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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희수 Jun 13. 2023

블록체인에 대한 평소 생각들 feat. SEC

SEC의 코인베이스와 바이낸스 규제를 보고 정리한 평소 생각들

최근에 SEC가 증권법 위반 혐의로 바이낸스와 코인베이스를 제소한 것을 보면서 평소 블록체인에 대해 하던 생각들을 정리해 봤다.  


1. 주변에 블록체인 업계에서 일하는 친구나 지인이 많기 때문에 좀 조심스럽긴 하지만, 나는 사실 블록체인 업계에 지금보다 훨씬 강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증권형 토큰(거의 웬만한 코인들이 다 해당) 발행에는 지금의 증권 발행에 적용되는 규제(증권신고서 제출하고 금융위에서 승인받는 것 등)가 모두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2. 2018년부터 블록체인 업계에 있으면서(중간에 탈블했다가 다시 돌아간 적도 있지만) 깨달았던 것 중 하나는 왜 자본시장에 규제가 있는지였다. 그동안 계속 스타트업 업계에 있으면서 규제로 인해 혁신이 발목 잡히는 사례를 많이 봤기 때문에 웬만하면 규제에 반대하는 입장을 갖고 있었지만, 일반 개인 투자자들이 개입되는 자본시장은 상황이 좀 달랐다. 자본시장에 규제가 없으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너무나도 많이 목격했다. 테라, FTX를 포함한 수많은 모럴해저드 사례. 지금 대부분의 코인은 사실상 크라우드 펀딩에 가깝다. 주식에 비해 법적으로 아무런 권리도 보장되지 않는 투자(기부?).


3. 블록체인 업계에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규제가 업계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기 때문에 반대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도 결국 플러스가 크냐 마이너스가 크냐를 저울질해야 하는 문제인데, 블록체인을 규제하지 않았을 때의 마이너스가 너무 크다. 그리고 사실 나는 블록체인의 플러스도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4. 블록체인의 플러스가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블록체인은 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이라기보다는 어떤 이념적인 운동에 가깝기 때문이다. 블록체인의 핵심적인 value proposition은 결국 탈중앙화를 통해 신뢰 문제를 해결했다는 건데, 솔직히 소비자들이 이런 거에 신경이나 쓸까 싶다. ChatGPT를 보면 대규모 마케팅을 하지 않았음에도 굉장히 급격한 속도로 사용자를 모았는데, 진짜 시장에서 먹힌다는건 이런 거다.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고 블록체인 프로덕트를 쓰게 만들려면 탈중앙성과 신뢰 문제에 대해 한참을 설명해야 하는데, value proposition을 간단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 프로덕트는 뭔가 문제가 있는 거다. 대부분의 소비자는 그냥 편하고 빠르거나 재미있고 자극적인 서비스를 좋아한다. 본능을 건드리지 못하면 시장에서 채택될 가능성은 0에 가깝다고 본다.


5. 누군가는 기술이 발전되면 해결될 문제라고 하기도 하는데, 지금 사람들이 블록체인을 안 쓰는 이유가 정말 기술 때문일까? 이더리움이 10배 빨라진다고 한들 이더리움에 진정한 킬러앱이 등장할까? 기술이 발전하면 mass adoption이 될 거라는 생각은 뭔가 본질에서 벗어난 것 같다. AI나 VR/AR 같은 영역하고는 다른 문제다. 블록체인은 증기기관이나 컴퓨터의 발명과 같이 기술 혁신으로 패러다임을 전환시킨 사례보다는 왕정, 공화정, 민주주의와 같이 이념이나 정치체계의 전환과 같은 선상에서 보는 게 더 적합한 것 같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이념이나 정치체계의 전환은 기술 혁신으로 인한 패러다임 전환보다 훨씬 느렸다.


