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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구름 Jul 07. 2022

자존감 대물림.

자존감에 관하여

모두가 잠든 밤 나는 SNS를 하릴없이 두리번거리다가 어떤 영상을 보고 멈춰 섰다. 자주 보는 프로그램은 아니었는데 내가 평소에 좋은 이미지로 생각하던 방송인 알베르토 가 나오는 영상이라 눈에 띄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일상을 관찰하는 예능이었는데 알베르토와 그의 두 아이들이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큰 아이도 스스로, 18개월인 작은 아이도 아빠의 도움 한 번 없이 스스로 식사를 했고 스스로 빵에 잼을 발라 먹기도 했다. 그걸 지켜보는 알베르토는 여유 있게 커피 한잔.

나는 그 전에도 알베르토라는 사람을 봤을 때 자존감이 매우 높은 사람이란 걸 직감했다. 그래서 그가 아이를 낳았다고 했을 때 아이 양육을 잘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어제 그 영상은 나에겐 정말 충격 그 자체였다. 매일 밥 먹이는 게 전쟁이고, 8살인 첫째 아이는 그래도 그나마 느려도 혼자 잘 챙겨 먹는데 4살인 둘째는 언니가 먹는 간식을 함께 먹다 보니 일찍부터 단짠의 미각에 매료되어 밥을 잘 먹지 않는다. 물론 내가 글 쓴다는 핑계와 살림에 젬병이라는 최악의 조합으로 잘 챙겨주지 못하는 탓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는 일은 나에게 늘 전쟁이고, 신경전이고, 숙제 같은 느낌인데 그의 집에서 식사는 자유고 좋은 기억으로 아이들에게 남아 있을 거라 생각하고 비교하니 속이 답답해졌다.

오늘 저녁을 차려놓고 아이들에게 먹으라고 일러두었다. 둘째 아이의 알림장에는 오늘 카레를 두 그릇이나 먹었다는 선생님의 말이 적혀있는데 엄마가 밥을 차렸다는 말에 먹기 싫어를 연발하고 우유를 한 팩 먹고 또 한 팩을 먹겠다고 고집부리는 둘째를 보며 깊은 한숨이 나왔다.

나는 알베르토라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그 사람이 너무나 부러웠다. 자존감 높은 부모에게서 양육되어 자존감 높게 자란 그가. 그의 아이들 또한 그가 그런 것처럼 자존감이 높은 사람으로 자라겠지. 나는 체념하고 만다. 나도 그런 자존감 높은 부모를 만났더라면 육아가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까?

요즘 자주 생각하는 말이다. 내가 육아가 힘든 이유를 몇 년에 걸쳐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았는데 역시 자존감 문제로 연결되었다. 나의 양육태도가 아이들을 떼쓰게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지만 우유팩을 뺏어버리기 전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가 학습한 대로, 내가 자라온 대로 아이들에게 긴 설명보단 제재와 안돼를 먼저 하고 마는 것이다. 기다릴 마음의 여유가 없고 불안감이 높아서이겠지. 하고 나는 나 스스로를 진단했다. 그래서 요즘 드는 생각은 아이를 가지고자 하는 부부들은 미리 자존감 테스트를 해보고 출산을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바로 내가 자존감 낮은 채로 양육을 하다 보니 아스팔트 길이 될 수도 있는 길을 가시밭길로 만들어 버린 케이스니까.


하지만 그 세월 동안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정말 죽을 듯이 노력했다. 예전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확신감이 많이 늘어난 상태이다. 처음 아이를 낳았을 때는 매일이 처음 해야 하는 일 투성이에 뭘 원하는지 울음으로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아기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버거워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두 돌쯤 안 된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린 뒤 몰려오는 자괴감과 후회. ‘아이는 나를 괴물로 기억할 것이다.’라는 생각이 지배할 때의 그 공포감. 나는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자주 무너졌고, 자주 아파했다. 물론 그러면서 나는 이제껏 어영부영 살아왔던 내 과거를 반성하게 되었고, 아이에게 괴물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필사적인 신념으로 독서모임을 조직했고, 책을 접하고 글을 쓰게 되었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공부가 필요했고, 아이를 위해서만 맞춰진 삶을 단 몇 시간만이라도 오롯이 나 자신을 위한 궤적을 남기고 싶다는 바람이 지속적으로 독서모임에 참여하게 했고, 그게 나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그러다 독서모임에서 친해진 언니 따라 우연히 참가한 수필 대회에서 가작이라는 상을 받고 깨달았다.

