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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해 Jan 14. 2021

월급을 부탁해

가만히 있다가 가마니 된 사연

입사 초기에는 언제나 열정 호르몬이 과하게 분비된다. 홍보를 전혀 하지 않았던 회사에서는 더더욱.

웹진도 만들고 싶고, SNS도 하고 싶고, 기사도 내고 싶고, 관련 잡지에 광고도 싣고 싶고... 하지만 이 모든 건 회사에서 무엇인가를 진행하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클라이언트 몇 군데를 겨우겨우 붙잡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프로젝트 소개 및 각 팀의 성과 보고, 사내 문화와 인물 인터뷰들로 이뤄진 웹진 기획안을 만들어 대표에게 전달했다. 대표는 영업부장에게 컨펌을 받으라며 결정권을 넘겼고 영업부장은 보자마자 휙, 던졌다. 우리 회사가 따낸 프로젝트를 공개하는 건 절대 안 된다, 클라이언트 측에서도 원치 않을 거다, 현재 진행 중이거나 마무리된 건 역시 같은 이유에서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왜? 다른 회사에서는 다 공개하는 건데? 버럭 하는 통에 더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화부터 냈던 건 아마도 이 회사에 대해 니가 뭘 알아? 였던 것 같다.

보아하니 새로운 프로젝트를 소개할 건도, 이렇다 할 사내 문화도 없었다. 직원의 80%는 파견 중이었고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할 정도라 책임자를 인터뷰할 수도 없었다. 또 1년 365일 유지, 보수 중이라 자랑할 포트폴리오도 없었다.


그 후에도 뭘 하려고 하면 일단 기다리란 말 뿐이었다. 회사에는 일하는 직원보다 노는 직원들이 더 많았다. 중간에 두세 시간씩 커피숍에 앉아있어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지 않았다.



따돌림과 월급


일이 없어 생기는 문제는 꽤 많았다.

회계를 맡고 있는 안방마님 A대리는 이 친구 따돌렸다, 저 친구 따돌렸다 하는 여고생들이 하는 짓을 여전히 하고 있었다. A대리의 비위를 거스르는 자, 왕따를 당할 지니... 그분이 누군가를 욕하면 같이 욕해줘야 다음 따돌림 명단에서 빠졌다. 환경이 따돌림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이라도 많으면 다들 일만 하다가 퇴근하면 되는데 일이 없으니 친한 직원들 몇몇 모여 커피숍에 가거나, 점심을 먹거나 하면 여지없이 혼자 많은 시간을 자리에 앉아 멍 때려야 했다.

다행인 건 따돌리는 기간이 길지는 않았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면 바로 풀어주었다. 그분이 풀려야 다른 직원들도 그 직원과 다시 얘기할 수 있었다. 나는 같은 여고 출신이라 명단에서 늘 제외됐다. A대리는 선배였음에도 한 친구를 지목해 왕따를 시키는 것부터 해지 순간까지, 내가 다닐 때와 똑같았다. 학교 전통인가 싶을 정도.


그러고보니 이 회사에도 전통이 있었다. 월급날이 되면 직급이 높은 사람부터 차례대로 월급을 줬다. 대리 정도면 한 달은 기다려야 했다. 간혹 나는 괜찮으니 급한 니가 먼저 받으라는 감동적인 드라마도 연출되었다.(그게 사내 문화라면 문화겠지.)

일을 열심히 했다면 당당하게 월급을 달라고 할 텐데 그 누구도 그렇지 않으니 월급을 받으려면 경영팀장을 조용히 불러 뒤에서 부탁을 해야 했다. 그것도 월급의 전부가 아닌 당장 필요한 용돈 정도만 겨우 받을 수 있었다. 매달 꼬박꼬박 받아왔던 월급이 이토록 감사한 일일 줄이야. "회사를 위해서라면, 그깟 한두 달 월급? 괜찮아 안 받아도 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B팀장으로부터 시작된 애사심 테스트로 언젠가부터 구걸마저 힘들어졌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돈만 받겠다는 게 아니고요.   

 

어떤 일이든 일단, 하게 해 주면 안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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