6. 또 누군가는 사용자들이 백엔드가 블록체인임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UX를 편리하고 빠르게 만들면 해결될 거라고 주장하는데, 그럼 애초에 왜 블록체인을 쓰는 걸까? 블록체인에 대한 소비자의 perceived value가 없다면, 블록체인을 쓰는 프로덕트가 블록체인을 쓰지 않는 프로덕트 대신에 채택될 이유는 없다. 블록체인은 중앙 DB에 비해서 더 느리고 비효율적이고 제약사항도 훨씬 많은데, 똑같은 프로덕트 두 개가 하나는 블록체인을 쓰고 하나는 중앙 DB를 쓴다면 소비자 입장에서 블록체인을 쓰는 프로덕트를 채택할 이유가 있나? 결국 핵심은 소비자한테 블록체인의 가치를 인지시킬 수 있느냐인데, 그것에 어려움을 겪다 보니 이제는 인지하지 못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주장이 나오는 게 좀 넌센스인 거 같다.


7. 근데 위의 얘기는 B2C에서의 얘기고, B2B에서는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B2C 프로덕트는 본능의 레벨을 건드리지 못하면 대부분 채택되지 못하지만, B2B는 좀 다르니까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여러 party 간의 합의를 기반으로 한 시스템이 필요한 경우에는 블록체인이 효용을 제공하는 부분도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근데 금융 인프라와 같은 레벨로 그 유즈 케이스가 국한될 것 같다. 그런 곳에서만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사실 그동안 블록체인 업계 사람들이 주장했던 Web3 패러다임 시프트에 비하면 작은 임팩트다.


8. 또 누군가는 블록체인을 사용하면 기존에 불가능했던 금융상품이나 프로덕트(e.g. P2E 게임)가 구현 가능하기 때문에 의미 있다고 주장한다. 근데 과연 기존에 그것이 불가능했던 이유가 블록체인 기술이 없었기 때문일까? 사실 대부분은 법적인 규제 때문에 안됐던 거고, 블록체인을 사용하면 만들 수 있는 이유는 지금 블록체인이 규제의 사각지대에 있기 때문이다. 규제가 도입된다면 그런 것도 다 힘들어질 거고, 그렇다면 거기서 블록체인이 제공하는 가치는 거의 없어진다. 규제가 도입되더라도 블록체인을 사용하면 규제를 회피할 수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결국 블록체인의 수요를 음지의 수요로만 한정하는 꼴이다. 그것도 그동안 업계 사람들이 주장했던 Web3 패러다임 시프트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임팩트다.


9. 결론적으로 나는 블록체인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기보다는, 어느 정도 효용을 제공할 수 있는 분야들이 있긴 하지만, 그게 패러다임 시프트급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근데 갑자기 거대한 사회적인 변혁으로 인해 사람들의 가치체계가 달라지고 본능을 거슬러서 탈중앙화된 서비스를 쓰려는 수요가 늘어난다면 mass adoption이 가능해질 수도 있고, 그 가능성을 아예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런 시나리오에 기대서 내 인생을 블록체인 업계에 바치기에는 뭐랄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내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고, 그래서 순수한 열망을 갖고 이 업계에 몸담는 사람들을 한편으론 리스펙한다. (사실 순수한 열망보다는 한탕하려는 사람이 더 많았던 거 같긴 하지만)


10. 그리고 위의 내 주장들과 상관없이 코인 가격은 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소비시장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는 남아도는 돈이 정말 많고, 이 돈이 어디 갈 데가 없다 보니 주식시장이나 부동산시장으로 흘러 들어가서 버블을 형성하기도 하는데, 그마저도 남아도는 돈을 흡수하기에는 부족해서 코인 시장이 생긴 거 아닐까 싶다. 어차피 사람들은 베팅할 대상을 원했던 거고, 오히려 코인은 DCF 같은 방법으로 밸류에이션도 안 되니까 베팅하기에는 더 좋은 대상일 수도 있다. 그래서 블록체인이 진짜 소비자들한테 value를 제공하건 말건 코인 가격은 그에 상관없이 오를 수도 있다. 수많은 똑똑한 사람들과 자본이 투입되어 아직까지도 경제에 플러스섬을 만들지 못했다는 게 씁쓸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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