‘아,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었지?’ 좋아하는 것도 잘하는 것도 모르고, 남한테 어떻게 보일지만 신경 썼지 나 스스로를 돌아본 적이 없던 가 어릴 적 좋아했던 글쓰기를 기억해냈고, 이 쓰기 활동은 내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한쪽은 이루고 싶은 꿈에 대한 열정을, 한쪽은 내 자신에 대한 확신이라는 날개를 심어주었다. 그래서 글을 쓴 이후 다른 사람에게 주눅 들거나 부러움과 초라함이 동시에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자리를 잡으려 할 때 외우는 주문 같은 것이 있다.

“괜찮아. 나는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를 하잖아.” 이 말이다. 그 말을 스스로 되뇌면 부러움도 시기심도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저 사람은 분명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분야가 있겠지. 내가 그런 것처럼. 이렇게 생각하면 놀랍도록 진정되는 것이다. 글쓰기를 ‘잘’해서가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그게 나의 자아존중감을 높여준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안다는 그 자체가 말이다.


하지만 이런 나만의 주문도 먹히지 않는 오늘 같은 날이 있다. 나는 자존감을 많이 회복했고 스스로가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가끔 이렇게 힘이 빠지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은 끔찍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나는 성장과정에서 이미 내 인생이 결정된 것이 아닐까?’

‘결국 자존감 높게 자란 사람들처럼은 절대 살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내 아이들은 무슨 죄로 부모와 매일 신경전을 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끝도 없는 회의감과 죄책감에 좌절하고 만다. 극복할 수 없는 자기혐오에 빠진다.

내 아이가 부모를 선택할 수 없었듯이 나 역시 부모를 선택할 수 없었다. 이 자존감 결여는 대물림 되어 일생을 괴롭혀야 하는 것인가 개탄스럽다.

나는 오늘도 깊은 한숨을 푹푹 쉬며 침체된 기분으로 밤을 보내고 있다. 아이들이 잠든 밤은 고요하기에 침체된 걸 굳이 극복하려고 애쓰지 않다는 게 나를 조금 살게 한다. 잠든 아이들을 보며 생각한다. 이 아이들이 부모를 선택할 수 없었듯이 나 역시 어떤 아이들을 낳을지 알 수 없었을 거다. 불교적인 사상으로 말하자면 우린 억겁의 세월을 거쳐 만난 인연일지도 모른다.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이라도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니까 한 개인 대 개인으로 우리는 인연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은 맘이 편해진다. 한낱 스쳐 지나는 인연에도 의미를 붙이는데 부모 자식 간의 연은 얼마나 의미가 깊을까. 부모의 짐을 내려놓고 아이를 한 개인으로 바라보자. 그러면 나 역시 그들이 주는 영향에 모든 걸 다 잠식당하지는 않고 나 대로의 결론을 내리듯이 그들에게도 엄마의 영향이 100%가 아니라 커가면서 점점 더 자기 내면의 결론을 내리게 되겠지. 그러면 나의 죄책감이 조금은 사라지는 것 같다.

나는 이제 잠을 청해볼 생각이다. 깊은 잠을 자고 나면 조금은 지금의 무거운 마음이 희석되겠지.

그러길 바란다. 왜냐하면 내일은 또 새로운 날의 연속이니까. 될 대로 돼라 하며 포기해서 아이들을 방치하지는 않을 테니까

내일이면 나는 다시 노력하는 엄마로 돌아올 것이다. 나는 엄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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