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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방전 Jul 15. 2020

진주와 진주 목걸이/ 마마 안데숀

모든 검정을 구별해낼 때까지


절벽이라는 말속엔 얼마나 많은 손톱자국이 있는지

물에 잠긴 계단은 얼마나 더 어두워져야 한다는 뜻인지

내가 궁금한 것은 가시권 밖의 안부

그는 나를 대신해 극지로 떠나고

나는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그다음 장면을 상상한다

 

안희연,  「백색 공간」 中  




카린 마마 안데숀의 그림은 분열을 용인한다. 정신의 분열뿐 아니라, 우리 존재가 이미 물리적으로 타당하게 산재散在해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듯하다. 안데숀복음서로 들어가는 길(마흐무드 다르위시, <유랑이 없다면, 나는 누구인가> 中)을 만들려 하지 않는다. 신약과 구약, 수난과 부활은 늘 순서 없이 혼재한다.

단순 수집되었다기보단 '발굴된' 다차원의 시공간을 통해 안데숀은 딱히 유형화하기는 힘든, 그러나 가려져 있던 시간의 어떤 두터운 계통과 속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계통은 우리가 어느 때건 다 써서 처분할 수 있다고 믿어온 오래된 잔돈 같은 것이지만, 이상하게도 언제나 그랬듯 다시 낯설다.




엘프리데 옐리네크로 가는 길


Karin Mamma Andersson, <Till Elfriede Jelinek> , 2006


 엘프리데의 배를 가르니 길이 있었다. 길은 검고 평평했고 곧게 뻗지 않은 채 조금은 지루한 것들을 하고 있었다. 길가에 쏟아지는 절벽들은 무고한 척했지만, 절벽이라는 말속엔 얼마나 많은 손톱자국이 있는지 그녀는 기어코 생각했다. 길 끝은 방이었다. 길은 방이 끼어드는 것을 허락했고 방은 길이었던 기억을 갖고 있었다.

방은 더 달랠 것 없는 연못이었다. 손잡이 없는 방문 밖은 소리 공포증을 불러일으킬 만큼 컴컴했다. 그러나 엘프리데에게는 오직 밤(nights)이 새로웠다. 궁금한 것은 가시권 밖의 안부였는데 밖으로 통하는 방은 아직 길보다 덜 검고 더 가파랐다. 그녀는 헤엄만 칠 게 아니라 발을 떼고 천장을 향해 비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끝없는 밤이었다. 영원히 나가는 방이었다. 마침내 식탁은 공중에 차려지고 엘프리데는 별이 지는 방향 발이 닿지 않는 방향 내가 없는 방향으로 넘어지길 반복했다. 모든 검정을 구별해낼 때까지.



*위 글은 안희연 시인의 시 <백색 공간>과 이승희 시인의 시 <식탁의 목적 혹은 그 외의 식탁들>, 그리고  마마 안데숀 그림의 제목들을 가져와 썼다. (맨 아래 참조)


*엘프리데 옐리네크로 가는 길(Till Elfirede Jelinek)

스웨덴어로 till은 영어 to (~에게, ~쪽으로)와 같다. 위 작품의 제목을 번역하면 <엘프리데 옐리네크에게> 혹은 <엘프리데 옐리네크로>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림으로 봐선  <엘프리데 옐리네크로 가는 길>이 적절해 보였다.

엘프리데 옐리네크(1946~)는 미하엘 하네케 Michael Haneke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의 원작 <피아노 치는 여자>를 쓴 오스트리아의 작가다. 페미니즘 작가로도 잘 알려진 옐리네크는 200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안데숀은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노벨 문학상 일러스트를 그렸다. 각 해의 수상자는 엘프리데 옐리네크 Elfriede Jelinek, 헤롤드 핀터 Harold Pinter, 오르한 파묵 Orhan Pamuk이었다.


2004년과 2005년 노벨 문학상
2006년 노벨 문학상



하네케의 영화를 볼 때, 혹은 토마스 베른하르트 Thomas Bernhard를 읽거나 루이즈 부르주아 Louise Bourgeois를 볼 때면, 예술가의 영혼이 작품이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관련된 여러 요소들이 있겠지만 결국 그것은 자기 우물에서 튀어나온 것들이고, 자기만의 물(water)이죠. 작품은 완전히 주관적입니다.
당신이 무언가를 파헤치는 순간 그것은 일종의 자기 이미지가 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자화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겠죠. 자화상이 아닐지라도, 거기엔 수많은 내가 있습니다. 루이즈 부르주아 작품에 수없이 많은 그녀가 있는 것처럼요. 피할 수 없는 일이죠. 우리가 다른 사람인 척할 수는 없습니다.

