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대여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랖겪처 Jun 30. 2022

거품으로 된 우주

카조니어, 2020

2022년 3월 12일 넷플릭스로 시청


이게 큰 지진의 전조라고 한다면…
소리가 계속해서 더 커질 거예요. 만일 운이 좋다면 금세 박살이 나겠죠.
그럼 그냥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을 수 있어요.
즉사하는 거죠.
영원한 무로 돌아가요.


미란다 줄라이 감독의 <카조니어>를 봤다. 3년 만에 표를 끊고 극장에서 본 영화가 하필 조 라이트의 <시라노>였기 때문에, 억울함을 떨치기 위해 어떻게든 수작 이상의 영화를 보고야 말겠다는 결심 하에 고르게 된 영화다. <카조니어>가 수작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시놉시스를 보고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이상한 영화임은 확실할 것이라고.



    <카조니어>는 좀스러운 사기 행각을 일삼으며 하루하루를 근근이 연명해나가는 다인Dyne 가의 세 식구, 그중 외동딸인 ‘올드 돌리오’를 조명하는 영화이다. 이 답 없는 가족들은 BUBBLES inc.라는 사업장에 딸린 사무실에 저렴한 월세를 내며 지내고 있는데, 이마저도 제때 내지 못한다. 설상가상으로 사업장에서 발생한 거품이 주기적으로 사무실의 가벽을 타고 흘러내리기까지 해서, 세 식구는 좀도둑질을 하다 말고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와 거품을 걷어내며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운 좋게 뉴욕행 티켓을 얻은 가족은 올드 돌리오의 여행자 보험을 이용해 수하물 분실을 빙자한 사기를 쳐서 밀린 월세를 치르고자 한다.


모든 사건은 가족이 뉴욕행 비행기에서 ‘멜라니’를 만나며 시작된다. 얼떨결에 가족의 정체를 알게 된 멜라니는 이 사기극에 동참하게 되고, 그가 일하는 ‘별 볼일 없는 안과’의 외로운 노인 환자들의 집에 방문하여 값나가는 골동품들을 훔쳐올 계획을 세운다.



    가족에게 멜라니라는 낯섦이 끼어들면서 발생하게 된 더없이 ‘가족’ 같은 상황들은 올드 돌리오는 물론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혼란을 야기한다. 작품 초반부터 꾸준히 언급된, 가족들 말고는 주변의 그 누구도 동요하지 않던 ‘지진의 전조’가 암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혼란이다. ‘브레스트 크롤Breast crawl’로부터 촉발된 의문은 올드 돌리오의 안에 균열을 내고, 멜라니를 통해 가속화되어 가족의 앞에 드러나게 된다. 접시가 부딪히는 소리, 귀가한 자녀들을 위해 꺼내온 케이크, 내일은 잔디를 좀 깎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 식사 전 울려 퍼지는 피아노 소리… 어쩌면 그들이 과거에 간직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모양으로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무늬만으로라도 가족다운 모습을 연출해내자마자, 올드 돌리오는 그의 모부로부터 처음으로 벗어날 마음을 먹게 된다. 습관처럼 ‘ 돌아와 한없이 무너져 내리는 분홍빛의 거품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는 그대로 뒤를 돌아 뛰쳐나간다. 지진과 거품, 그리고 주유소 화장실의 정전으로 이어지는 시퀀스는 올드 돌리오 내부의 혼란이 임계점에 달해 빅뱅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장치인 동시에, 자아의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올드 돌리오가 암전된 화장실을 나선  일몰을 등진 멜라니를 향해 기어감으로써 그의 26 인생  ‘브레스트 크롤 완수되고, 미처 이루지 못했던 성장과제들을 압축적으로 전개해나간다. 리본으로 묶인 생일선물의 포장을 끄른다거나, 아침식사로 팬케이크를 부쳐먹거나 하는 일들을 말이다.  과정에서 다인가의 모부는 과거를 참회하는 태도를 보이며 올드 돌리오의 성장을 돕기 위해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하지만, 이마저도 결국 배신이라는 결말을 낳고 만다. 하지만 올드 돌리오에겐  이상 ‘가족 중요하지 않다.  모든 과정의 끝에 멜라니라는 사랑을 마주하게 되고, 이로써 길고도 짧았던 성장기의 끝에 다다르게 되니까.



    카조니어는 시작부터 끝까지 이상한 영화가 맞다. 이상하고 어색하고 곤란하며, 영상에 끼얹어진 사운드 트랙은 이상할 정도로 아름다워서 잘못된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군더더기 없는 마지막 장면이 잔잔한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 파문을 천천히 곱씹다 보면, 결국 이 영화를 사랑하게 되고 말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미 대선은 시작되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