 모습을 통해 나라는 존재가 거울이 되기도 하고 대비되면서 각자 고유한 모습을 알게 된다. 내 부족함을 깨닫게 될 때도 있다. 주변 사람이 우리를 힘들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분을 마냥 욕하지만 않는다면 오히려 성장하고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 된다. 어려웠던 사람으로 인해 힘들었던 그 시기가 축복이 되기도 한다. 어려움이 찾아오는 것은 더 견고한 내가 되는 과정이다. 그러니 역설적이게 이 또한 신과의 관계 안에 있다면 사랑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사랑하지만 있는 그대로 있기를 원치 않는다는 생각. 더욱 성장하고 또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상태가 되게 하는 여정으로 초대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려운 시기가 올 때 힘들지만 동시에 감사하게 된다.
가정, 학교, 회사, 취미 생활 등 특정한 공동체가 있다. 우리는 그곳에 소속됨으로써 안정감을 느끼고 더욱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기회를 얻게 된다. 내가 나아갈 방향, 되고 싶은 모습이 정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군중 심리가 있고 모두가 가는 길 속에 방황하게 되기도 한다. 완전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비교의식에 빠진다. 나 자신을 바로 알아야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속한 커뮤니티에서는 아름다운 모습이 많다고 가정해 보자.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서로 사랑하고 공부하고 성장하고 멋진 일들이 일어난다고 해보자. 그런데 그곳이 만약 해적선이라면. 갑판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너무 아름다워 보이지만 우리가 죽음을 향한 낭떠러지로 가고 있는 배를 타고 있다면?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너무 극단적으로 몰아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결국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다음 질문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를 알면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해진다. 각자 고유하게 주어지는 소명에 따라 구체적인 삶이 달라지겠지만 큰 흐름에서는 같은 결과에 도달한다. 나를 지으신 이가 있다면 그분과 관계 맺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그리고 옆 사람도 그 관계 안에 있다면 싸우고 경쟁하는 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일까? 그들을 더 사랑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 지금 우리 옆에 있는 사람뿐 아니라 다음 세대에도 그 사랑이 흘러가야 한다.
나만 잘되면 될까? 돈 잘 벌고 성공하면 될까? 물론 각자의 가치관이 있기에 존중한다. (이 글 보는 분들에게 좋은 일이 생기고 잘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살 것 같은가? 짧고 굵게 살다 죽고 싶다는 분들도 봤다. 하지만 그 짧은 기간도 우리가 알 수 없다. 우리 계획대로 다 될까? 우리의 주도권이 맞을까? 삶은 알 수 없다. 우리의 욕구, 생각, 의지와 상관없이 삶은 시대를 이어 흘러간다. 뭔가 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얻고 보니 병들어 있거나 나이 들어서 누리지 못할 수도 있다. 반대로 크게 가진 것 없고 소소하지만 만나게 되는 따스함이 우리 삶에 분명 있다. 우리가 살던 집은 오래가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살게 될 것이다. 한 세대만 지나도 내 손자들조차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지난 세대 사람들에 대해 얼마나 생각하는가? 이 땅의 삶은 잠시 스치는 나그네 인생과 비슷하다. 한번 살 때 풍요롭게 살면 좋은데 그것을 당장 누리지 못하더라도 잘못 사는 것이 아니다. 정말 큰 가치를 발견하면 나머지 것들이 작아 보인다. 그리고 어떤 것에 목숨 걸고 싸워야 하고 집중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
영원을 갈망하자. 그 마음 품고 펼쳐지는 유한한 삶은 차가운 겨울이 아니라 봄이 된다. 오히려 하루하루가 더 소중하다. 가진 것 없다고 내 마음까지 가난할 이유가 없다. 내 마지막 청사진은 불행이 아니라 환희와 축제가 기다리고 있다. 나를 만든 이와 함께 소중했던 모든 이들을 만날 것이기에. 마지막 그림이 그렇다고 믿는다면 오늘 울지 말고 일어나서 기분 좋게 걷자.
