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일찍 찾아오려는지 나뭇가지 사이에 얼린 눈꽃이 녹아 내려서 길가를 질퍽하게 바꾼다. 날짜가 가고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변하는데도 난 아직 그대로 서있다.
비 온 후 맑게 갠 하늘, 커튼을 바꾸고 묵은 먼지를 털어낸다. 옷을 정리하던 중 오랜만에 아끼던 꽃분홍 치마를 거울에 비춰서 견주어 본다. 뚱뚱하고 생기 없는 내가 거울 속에 박제되어 있다.
퇴근길 버스 안, 갈 곳 없는 마음은 허전하다. 집에서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집 근처 공원으로 간다. 의지가 없어 방향을 잃은 발걸음은 허우적거리다.
친구 은영은 예쁘고 여성스러웠다. 은영이 지나가면 모든 남자들이 한번 흘겨 볼만큼 회사 내에 유명 인사였다. 그런 은영은 종종 회식자리나 남자들이 모이는 공간에서 심심치 않게 안주마냥 테이블 위에 올랐다.
은영과 친해진 건 정말 우연한 계기였다. 회사 내에 친한 언니가 같이 밥을 먹자고 했고 그때 따라 나온 게 은영이었다. 은영은 처음 만난 자리에서도 스스럼없이 친구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업무를 하면서 느꼈던 애로사항이나 동갑이어서 편히 얘기하다가 친해졌다. 어느 날 갑자기 은영은 김대리에 대해 물어봤다.
깊은 가을 밤, 회사 앞 커피숍에서 만난 은영은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나 : 무슨 일 있어?
은영: 아니, 아까 김대리님이 도와 주셨어.
나: 무슨 일?
은영: 내가 컴맹이라서 엑셀 작업하다가 데이터를 날렸는데 복구해 주셨어.
나: 아~ 그분 엑셀 정말 잘해, 나도 종종 물어봐
은영: 여자친구 있으셔?
나: 왜?
은영: 아니야, 그냥. 소문에 헤어졌다고 들어서.
나: 응, 뭐.
은영: 왜 헤어졌는데?
나: 그냥, 갈등이 있었던 거 같아.
은영: 무슨 갈등?
나: 개인적인 일이라서 내가 말하긴 그렇고 나중에 네가 직접 물어봐
은영: 너 김대리님이랑 많이 친하지?
나: 같은 업무 하니깐, 잘 알 수밖에 없어. 주말에 뭐 하시는지, 오늘 오후에 약속 있는지 알아야만 급한 일 있을 때 대응할 수 있지. 우리 일이 업무시간에만 하는 게 아니잖아.
은영: 그렇구나.
은영은 시무룩했다.그때 은영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음을, 내가 둔한 탓에 알아채지 못했다. 나에게 은영은 회사 일에 대해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 그러나 그녀에게 나의 진심을 말하기에는 애매한 사이, 다만 그 정도의 관계였다.
다음날, 대리님과 출장 가는 차 안에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나: 대리님, 어제 은영이 도와줬다면서요?
대리: 응, 엑셀을 헤매고 있기에 도와줬지.
나: 그렇구나. 은영이 어때요?
대리: 착한 거 같아, 어려운 일도 아닌데, 연신 고맙다고 하고, 보답하려고도 하고.
나: 그리고요?
대리: 그냥, 그게 다야~
나: 은영이가 마음씨가 곱긴 해요.
대리님은 입을 다물고, 차 안에 침묵이 잠식된다. 틈만 나면 집안일부터 친구 만난 일까지, 전 여자친구와의 갈등도 시시콜콜하게 얘기하는 사람이라, 나에게만은 비밀이 없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여운에 남은 감정의 끝자락을 공유하지 못한 건 나뿐이었다.
공원 한 모퉁이에서 음악 소리가 들린다. 은은한 기타 선율이 흐른다.
사랑은 아니었더라.
내 곁에 머물던 시간이었을 뿐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아
왜 넌 미안했어야만 했는지
내가 너무 들떴었나 봐
떠나는 순간마저 기대를 했었다니
얼마나 우스웠던 거니
좋은 이별이란 거
결국 세상엔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면 그때 차라리 다 울어둘 걸
그때 이미 나라는 건
네겐 끝이었다는 건
나만 몰랐었던 이야기
나만 몰랐던 이야기_아이유
앞뒤로 휘돌던 팔이 멈추자, 걸음을 한 발자국도 뗄 수 없다. 가슴 깊이 숨겨 놓았던 울분이 울컥 쏟아져 나온다. 원망이라기엔 초라하고 슬픔이라기엔 너무 쓰라린, 누군가에게 내가 품었던 감정을 얘기할 수 없어 가슴 깊이 꾹꾹 눌러 놓았던,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한 마음이 아려온다. 서서 한참을 울었다.
그가 나에게 보냈던 미안하다는 문자, 아직도 지우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