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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랖겪처 Dec 30. 2021

이미 대선은 시작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2021

11월의 마지막 주, 한창 <구경이>에 몰입하고 있던 차에 결방이라는 절망적인 소식에 삶의 낙을 잃고 방황하던 찰나, 세종시의 문체부에도 골 때리는 여자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보았다. 문체부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것은 화상 미팅이 끝나고 캠이 채 꺼지지 않은 상황에서 ‘북유럽식 반려견 훈육법’을 몸소 선보이는 문체부 장관의 정신이 아득해지는 퍼포먼스였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역시 만만찮은 드라마임을 직감하고 말았다.


    전 문체부 장관의 파격적인 경질로 인해 장관직은 졸지에 공석이 된다. 정권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계륵 같은 자리가 되어버린 장관직을 얼결에 맡게 된 주인공은 바로 80년대의 김연아, 사격 금메달리스트인 이정은(김성령扮)이다. 이는 정무수석의 작품으로, 야당에서 초선의원으로 금배지를 달았지만 거수기 노릇만 하다 물러나게 된 정은을 데려와 정권의 남은 기간 동안 공약이었던 ‘문화예술체육계 범죄 전담 수사처’, 줄여서 ‘체수처’ 설립을 쇼 비지니스로나마 이루게 하려는 계산에서 나온 결과였다.



    정은이 장관직에 앉고 반년이 흐른 뒤, ‘체수처 설립 준비단 설치를 위한 자문위원회 출범식’을 하루 앞두고 예기치 못한 사고가 터진다. 누가 봐도 때우기 인사가 뻔한 자리에서도 여자들은 왜 이렇게 열심인 건지. 정은은 이를 수습하기 위해 자신을 정계로 이끈 야당의 4선 중진, 차정원(배해선扮)의 도움을 받고자 한다. 문체부 장관실의 SOS를 쿨하게 받아들이는가 싶던 정원은 출범식 당일 입을 싹 씻고 정은의 뒤통수를 친다. 그야말로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는, 그러나 아무도 관심이 없는 행사의 현장에서 실무진들은 어떻게든 눈앞에 들이닥친 과제를 해결해나간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미친 상황 연속 발생 시뮬레이션이라 할 수밖에 없는 사건사고들이 연이어 터진다. 예비비가 반려되고, 문체부 내의 기밀사항들이 이유를 모르게 유출되는가 하면, 장관의 남편은 납치당하기까지 한다. 정은과 장관실 실무진들은 당장 뒤에서 달려오는 기차가 지나갈 레일을 실시간으로 깔아나가듯 상황에 대응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정은은 국민들의 호응을 얻고, 대선주자로 거론되기까지 한다. 이를 지켜보던 정원은 정은과 ‘썸 좀 타면서’ 차차기 대선을 노리는 큰 그림을 그리게 된다.


 

    <이상청>의 재미는 늘공(늘상 공무원)들의 관록이 잔뜩 붙은 반짝이는 기지와 어공(어쩌다 공무원)을 노리는 늘공들의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야심,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해나가는 정은의 태도, 이를 능구렁이 같이 타고 넘어오는 정원의 음흉함, 그리고 에스프레소보다도 진하고 되직한 블랙유머가 어우러져서 나온다. “유시민 되고픈 잔잔바리”라든가 “근혜 언니 당선되기 1년 전에 여기 이 자리에 누가 있었는지 알아? 손학규 아저씨 몰라? 사람 좋은데.” 같은 대사를 듣고 있자면 <이상청>의 세계야말로 대선을 코앞에 둔 2021 지금 여기의 대한민국에 대응하는 거울 쌍의 메타버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정은의 남편이자 실속 없고 공허한 말들을 습관처럼 두르고 다니는 진보 논객 김성남, 야당의 비대위원으로 활동하며 백신 반대 애국보수 집회를 수시로 열어대는 팽길탄 목사 등 인물들의 조형과 ‘창조경제’ 자수가 박힌 사은품 수건, 납치 촌극의 주무대가 된 ‘가든 CHA’ 등의 요소에 녹아든 리얼리티 또한 이에 크게 한몫한다. 그리고 드라마에서는 실제로 메타버스가 다뤄진다. 대북특사로 임명된 정은이 해당 사안에 대한 논의를 위해 VR을 이용하여 유니콘 기업 N코어의 의장인 윤주를 만나는 장면이 꽤 비중 있게 나온다. 지켜보는 시청자의 입장에선 역시 ‘또라이’ 드라마라는 생각을 들게 하지만.


정은과 윤주의 메타버스(...) 좌담회


    <이상청>은 이런 깨알 같은 재미들과 더불어, 정은과 정원의 ‘썸씽’으로 인해 완성되는 드라마다. 현 문체부 장관의 수행비서이자, 정원의 전 보좌관이었던 수진은 정원에게 묻는다. 정원만큼의 노력을 들이지도 않고 금메달리스트의 셀럽이란 지위 하나로 모든 걸 쉽게 얻어갔기 때문에 정은을 견제하는 것이냐고. 이에 정원은 코웃음 치며 대답한다.

없거든 그런 여자는.
쉽게 뭘 얻은 여자는 없다고, 이 나라엔.
이정은이라고 쉬웠을까? 그 이미지들.
그거 거저 얻었겠어? 존나 온갖 것들 견뎠겠지.


    대선을 앞두고 섬광 같이 등장한 드라마,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이걸 보기 위해 처음으로 웨이브에 가입했다. 웨이브가 앞으로도 <이상청> 같은 오리지널을 내놓길 바란다. 아직 이상청을 보지 않았다면, 이 드라마를 보기 위해서라도 웨이브를 구독하라고 꼭 권하고 싶다. 정신없이 문체부의 얼렁뚱땅 이모저모를 쫓아가다 보면, 어느새 멍하니 청와대의 푸른 지붕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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