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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방전 May 25. 2020

단 한 번의 얼굴 / 가우리 길

<Acts of Appearance> 프로젝트에 대해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중이다 영원히, 영원

이라는 것이 있다는 바로 그곳이다 가라앉고 있다 나도

당신도 아니고 우리의 중간쯤에서 어딘가로

              

                            유희경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진공 얼굴 

  

정체모를 사람이 기쁜 건지 놀란 건지 아리송한 표정의 가면을 쓰고 바퀴 프레임 위에 앉아 있다. 빛깔로 봐선 반은 건물 벽에서 반은 황토 바닥에서 빠져나온 듯하다. 그다음엔 뭘 봐야 할까?


가면은 인식에 도랑을 파고 판단에 제동을 건다. 무언가를 알아내려고만 한다면, 가우리  Gauri Gill <Acts of appearance> 연작은 보기보다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가면 뒤의 실체를 알아보겠다는 고집만으로는 아무리 들여다보고 노려봐도 답을 얻기 힘들다.  사진에서(아래) 피사체는 인칭도 이름도 없이 가면이 전하는 감정으로만 존재한다. 질문이 생긴다. 나는 , 벌써,  사람이 누구인지를 묻는 걸까? 무엇을 위해? 진리가 마치 어딘가 다른 곳에 있다는 듯이 말이다.

.


늘 비교적 쉽게 도달했던 독단적 이해에 우리는 가닿을 수 없다. 가면이 해석의 윤회를 멈췄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동안 가면이 전하는 감정과 그 반대 어디쯤을 의식하는 관념 사이를 배회한다. 그 사이 우리의 지식과 편견을 기반으로 우리가 찾고 있던 그 '변하지 않는 얼굴'은 진공(眞空, vacuum) 상태가 되고 오직 순전한 상상만이 이 감상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한다. 가우리 길은 가면을 이용해 해석이 개입하기 힘든 진공의 얼굴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진공 상태에서 우리는 여러 요소들의 이질적 결합을 지각이나 분별의 대상이 아닌 놀이로 받아들인다. 놀이의 상대는 파악하고 정의 내려야 하는 타인이 아니라, 알 수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일종의 거대함이다. 개인보다 더 큰 개인, 개보다 더 큰 개, 쥐보다 더 큰 쥐, 코브라보다 더 큰 코브라 같은. 이를테면 병을 옮기는 쥐가 아니라 간호하는 쥐, 화가 난 코브라가 아니라 식품을 팔고 무게를 다는 코브라와 같은 새로운 구상과 배치의 거대함인데, 이는 결코 인간 본위의 기능을 의식한 비유는 아니다.


사진 속 진공 얼굴들은 모두 다 비슷비슷한 크기로 존재한다. 이들 사이엔 동류의 다수도 없다. 하나(One)가 전부다. 매 순간 하나가 종을 대표하고 감정을 대표하고 자연과 신을 대표한다. 비로소 우리는 단 한 번의 얼굴을 얘기할 수 있는 세계에 도달한다. 우리를 규정하는 온갖 것들의 중간쯤 어딘가에 있는 이 세계에서, 우리는 버려진 말들로 쉼 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보던 것들을 보지 않을 수 있게 되며, 잘 듣기 위해 진땀을 흘릴 것이다. 오직 이야기를 그치지 않음으로 해탈에 이르게 될 것이다.


"만약 저한테, 제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다양한 시각적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과연 저는 어떻게 만들까요? 우리는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존재들이잖아요. 시시각각 다른 모습일 정도로요. 우리는 타인의 얼굴을 만나기 위해 우리의 얼굴을 준비하죠.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주관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읽을 테고 이건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상상하는 방식과는 다를 거예요. 질문이 또 생기죠. 내 얼굴은 누구한테 속한 거지? 나인가, 나를 바라보는 세상인가? "  

가우리 길     





*모든 사진 : 무제(Untitled), <Acts of Appearance> 에서   


타인의 것이든 내 것이든 어떤 세상에 대해서든, 한 가지 진실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사진들은 그저 완벽한 픽션의 기록입니다.

가우리 길  



가우리 길 Gauri GIll


1970년 인도 찬디가르 Chandigarh에서 태어났으며 뉴델리와 뉴욕, 캘리포니아에서 사진과 예술을 공부했다. 주로 인도의 소외된 시골 마을에 관심을 갖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주제로 작업을 하고 있다.


현지에서 작업하는 아티스트들(우리가 흔히 공예가, 장인, 기능공이라 부르는 사람들이다. 길은 이들을 아티스트라 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과 협업을 자주 하는데,  <Acts of Appearance> 프로젝트 역시 마을에서 가면을 만드는 장인들과의 협업을 통해 이루어졌다. 원래 전통 의식을 위해 만들던 신이나 악마의 가면 대신, 가우리 길은 다양한 감정이나 질병, 노화, 동물, 귀중품 등 우리 주변에 현존하는 것들을 형상화한 가면을 만들어달라 주문했다고 한다. 가면을 만든 공예가들이 사진 속에서 직접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기도 했다.


