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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 Oct 13. 2021

쿠오바디스, 도미네 <조조 래빗>

믿음을 부여하는 존재, 엘사




 <조조래빗>(2019)은 전쟁이라는 참혹함 안에서 전혀 다른 처지에 놓인 두 아이의 정서적 교감을 넘어 박해받는 신앙을 마주한 한 개인의 변화를 보여준다. 영화의 서술은 철저히 어린 아이 조조의 시선에 맡겨진다. 10살, 조조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이기에 우리는 그의 눈높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보단, 조조의 시선 너머의 것에 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 소년단에 입단한 나치 소년 조조의 세상엔 오직 히틀러만이 존재한다. 상상 속의 히틀러와 함께 나치 사상에 흠뻑 빠져 있는 조조는 어느 날, 유대인 소녀 엘사를 발견하게 된다.




 조조에게 발견된 엘사는 누구인가. 조조의 누나이자 로지의 딸인 죽은 잉거의 친구, 엘사. 엄연히 독일의 국민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엘사는 나치의 만행으로 철저히 타자화된 인물이다. 자국민에서 유대인이란 정체성만이 강요되며 가장 약자의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엘사의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로마제국 시절 이단이라 불리며 박해받던 그리스도교의 고난을 떠올릴 수 있다. 엘사의 고난은 곧 박해받던 신앙의 고난이요, 엘사와 조조의 만남은 박해받던 신앙과 한 개인의 마주함이 된다. 그리스도교를 향한 로마제국의 극심한 탄압이 300년 동안 지속됐던 것처럼, 부모가 수용소로 잡혀가고, 고난을 겪는 엘사는 로지의 도움으로 그녀의 집에 숨게 된다. 철저히 세뇌된 조조는 엘사를 보고 심가한 고민에 빠진다. 나치의 교육에 따르면, 유대인은 발견 즉시 신고를 해야 하나 그렇게 되면 엘사를 숨겨준 자신의 엄마 로지 역시 처벌을 받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교, 금지된 신앙을 마주하고 혼란에 빠지는 로마인으로 온전하다고 여겨지는 자신의 세상에 전혀 다른 성격의 이념이 도래했음에 두려워한다.



 엘사의 등장과 함께 조조의 집에서는 주체와 타자의 구분이 사라진다. 학습에 의해 괴물이라 생각했던 유대인이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위협하는 장면은 그동안 조조를 이루고 있었던 거대한 통념을 산산 조각낸다. 조조의 집 안에서 엘사는 박해받는 유대인이 아닌 죽은 잉거의 친구로, 조조와 로지 모자와 교감을 나누는 존재로 작용한다. 집 밖에서 탄압을 받는 낙인으로 여겨졌던 유대인은 집 안에서는 엘사를 설명하는 정체성 중 하나로 작용한다. 즉 엘사의 등장으로 인해 집이란 공간은 주체와 비주체를 나누는 선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모두가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는 유토피아적 공간으로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제국주의 세계관에 세뇌돼 있던 조조는 엘사를 통해 점차 자신의 생각을 바로잡아 나가게 된다. 자신이 믿고 있던 세상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는 것, 한 개인이 어떠한 신앙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그렇게 진행된다.




 영화는 엘사와 로지 둘의 연대 역시 섬세히 그려내고 있다. 죽은 딸의 친구인 엘사를 숨겨주며 로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치 독일에 저항한다. 로지의 굳은 결심은 그녀의 색을 통해 드러난다. 로지의 색은 초록색으로, 평화를 상징하는 이 색은 집의 벽지, 로지의 옷, 로지가 등장하는 풀밭 등등에서 계속해서 등장한다. 누굴 믿어도 되는지 어떻게 아느냐는 엘사의 질문에 로지는 답한다. 그냥 믿는 거야. 서로를 응시하는 눈동자를 통해 로지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박해받던 신앙에 대한 순수한 믿음, 믿음을 통해 로지는 자신의 길에 확신을 더하게 된다.



 조조와 로지는 부재의 아픔을 겪은 이들이다. 전쟁터로 아버지이자 남편을 떠나보냈으며, 폐렴으로 누나이자 딸을 떠나보냈다. 엘사 역시 이들과 같은 존재이다. 나치에 의해 잡혀간 부모는 수용소로, 약혼자는 결핵으로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을 겪어야만 했던 엘사는 점차 조조와 로지의 상실을 채우게 된다. 엘사는 잉거의 방에 숨어 살며 잉거의 역할 그 이상의 것을 수행한다. 단순히 딸의 친구였다는 이유뿐 아니라 여성 대 여성이라는 관계 속 로지와 엘사는 감정적 교류를 나눈다. 영화 중반부 조조는 로지를 떠나보내면서 다시 한번 상실을 겪게 된다. 분위기 반전의 시점이기도 하다. 이때 엘사는 다시금 조조가 겪는 상실을 채운다. 엄마 로지의 옷에서 자주 나타났던 초록색은 이제 엘사의 옷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게슈타포가 집을 검문하며 칼의 행방을 묻는 장면에서 칼을 들고 등장한 엘사의 가디건은 짙은 초록빛을 띤다. 이 순간은 엘사라는 존재가 조조의 믿음 그 자체로 도래하는 순간이다. 엘사는 그렇게 조조에게 있어 초반부 누나 잉거의 부재를, 후반부에는 로지의 부재를 채우는 존재가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클렌젠도르프 대위의 희생으로 살아남게 된 조조는 엘사가 숨어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누가 이겼느냐는 말에 조조는 독일이라고 답한다. 엘사는 고개를 숙인다. 조조는 엘사와 유대인에 관한 대화를 나누며 만든 책을 넘기기 시작한다. 학습과 무지로 만들어졌던 유대인에 대한 묘사 끝에 남겨진 장엔 새장 속에 갇힌 토끼를 바라보는 소년이 있다. 조조, 조조 래빗은 새장 속에 갇힌 토끼이자 동시에 새장 앞에 선 소년이다. 전범국의 아이인 그는 또한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한 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조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토끼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림 속 소년을 주목하면 그의 손엔 열쇠가 들려있다. 새장을 벗어날 수 있는 권리 또한 조조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후 우리는 조조의 자기 구원 서사를 두 단계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 조조는 자신이 만들어낸 히틀러를 창밖으로 걷어 차버린다. 그릇된 믿음을 완전히 해체한 것이다. 두 번째, 해체된 믿음을 뒤로하고, 엘사라는 믿음과 함께하기로 한 조조는 집 밖으로 나선다. 전쟁이 끝난 자유의 거리로, 연합국의 국기가 휘날리는 외부를 향해 문을 연 조조는 드디어 자기 자신을 구원하게 된다. 자신의 세계를 이루고 왔던 거짓됨을 인정하고, 깨부순 조조는 자신의 믿음을 향해 가기로 한다. 그리하여 조조 자신 역시 구원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로지가 말한 ‘자유로운 사람들이 춤추는 거야’는 완벽히 재현된다. 조조는 엘사를 바라보며 춤을 춘다. 그는 비로소 자유로워졌으므로.      



 ‘쿠오바디스, 도미네’ 신이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방황했던 이는 자신이 걷던 길에 의문을 품고, 그 의문에 더 나아가 고찰하며, 자신만의 믿음을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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