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대여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랖겪처 Dec 30. 2021

이 드라마, 의심스러운데

구경이, 2021

바람만 불어도 낙엽이 비처럼 떨어지던 가을의 끝자락, <구경이>는 그 사이에 어딘가 이상한 모양으로 섞여 시청자들 앞에 내려앉았다. <구경이>의 제1막, 우리는 바퀴벌레의 시점으로 쓰레기 더미를 누비다가 그 한가운데에 들어앉아 마우스를 연타하며 “죽어. 죽어. 다 죽여.”를 외치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모니터 너머로 여자에게 말을 건네는 게임 파티원의 호칭으로 보아, 그는 ‘애플’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는 모양이다(나중에 밝혀지지만, 정확히는 ‘애플보이캣’이다). ‘멜론머스크’란 별명을 가진 파티원은 위기에 맞닥뜨리자 다급하게 소리친다.

    “이 게임 지면 나 죽을 거야. 살 이유 없어!

    파티는 결국 승리를 쟁취해내고, 산발을 한 ‘애플보이캣’은 몇 모금 남은 맥주를 털어내며 쾌재를 지른다. 곧이어 한 사람이 트렌치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일사불란하게 누군가를 쫓는 강렬한 오프닝 애니메이션이 시청자를 끌어들임과 동시에 타이틀이 나타난다. 세상에 없던 탐정, 구경이.


 

    <구경이>는 게임 안에서 연신 “죽어”를 외쳐대는 ‘애플보이캣’이 5년의 은둔 생활을 박차고 나와 ‘구경이’의 이름을 달고 “그래도 죽여선 안 돼”를, 나아가서는 “살아야 해”를 말하는 드라마다. 경이는 폐인의 삶에서 강제로 차출되어 나와 의뭉스러운 연쇄살인범 ‘K’의 정체 밝히기라는 또 다른 게임을 마주하게 된다. 희대의 ‘또라이’ 하나를 잡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경이의 옆에서 NT생명 조사2팀장, 전직 경찰이자 그의 후배인 제희가 경이의 포도당이나 다름없는 알코올을 적당히 수혈시키며 그를 휘어잡으려 들고, 국내 최고의 어린이 재단 이사장으로 군림하고 있는 용국장은 자신의 진짜 목적을 위해 제희를 살살 구슬려가며 K가 자신의 손바닥 안에 떨어지기만을 기다린다. 경이, K(이경), 제희, 용숙. 세대도, 목적도, 욕망도 제각각인 네 여자들의 파워게임이 벌어질 판이 짠 하고 펼쳐진 것이다. 이렇듯 제각각인 그들이지만, 이들을 묶을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가 있다. 바로 ‘이상한’ 여자들이라는 것이다.


    알코올 중독, 게임 중독, 의심 중독. 온갖 중독에 허우적대며 ‘빠그라진’ 몰골을 하고 있지만 본능과도 같이 날카로운 감각만은 바짝 곤두세우고 주변을 파고드는 집요한 여자. 당연히 이상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남편을 죽인 여자라는 소문은 안개처럼 늘 경이를 휘어 감고 있다. 제희는 싱글맘이자 워킹맘으로 하나뿐인 딸 나나를 부끄럼 없이 키우고자 분투하는 여자다. 제희가 집을 비운 동안에는 독신으로 지내고 있는 그의 부친이 나나를 돌본다. 장성하여 각각 정계와 연예계에 진출한 두 아들을 둔 용숙 또한 남편이 없는데, 마음만 먹으면 대중탕을 전세 내듯이 청와대에 입성해 대통령 자리도 가뿐하게 꿰찰 것 같은 그의 세상에 남편은 존재할 수 없는 개념처럼 보인다. 대학에서 연극동아리 부원으로 활동하는 이경은 세상 천진한 표정으로 말도 안 되는 연기를 선보이며 주변을 당황시키지만, 자신의 진짜 무대인 살인 현장에서는 싸늘한 낯을 하고 타깃의 숨을 거두어가는 냉철한 연출자이자 전능자다.


    드라마는 네 명의 여자들이 마음껏 휘젓고 다니도록 멍석을 깔아주되, 이들의 결여에 대해선 조명하지 않고,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공백으로 둔다. 대신 카메라를 돌려 이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비춘다. 카메라 바깥과 너무나도 닮아있는 작품의 무대를 보고 있자면, 진정으로 이상한 것은 여자들이 놓인 세상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구경이>는 현실의 N번방 사건, 웹하드를 통한 불법 촬영물 유포, 스파이캠을 이용한 불법 촬영 범죄는 물론 사내 따돌림, 동물학대, 영유아 살해 등을 그대로 작품에 끌여들인 뒤 이를 재조명하고 시청자로 하여금 우리들이 사는 세상의 ‘이상함’을 환기시킨다.



    이처럼 이상한 세상이기에, 쓰레기 같은 인간 몇 죽어나가는 건 별 대수롭지 않아 보인다. K의 행보는 어떤 쾌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시청자가 K의 편에 말려들기 시작할 때, 구경이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어 그건 안 된다고 말한다. “사람 죽이는 데 필요한 게 용기라고 생각하니?”라고 묻는 경이에게 있어 이경의 행보는 그의 과거를 답습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때문에 둘은 평행하게 놓이지 못하고 대척점에 서게 된다. 그리고 이 대척점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서로에 대한 완전한 이해다. <구경이>의 7화에서 이러한 부분이 잘 드러난다. 빛이 스러진 채 똑 닮은 두 사람의 눈빛은 이경의 이모이자 하나뿐인 가족인 정연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한번 맞닿게 되는데, 남편의 죽음 이후 죄책감을 끌어안고 아무런 부표도 잡지 못한 채 표류하듯 살아왔던 경이에게 있어 이경의 실책은 과거의 재현일 수밖에 없다. 경이만이 온전하게 이경을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인 것이다. 그렇기에 경이는 이경이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길 바랐을 것이다. 자신을 도와준 이경이 더 나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며 경이를 찾아온 미애처럼 말이다.


    2021년 12월 12일에 12화로 막을 내린 <구경이>. 종방일마저도 ‘구경이 유니버스’다웠던 이 드라마를 단언컨대 올해 최고의 드라마로 꼽고 싶다. 애니메이션과 CG, 연극적 요소를 신선하게 버무려낸 연출, 작품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는 SNS의 활용, 뇌리에 꽂혀 종일을 흥얼거리게 만드는 감각적인 OST, 세대 간 여배우 대격돌이라 할 수 있는 주연 배우들의 스크린 장악력… 입봉작이라곤 믿기지 않는 ‘의심스러운’ 결과물로 ‘탈한드’급 드라마를 만들어낸 성초이 작가의 차기작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완벽한 나날에 작별의 키스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