바오라 행렬 Bahora procession과 바오라 가면 Bahora mask                                                                                                                
인도의 많은 원주민 마을에서 1 년에 한 번씩 열리는 의식으로, 공동체 전체가 신화를 이야기하기 위해 며칠 밤에 걸쳐 공연을 연다. 공연자들은 거주민 가운데서 선택되는데, 이들은 예술가가 만든 정교한 마스크를 착용하고 다양한 신과 악마, 보조 인물들을 연기한다. 여러 세대에 걸쳐 의식을 행해오며 신화의 원형들이 더욱더 강력하고 정교하게 다듬어졌기 때문에 가면은 엄격한 창작 규칙을 준수해 만들어지고 다 만들어지기까지 보통 수 주가 걸린다. 도덕적이면서도 상상력이 풍부한 우주를 구성할 수 있는 캐릭터들을 만들고 있다.

*가우리 길의 작업은 인도 조하 Jawhar 마을에서 코크나 Kokna 부족과 함께 했다.


<Acts of Appearance> 이전에 시작한 <Fields of Sight>(2013~) 프로젝트 또한 원주민 예술로 잘 알려진 라제쉬 방가드 Rajesh Vangad 와의 협업 프로젝트다. 그녀는 현대의 사진 언어에 고대의 월리 Warli 그림(인도 마하라슈트라 Maharashtra 지역에서 시작된 민족 예술)을 결합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다.   


가우리 길과 라제쉬 방가드, Mountains and Trees, from “Fields of Sight”, 2014, ink on archival pigment print



Acts of Appearance 프로젝트에 참여한 현지인들

Bhagvan Dharma Kadu, Subhas Dharma Kadu, Yuvraj Bhagvan Kadu, Rahul Arvind Kakad, Rahul Bhagvan Kadu, Makhaval Bhagvan Kadu, Madhuri Subhas Kadu, Rangeeta Arvind Kakad, Darshana Devram Kakad, Ganesh Ganpat Lokhande, Sangeeta Ganesh Lokhande, Sangeeta Navnath Kadu, Kusum Bhagvan Kadu, Harishchandra Rama Kadu, Suvrna Harishchandra Vad, and Anjana Sachin Kurbude, Sachin Sankar Kurbude, Sanjay Sakharam Vatas, Ganpat Ganga Lokhande, Rupesh Arvind Kakad, Nalini Pradip Valvi, Jyoti Sanjay Vatas, Shravan Budhya Tumbda, Saraswati Subhas Kadu, Sapna Bhagvan Kadu, Bhawna Bhagvan Kadu, Pooja Arvind Kakad, Tushar Prakash Vatas, Tushar Dinkar Vatas, Vijaya Navnath Kadu, Suraj Tukaram Vad, Nishant Tulshiram Thalkar, and Nilam Sunil Marad.



"기능공들도 똑같은 현대 예술가들입니다. ('기능공'은) 잘못된 카테고리예요.
공간과 시간이 주어지면, 현역 예술가들(기능공)은 공예품을 자기만의 것으로 만듭니다. 전통을 흡수해왔고 또 알고 있지만 그들은 그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 새로운 방향으로 연습하고 그것을 반영하죠. 이 목소리는 개인의 것인 만큼이나 공동체나 집단의 것도 될 수 있고요. "

가우리 길


가우리 길은 사진가 아우구스트 샌더(August Sander, 1876~1964), 알프레드 슈타이글리츠(Alfred Stieglitz, 1864~1946),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1924~2019)의 작업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으며, 슈타이글리츠가 만든 사진 잡지 카메라 워크(Camera Work, 1903~1917)의 정신을 이어받아 만든 카메라워크 델리(Camerawork Delhi, 2006~2011) 저널의 창립자이자 편집 주간이었다.


                             왼쪽부터 -  아우구스트 샌더, 알프레드 슈타이글리츠,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

                      왼쪽부터 - <카메라 워크> 잡지 표지, <카메라워크 델리> 창간호와 마지막 호 표지















*참고 사이트

http://www.gaurigill.com/

https://dergreif-online.de/special/review-gauri-gill-acts-appearance/

https://www.cobosocial.com/dossiers/gauri-gill-and-the-acts-of-appearance/

https://scroll.in/magazine/866415/with-masks-and-some-alchemy-photographer-gauri-gill-tells-real-and-fantastic-stories-in-maharashtra

https://theartling.com/en/artzine/unmasked-gauri-gills-acts-of-appearance-at-moma-ps1/

https://artphotozine.wordpress.com/2018/06/22/gauri-gill-acts-of-appearance-photopaper-23-24-2017/

https://www.theguardian.com/artanddesign/2019/jan/31/gauri-gill-best-photograph-bahoda-mask-festival-india-rat

http://naturemorte.com/exhibitions/actsofappearance/

https://www.artsy.net/artwork/gauri-gill-untitled-from-the-series-acts-of-appearance

https://quod.lib.umich.edu/t/tap/7977573.0005.205/--gauri-gill-and-rajesh-vangad-fields-of-sight?rgn=main;view=full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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