카린 마마 안데숀



진주와 진주 목걸이  


일반 상대성 이론에 사건의 지평선 Event Horizon 이란 개념이 있다. 우주 어떤 지점에 있는 관측자가 영원히 기다려도 볼 수 없는 매우 먼 우주의 경계선을 우주론적 사건의 지평선이라고 하는데, 우주가 정지해 있지 않고 가속 팽창을 하기 때문에 이 지평선은 시간이 갈수록 관측자로부터 점점 더 멀어진다. 현재는 약 160억 광년(빛의 속도로 160억 년) 너머에 위치한 것들이 우리에게 영영 닿지 않는다고 한다. 안데숀의 그림을 보며 이것을 떠올렸다. 그녀의 그림이 기억보다는 관측에 가깝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안데숀의 그림은 사건과 사건의 지평선 너머 모두를 관측한다. 그녀가 화폭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여러 개의 시간을, 과장하면 160억 광년 너머까지 표현해내고 있다는 찬사를 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그러나 여전히 그렇게 보인다. 안데숀은 우리에게 <보이는>, 혹은 <보지 못했지만 존재는 알고 있는>, <보고도 잊어버린>, <보이지 않지만 본다고 여기는> 다양한 시간을 나란히 놓는다. 여전히 상관없어 보일지도 모르는 이 나란한 시간들은 이제 서로를 훼손하지 않고 스스로를 엮는다. 어쩌면 빛의 속도보다도 빠르게, 쉬지 않고 맺어질 이 가파른 관계를 통해 안데숀은 사건의 지평선 너머를 담아낸다.


그녀 자신의 비유를 빌려 얘기하자면, 안데숀의 작업은 주핵珠核이 다른 무공주無孔珠를 꿰어 진주 목걸이를 만드는 행위에 가깝다. - "그녀는 자신의 진화를 목걸이의 진주들에 비유한다. 서로 밀접한 작품들이 갈라지는 그 틈에서 작업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그것들의 차이는 안데숀에게 중요하다"(https://www.modernamuseet.se/stockholm/en/exhibitions/the-moderna-exhibition-2006/participating-artists/karin-mamma-andersson/) 안데숀은 진주의 시초가 된 그 이물을 투시하듯, 일초에 하나씩 새로운 옆을 만든다(안희연, <백색 공간> 中). 이렇게 아주 작은 틈을 두고 곁에 자리하게 된 여러 개의 시간들은 그 공존의 형태가 아무리 가팔라도 질서나 위계를 강요받지 않는다. 그래서 안데숀의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완성의 총합이 던지는 메시지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뭉뚱그려져 보이는 것들 사이의 절벽과 틈을 더듬고 헤집어 보는 시도일지도 모르겠다. 그림에 붙여진 제목의 시간까지 더듬거리다 보면, 안데숀의 관측이 우주론적 사건의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져 있다는 주장은 결코 지나치게 여겨지지 않는다.


(*주핵 : 진주를 만들 때 넣는 이물질  / *무공주 : 구멍을 뚫지 않은 진주)




검정 시간 제목 ; 마마 안데숀의 무기


 <Dog Days> 전시에 관한 인터뷰(https://www.youtube.com/watch?v=xMc42ZakNtg)에서, 안데숀은 거대한 검은 물과 시간(시간 이동, 우리가 역사와 관계 맺는 방식)을 작업의 중요한 콘셉트로 얘기한 바 있다. 검정을 쓰는 일과 혼재된 시간을 다루는 것은 그녀 작품 전반에서 여전히 의미가 깊다.


 "예술가로서 저는 비교적 역사적 전통보다는 현대 미술에 속합니다. 이 점이 매우 흥미롭지요. 개인적 차원에서는 어떻게 나이 들어가는지, 어떻게 기억이 내면에 계속 자리 잡고 있는지, 어떻게 꿈을 꾸는지가 흥미롭습니다. 어떻게 잠에서 깨어나 꿈속에서 20 년 전 죽은 아버지를 봤다고 확신하는지 말이죠. 우리 뇌의 하드 드라이브 작동 방식은 매우 놀랍습니다. 특정 냄새나 장고 라인하르트 Django Reinhardt의 멜로디로 갑자기 어떻게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지. 우리가 지금, 여기, 그리고 다른 여러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는 방식은 환상적이기까지 하죠. "  

  - 카린 마마 안데숀


무제 untitled가 흔한 시대에, 앤더슨은 그림마다 거의 빠짐없이 제목을 붙인다. 그림을 묘사하지 않는, 그녀의 다소 부적합하고 비협조적인 제목(non-conformist title)은 아이러니하게도 관객에게 더 자유롭고 폭넓은 감상을 허락한다. 스웨덴 사람인 그녀가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붙인 제목들이 불러일으키는 기이한 분위기도 자주 거론되는데, 정작 당사자인 안데숀은 영어 제목은 별난 해석을 의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국제무대를 위한 실용적 이유에서였다고 말했다.


