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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비메이어 Sep 18. 2024

기다릴 자신 I

공부 생각 #2

2022년 9월 00일. 정확한 날짜는 기억 못하지만 그날 하루의 기억은 또렷하다. 가족들은 몇 달 전부터 계획해놓았던 해외 여행에 가있었고, 2차 발표날에 혼자 한국에 남고 싶다고 한 내 고집대로 나는 혼자 집을 지켰다. 그 누구의 시선 아래에서도 눈치 보는 일 없이 담담하게 결과를 기다리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발표날이 하루 전으로 닥치니 도저히 혼자 그 시간까지 기다릴 자신이 없었다. 하루에도 몇번은 긍정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이 수시로 교차했다. ADHD를 심각하게 앓고 있는 사람처럼 거실과 침실 사이를 왔다갔다면서 ”될거야.“ ”안 돼도 괜찮아.” 혼잣말을 되풀이하고는 그랬다.

끝내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친구를 불러내 하루밤을 우리집에서 재우기로 했다. 마침 졸업 후 취준 중이라 시간이 널널했던 친구가 하나 있었다. 더군다나 이 친구도 행정고시 경험이 있어서 내 심정을 잘 이해할 터였다. 너무 고맙게도 친구는 나의 전화 한통에 흔쾌히 같이 하루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어, 야 잘 있었냐?" 하면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친구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기도 했다. 친구와 늦게까지 집에서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었다.  






발표날 아침. 오전에 눈을 떴는데 시간을 확인하니 7시밖에 되지 않았다. 친구는 옆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다. 너무 일찍 일어나 버렸는데 심지어 정신이 말똥하다. 일부러 늦게 일어나고 싶어서 늦게 잔건데.

피부로 느껴지는 방 안 공기의 촉감이 유독 몽글몽글하게 느껴진다. 끝 무렵 매미 우는 소리도 몽글몽글하다. 암막 커튼 사이로 비치는 햇빛도 몽글몽글해 보인다.

평소같았으면 '졸리다.' '좀 더 자고 싶다.' '이제 씻어야지.' 등 일상적인 생체자극에 걸맞는 반응이 있을터인데, 이런 날에는 유난히 평소와 다른 감각들이 예민하다. 마음에 구멍하나 크게 뚤려있으니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사소한 자극에도 감수성이 밀려들어 구멍을 메꾸는 것이다.

여러 심상을 느끼며 눈 앞에 천장을 보고 있는데 곧내 현실이 자각되기 시작했다.

눈을 부비면서.

 “하 좆됐다.”

그냥 이대로 오후6시까지 잠에 들 수 있다면.



발표 시간인 오후 6시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야했다. 그러나 동시에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고 싶지 않았다. 온 몸의 신경이 흘러가는 시간을 향하여 곤두서 있었기 때문에 주변의 시계를 전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두어야했다. 애써 찾아온 친구 앞에서 히스테리를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벽시계는 가려놨고, 핸드폰은 꺼놓은 상태로 방구석에 박아두었다. 그리고 탁구같은 가벼운 운동을 하면서 주의력을 분산시키고자 했다. 그런 유난을 떨며 시간을 흘려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을 표상하는 가장 자연적인 현상 - 해가 떳다가 지는 것- 은 가릴 수가 없었다. 맞은편 곧게 선 나무의 그림자가 배란다의 통창을 통해 거실 바닥에 길게 드리워질 수록 발표 시간이 다가왔음이 직시되었고, 동시에 내 호흡도 가빠졌다.

시계를 확인하니 아니나 다를까 5시 반이었다. 30분이 남은 것이다. 30분 뒤면 앞으로의 1년이 결정된다. 아니 시간과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기회비용의 규모가 결정된다. 누구는 일 년 더 하면 된다고 하지만, 올해 합격한 나와 합격하지 못 한 나의 사이에는 한 살 더 늙어가는 것 이상의 차이가 있었다. 수험 기간이 길어질 수록 깎여나가는 자존감과 피폐해져가는 마음은 정량적으로 수치화할 수 없는 비용이었다.

발표 20분 정도를 남겨놓고 친구랑 하고있던 게임을 스톱해놓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어차피 평소 하지도 않던 게임이다. 어떻게 시간 좀 떼워보려고 깔아본건데 지금같은 마음 상태로 게임을 재밌게 할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

핸드폰은 진동상태로 바꿔놓고 뒤집어 거실 바닥에 놓았다. 어느 순간에 지이잉 하고 울린다면 붙었다는 거겠지. 눈을 까뒤집고 1분 2분 흘러가는걸 기다리는 것보다 그러는 편이 나았다.

소파에 앉아서 이런 저런 대화를 했다. 주로 불합격의 사태에 대비한 멘탈 다지기였다.

“뭐 일년 더 하지 뭐.” “어차피 경제를 그 따위로 봤는데 이번에 붙을거라 기대도 안해.” “떨어지면 한 달 푹 쉬었다가 다시 공부하면 돼.” “합격 평균연령이 28세래. 아직 괜찮다.”

“그치?”

친구는 들어주기만 했으므로 나 혼자의 독백에 가까웠다.



대화를 꽤 오래한 것 같은데, 폰에는 미동도 없다. 떨리는 한숨을 푹 쉬고 엎어진 핸드폰을 손으로 집어 시간을 확인했는데 오후 6시 2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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