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반복된다.

챕터6. 기계의 종소리

by 송영광

같은 영화를 세 번째 보고 있다. 매 전환마다 같은 일이 반복된다. 새 도구가 등장한다. 기성세대는 적응하지 못한다. 아이들이 먼저 체화한다. 그리고 세계가 바뀐다. 1840년대 맨체스터의 공장에서, 2000년대 서울의 사무실에서, 2020년대 거실의 AI 스피커 앞에서. 줄거리도 같고 캐릭터도 같다. 다만 러닝타임이 짧아진다.기계 적응에 한 세대가 걸렸고, 컴퓨터 적응에 10년, AI 적응에는 2년이면 충분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전환에는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기계가 왔을 때, 학교가 그 적응을 담당했다. 컴퓨터가 왔을 때도, 학교가 정보통신 교육을 넣었다. 느렸지만 따라갔다. AI가 왔을 때, 학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24년 기준, 한국 초등학교의 코딩 교육은 연간 17시간이다. 중학교는 34시간. AI 교육이 아니다. 코딩 교육일 뿐이다. 영어는 연간 200시간이 넘는다. 세상은 세 번째 전환을 맞고 있는데, 교실은 두 번째 전환의 교과서를 펼치고 있다. 시간표만 260년 전에 멈춘 것이 아니다. 교육 내용도 한 시대 뒤를 걷고 있다.


기계는 시간을 바꿨고, 컴퓨터는 공간을 바꿨고, AI는 지식의 문법을 바꾼다.


세 번의 종소리, 세 번의 규칙 변경. 각각의 도구가 요구한 적응의 내용이 달랐다. 기계는 "규칙적으로 움직여라." 컴퓨터는 "빠르게 찾아라." AI는 "깊이 질문하라." 그리고 매번, 그 적응에 성공한 세대가 다음 시대의 중산층이 되었다. 적응에 실패한 세대는 이전 시대의 엘리트였더라도 다음 시대의 주변인이 됐다. 최고의 마차 제조공이 자동차 시대에 실업자가 되듯이. 최고의 타자수가 컴퓨터 시대에 쓸모를 잃듯이. 반대도 성립한다. 이전 시대의 낙오자가 다음 시대의 적응자가 되기도 했다. 공장의 규율에 적응하지 못해 쫓겨난 농부의 아들이, 다음 세대에서 기계를 발명하는 엔지니어가 되었다. 학교에서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던 아이가, 여러 개의 화면을 동시에 다루는 프로그래머가 되었다. 적응과 도태는 영원하지 않다. 종소리가 바뀌면 줄도 다시 선다.


여기서 케빈 켈리의 말이 울림을 갖는다. 와이어드 초대 편집장이자 미래학자인 켈리는 TED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피아노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모차르트를 상상해 보세요. 사회는 얼마나 큰 손해를 보겠습니까. 반 고흐가 태어났는데 값싼 유화물감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기술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도구는 위협이 아니다. 도구는 거울이다. 증기기관이 인간의 체력을 대체했을 때, 인간은 "그러면 나는 무엇인가?"라고 물었고, "지식을 다루는 존재"라는 답을 찾았다. 컴퓨터가 계산을 대체했을 때, "그러면 나는?"이라고 물었고, "정보를 연결하는 존재"라는 답을 발견했다. 이제 AI가 지식의 조직화까지 대체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 질문이 다시 돌아왔다. 켈리의 말처럼, 이것은 위기가 아니라 발견의 순간이다. 도구가 우리의 기존 능력을 가져갈 때마다, 우리는 더 깊은 곳에서 자기 자신을 만나왔다. 체력 뒤에 지식이 있었고, 지식 뒤에 연결이 있었고, 연결 뒤에는 —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다. 다음 장에서 그 이름을 찾아볼 것이다. 지금은 한 가지만 기억하자. 도구가 인간의 기능을 먹을 때마다, 인간은 작아진 것이 아니라 올라간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문자가 기억력을 죽인다고 했다. 맞았다. 하지만 기억력이 사라진 자리에 사유가 남았다. 러다이트는 기계가 노동을 죽인다고 했다. 맞았다. 하지만 노동이 사라진 자리에 기술이 남았다. AI가 지식을 평준화한다고 우리는 두려워한다. 맞을 수 있다. 하지만 지식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남을지는 — 두려움이 아니라 호기심으로 물어야 할 질문이다.


켈리는 덧붙였다. "죽을 때까지 학습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앞으로 30년 동안 삶을 지배할 중요한 기술은 대부분 아직 창안되지 않았기에, 당연히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는 새내기가 될 것입니다." 200년 전 공장의 종소리가 그랬듯, 30년 후의 어떤 소리가 우리를 다시 새내기로 만들 것이다. 문제는 그 소리가 무엇이냐가 아니다. 그 소리에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다.


다만, 새 도구는 늘 공포와 함께 왔다. 증기기관 앞에서 러다이트 운동이 일어났다. 방직기를 부수면 일자리가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인쇄술 앞에서 교회가 두려워했다. 성경을 누구나 읽게 되면 권위가 무너질 거라고 걱정했다. 기계를 부순 러다이트도, 인쇄기를 두려워한 교회도, 결국 시대를 막지 못했다. AI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불안도 같은 종류의 불안이다. "AI가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다", "아이들이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다." 교실에서 ChatGPT를 금지하면 창의성이 보호될 거라고 믿는 것도 같은 구조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인류가 새 도구를 만날 때마다 겪어온 가장 오래된 감정이다.


그 공포의 역사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극적인 장면은 2,400년 전 아테네에 있다. 소크라테스라는 남자가 새로운 기술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의 제자가 그것을 기록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그 기술의 이름은 '문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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