"관객인 우리가 제목의 출처와 이유를 알든 모르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식에 거대한 질서를 부여한다. 하나의 제목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읽힌다. 아마도 어떤 경우에는 제목은 단지 필수 에티켓처럼 작품을 일컫는 수단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제목을 읽고 이미지의 내용에 집중할 때, 제목이 반영하는 것에 걸맞은 단서나 작은 캐릭터들을 찾기 쉽다. 따라서, 비협조적 제목은 그 자체로 작품의 일부가 된다. 그것은 설명적인 제목처럼 이미지가 담은 바를 특정하지 않는다. 대신, 마치 문장의 의미에 담긴 어떤 분위기처럼 이미지 안을 떠돌아다닌다. "  

 - 마리아 엘랜더 Maria Elander 논문(2009) 『인식과 차용된 주제, 기억의 파편 : 카린 마마 안데숀의  가지 이미지 속에 담긴 내러티브 속성의 주제별 연구』(Recognition, borrowed subjects and fragments of memories: A thematic study of the narrative qualities in three images by Karin Mamma Andersson)에서

  

Karin Mamma Andersson, <Travelling in the family>, 2003


Karin Mamma Andersson, < Cry> , 2008




 카린 마마 안데숀 또는 마마 안데숀



 1962년 스웨덴 북부의 항구도시 룰레오 Luleå에서 태어났다.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스웨덴 예술가들 중 한 명이다. 2005년 카네기 예술상을 받았고 2010년 콜로라도 아스펜 아트 뮤지엄 Aspen Art Museum에서 첫 솔로 전시회를 열었다. 스톡홀름 왕립 미술 학교에서 공부했으며 현재 스톡홀름에서 살며 일하고 있다. 본명은 카린 안데숀이지만 존 스미스만큼이나 흔한 자신의 이름에 변화를 주기 위해 Mamma라는 가운데 이름을 붙였다. 같이 공부하던 친구가 똑같은 이름을 갖고 있어 구별하기 위해 붙였다는 일화도 있다.  


Q. 마마라는 별명이 농담처럼 시작됐다고 읽었습니다. 30 년 동안 그 이름을 썼는데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A. 마마라는 이름은 제게 약 20 년 동안 붙어 있었습니다. 재미로 시작했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더 좋고 아름답고 성가신 것으로 발전했죠. 그 계시를 받은 후부터 마마라는 이름 없이는 무얼 한다는 게 불가능해졌으니 말이죠.

2013년 인터뷰 (https://arterritory.com/en/visual_arts/interviews/5771-mothers_day


명상적이고 관조적인 분위기, 고요하고 꿈같은 서사, 극장 무대 같은 공간 구성. 이것이 마마 안데숀의 작품을 평할 때 자주 등장하는 말들이다. 안데숀은 초기 영화에서 가져온 이미지들과 북유럽 전통의 민속 예술을 참고하여 작업한다. 작업실엔 여러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된 이미지 파일이 여기저기 쌓여있다. 인테리어부터 스트리퍼 여성의 이미지까지 수집된 이미지도 다양하다. 최근엔 회화 이외에 입체 작업도 하고 있다.


쓰고 싶은 사진을 골라 벽에 붙여 놓습니다. 그리고는 그리고 있는 그림들 주변을 서성이죠. 사진의 구성을 따라 하고 싶을 땐 프로젝터를 이용하기도 하고 때론 사진을 정밀하게 따라 그리기도 합니다. 제 고유한 것을 적용할 수 있도록 이미지들은 무조건 흑백이어야 합니다.  

마마 안데숀


Mamma Andersson, <Hangman>, 2014


마마 안데숀을 얘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또 한 명의 스웨덴 화가가 있다. 바로 딕 벵손(Dick Bengtsson, 1936–1989)이다. 둘은 역사적 레퍼런스를 많이 쓴다는 점에서 자주 비교된다. 벵손은 안데숀이 가장 사랑하는 예술가 중 한 명이자 가장 많은 영감을 받은 화가이기도 한데, 실제로 벵손의 그림을 보면 안데숀이 그를 통해 어떤 배움을 얻었는지 엿볼 수 있다.


그의 작업이 제 작업의 기초가 되었다 말할 수 있습니다. 90년대 이 책(딕 벵손의 화집)은 제게 일종의 바이블이었습니다. 매일 커피 한 잔과 딕 벵손의 카탈로그로 하루를 시작했죠. 때론 제가 덧칠한 (그의) 그림을 다시 복사하기도 했고 거기서 요소요소들을 훔쳐 제 작품에 갖다 놓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다 닳고 얼룩져 버렸습니다.