우리는 원본으로 태어나 복사본으로 죽는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 그렇게 놀랄 것은 아니지만 문득 생각해 보면 너무 신기하다. 주변만 보면 그럴 수 있다 해도 한 나라, 다른 나라, 지구가 생기고 죽음을 맞이한 옛날 사람까지 포함하면 정말 많은 인구가 지구라는 별을 스쳐갔다.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사람들일까? 그런데 너무 많은 이들이 나의 고유한 정체성을 알지 못하고 복사본이 되어 죽는다. 타인의 꿈을 내 꿈인 듯 꾼다. 많은 이들이 가는 방향이 안전하다고 여긴다. 다른 사람이 무엇을 사고 입고 먹는지 궁금해한다. 뒤쳐지기 싫고 좋은 모습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기에. 눈에 보이는 것들에 집중한다.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많다. 공기, 와이파이, 사랑, 당신을 향한 마음.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것에 소질이 있고 무엇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력을 흘릴 수 있는지 놓치지 않기를. 우주에서 우리를 보면 점과 같아서 아무것도 아니게 보이지만 신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 많은 사람 중에 특별하게 나만. 나만. 나만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고 나를 더 사랑하신다. 그렇게 우주의 모든 이를 동시에 그렇게 사랑하신다. 그래서 신이겠지.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냥 부족한 한 사람이다. 현재는 일부 사람들을 품고 있지만 죽을 때까지 더 늘려갈 생각이다. 그러다가 돈을 조금 더 못 벌 수도 있다. 내가 가진 것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아깝지 않다. 이것은 하나의 예시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고유한 소명이 주어진다. 대 전제인 사랑은 같지만 그 형태는 다르다. 우리는 다르기에 서로를 위해 다른 모습으로 그 미션이 내려진다. 내가 나를 찾는 것 같지만 누군가(신)가 나를 포기하지 않고 추격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을 이유로 끝까지 찾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면 될지. 어떻게 기쁨에 충만하며 하루를 보낼지. 내 꿈이 누군가를 위한 것이 되는지 꼭 찾게 되길 바란다.
Appendix. 더 구체적으로 나에 대해 알 수 없을까?
글을 통해 나를 발견할 수 있다.
글을 써봤나? 글은 손이 아니라 머리가 먼저 시작한다.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뭐부터 해볼까? 나를 대표하는 단어와 문장은 뭘까? 이것을 알기 위해 다양한 질문을 하고 써보자.
어떤 것이 가치 있다고 느껴지나? 어떤 사람이 되고 싶나? 어떤 것에 가슴 뛰나? 나는 언제 행복한가? 무엇을 하고 싶나? 뭘 잘하는 것 같은가? 무엇을 배우고 싶은가? 관심 있는 카테고리는? 궁금한 것은? 내가 존경하는 존재는? 싫어하는 것은 뭘까? 가고 싶은 곳은? 꼭 피해야 할 것은?
그 외 다양한 질문이 있겠지만 우선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간단하게 써보자. 그리고 일주일, 한 달 뒤 다시 써보자. 그리고 몇 개월 계속 그렇게 해보자. 어느 정도 내가 생각하는 상위 개념으로 나에 대한 설명이 좁혀질 것이다. 나만의 에센스가 만들어질 것이다. 최종적으로 한 문장 또는 한 단어로 나를 표현해 보자. 그 내용을 별도로 적어두자. 그리고 누군가에게 나눠보자.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나를 벗어난 행동을 하는지 아닌지 체크해 주는 분들일수록 더 좋다. 그렇게 내가 가진 본질적 핵심에 벗어나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가자.
몇 년이 흐르고 나만의 문장이 바뀔 수도 있다. 그러면 잘 못된 것인가? 아니다. 계속해서 상위 가치와 방향성이 변할 수도 있다. '너 변했어.'라고 하는 지인이 있다면 '변한 나를 있는 그대로 품을 수 없는 그대'만이 있을 뿐이다. 물론 나의 변함이 긍정적이고 바른 방향으로 왔다는 전제를 두고.
마지막으로 내 인생 중간중간 에센스를 나누며 끝맺고 싶다.
중학교 때 나의 문장은, '내가 가는 곳에 꽃이 피었으면 좋겠다.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자)'
군대 가기 전, '좋은 선임과 동료 만나길 바라지 말고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 손 내밀자.'
대학생 그리고 사회 초년생 때 정해진 에센스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동일하다.
1. 나를 지으신 이를 사랑하는 것
2. 그분이 지으신 모든 이를 사랑하는 것
3. 모든 일에 의미 발견하고 성장하며 감사하는 것
사실 언제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소중한 사람들 때문에 이 말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마지막 날에도 동일하게 지금의 일들을 할 것이고 기쁨만 남기를.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be in want. (Psalms 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