때론 그의 작품을 보며 그게 잠시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벵손의 이미지를 내면화하는 방법이죠.   

마마 안데숀


딕 벵손 Dick Bengtsson(1936–1989)

1936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1983년, 그가 죽기 6년 전, 스톡홀름 현대 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전시회를 계기로 비로소 그의 작품이 대중에게 알려진다. 그는 예술이 기술이나 특별한 자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아웃사이더가 되고자 했기 때문에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하고 스튜디오가 아닌 집에서 작업을 했다. 사회에 긴밀히 참여하는 것이 예술가의 자율성과 비판적 능력을 해한다고 생각했으며 직업으로서의 예술 작업을 비난했다.

벵손의 모든 그림은 상상이 아닌 기존에 있는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다. 그는 백과사전, 잡지, 미술서에서 흥미로운 이미지를 찾고 그 위에 놓은 반투명 종이에 연필로 그림을 그렸다. 종종 밀리미터를 센티미터로 변환하여 그림을 최종 크기로 확대하기도 했다. 벵손은 전통적이며 아름답고 세련된 모든 것을 피하기 위해 그림의 표면을 손상시키곤 했는데 그림이 다 마르기 전 표면에 뜨거운 다리미를 대는 것도 그중 한 방법이었다.     

그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스와스티카 swastika(만자卍字, 옛 독일 나치당의 십자 표시)를 그림에 자주 그려 넣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고대에는 긍정적 상징이었던 스와스티카를 통해 시간에 따른 사회적 가치의 변화 내지는 전복을 표현해냈다는 평을 받는다. 스와스티카는 관객의 판단을 지연시키고 이미지 본질에 집중하게 만든다는 기능적 측면에서, 마마 안데숀의 '비협조적 제목'을 떠오르게 한다.

피에트 몬드리안 Piet Mondrian, 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 카지미르 말레비치 Kazimir Malevich 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좌 : Dick Bengtsson, <방 꽃, Rummetblomman>  

우 : Dick Bengtsson, <히틀러와 꿈의 부엌, Hitler och drömköket>, 1973







예술 작업이 직선적 발전(선형 발전)을 수반하지 않는다고 항상 느껴왔습니다.
예술가가 된다는 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돌아다니는 것이죠.
모노폴리 게임에서 항상 시작 지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요.

카린 마마 안데숀












참고 사이트

https://www.stephenfriedman.com/exhibitions/97-mamma-andersson-cry/

https://arterritory.com/en/visual_arts/interviews/5771-mothers_day

https://sverigesradio.se/sida/artikel.aspx?programid=95&artikel=611593

https://www.youtube.com/watch?v=xMc42ZakNtg

https://www.youtube.com/watch?v=wNRvzB9a7Uohttp://www.diva-portal.org/smash/get/diva2:174816/FULLTEXT01.pdf

https://declanlongtexts.wordpress.com/2013/05/02/from-the-archives-an-essay-on-mamma-andersson/

http://www.artnet.com/artists/karin-mamma-andersson/2

https://www.modernamuseet.se/stockholm/en/exhibitions/the-moderna-exhibition-2006/participating-artists/karin-mamma-andersson/

https://www.davidzwirner.com/exhibitions/~/link.aspx?_id=6C2698EB6F6C45A9B263D5B8E8C6151E&_z=z

https://cargocollective.com/artefactual/Mamma-Andersson

https://wsimag.com/art/42345-dick-bengtsson#:~:text=The%20work%20of%20Swedish%20artist,at%20Moderna%20Museet%20in%20Stockholm.

https://gallerix.org/storeroom/730417995/N/1034505259/

https://bombmagazine.org/articles/mamma-andersson/

https://medium.com/@dorisleslieblau/spotlight-on-swedish-storytellers-karin-mamma-andersson-ba609c7c2456

https://www.salon-verlag.de/en/book/mamma-andersson-presents-dick-bengtsson/


인용한 구절과 앤더슨 그림의 제목들

식탁은 공중에 차려지고/ 별이 지는 방향/ 발이 닿지 않는 방향/ 내가 없는 방향으로/ 나는 그 외의 식탁들처럼 걸어갔다(이승희, 「식탁의 목적 혹은 그 외의 식탁들」)

절벽이라는 말속엔 얼마나 많은 손톱자국이 있는지/ 물에 잠긴 계단은 얼마나 더 어두워져야 한다는 뜻인지/ 내가 궁금한 것은 가시권 밖의 안부 (안희연, 「백색 공간」)

Pond / Only the nights are new (diptych) / Room Under the Influence / Vi gör så tråkiga saker tillsammans(We do such boring things together) / Lull / Fonofobi(Phonophobia)


제목의 배경이 된 그림

Karin Mamma Andersson, <장황한 이야기 Ramble on>, 2011




*아트렉처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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