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태양 볕 아래, 가로수에 일렬로 심어진 플라타너스가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결에 그늘을 만든다. 아이스크림을 손에 쥔 아이, 그 옆을 지키는 엄마의 옷차림에도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상현의 작업실 앞, 평소와 다르게 시끌벅적한 음성이 철문 밖으로 세어 나온다. 한 남자의 웃음소리가 낙후한 빌라를 메운 뒤 넘친다. 문을 열자 남자 세 명이 풍선을 불고 있다. 작업실 바닥을 가득 메운 풍선들, 침대 위에 놓인 케이크 상자, 작업실 벽면에 하트가 잔뜩 박힌 '진주야, 나랑 결혼해줄래.'라는 현수막이 눈에 들어온다. 양복 입은 남자와 상현과 듀엣을 부르던 친구, 그리고 상현이 있다.
상현 : 왔어? 여기 내 친구들, 이 친구는 나랑 공원에서 같이 연주해서 몇 번 봤지?
종현 : 안녕하세요. 종현이라고 합니다. 가까이서 보니 예쁘시네요.
나 :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상현 : 이 친구는 저번에 클럽에서 남녀 듀엣 부르던 친구, 세 명이 동갑이고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야.
양복 입은 남자가 불편한 듯, 옷 매무새를 다듬으며 인사한다.
여준 : 동갑이니깐 말 놔도 되지? 안녕, 레슨 시간을 뺏어서 미안, 그래도 이렇게 만나서 반가워
나 : 아니에요, 축하해요. 뭐 도울 일이라도 있을까요?
여준 : 준비는 끝났지만 마음의 준비는 아직. 여기 캠코더 있어, 예쁘게 잘 찍어 줘.
나는 여준이 준 캠코더 화면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상현과 종현은 의자에 앉아서 기타를 조율하고 여준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있다.
나 : 꽃다발은?
여준이 뒤를 돌아서 숨겨 놓은 꽃다발을 내게 내민다. 내가 꽃을 받자 주머니 속에 숨겨 놓은 반지 케이스를 꺼낸다.
여준 : 저와 결혼해 주세요.
내가 당황하자, 모두들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다.
여준 : 이렇게 잘 해야 하는데, 큰일이야. 심장이 너무 뛰어. 진주 언제 오지? 오려면 멀었나?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진주 : 내가 애 가졌다고 아무 여자한테나 막 들이대는 거냐?
문 옆에 기대어 서있는 그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뚱한 표정으로 날카롭게 내뱉는다.
여준 : 그럴 리가. 너 줄려고 연습하는 거야. 저기 현수막 봐봐~
나 : 오해세요. 정말 연습한 거예요.
그녀가 얼굴을 풀고 웃자, 뒤에 있던 남자 둘이 기타를 내리친다. 나는 꽃을 진주에게 건네주고 캠코더를 고쳐 잡는다. 반주가 시작하자 여준은 노래를 부른다.
벌써 며칠째 전화도 없는 너
얼마 후면 나의 생일이란 걸 아는지
눈치도 없이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고
난 미움보다 걱정스런 맘에
무작정 찾아간 너의 골목 어귀에서
생각지 못한 웃으며 반기는 너를 봤어
사실은 말야 난 많이 고민했어.
네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걸
아주 많이 모자라도 가진 것 없어도
이런 나라도 받아 줄래
너를 위해서 너만을 위해서
난 세상 모든 걸 다 안겨 주진 못하지만
난 너에게만 이제 약속할게
오직 너를 위한 내가 될게
Is only for you
just wanna be for you
넌 그렇게 지금 모습 그대로 내 곁에 있으면 돼
난 다시 태어나도 영원히 너만 바라볼게
넌 모르지만 조금은 힘들었어
네게 어울리는 사람이 나인지
그건 내가 아니라도 다른 누구라도
이젠 그런 마음 버릴래.
너를 위해서 너만을 위해서
나 세상 모든 걸 다 안겨주진 못하지만
난 너에게만 이제 약속할게
오직 너를 위한 내가 될게
Is only for you
Just wanna be for you
넌 그렇게 지금 모습 그대로 내 곁에 있으면 돼
난 다시 태어나도 영원히 너만 바라볼게
쿨_ All for you
여준은 무릎을 꿇고 진주에게 반지를 내민다. 새침한 표정으로 진주가 손을 천천히 내밀자, 여준이 황급히 진주의 손가락에 반지를 껴준다. 둘이 서로의 눈빛을 살피며 수줍게 웃는다. 캠코더 너머의 둘은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럽다.
남자 둘이 기타를 내려놓고 폭죽을 터트린다. 진주는 깜짝 놀라서 옆에 있는 종현의 어깨를 친다. 네 명이 친구 사이라더니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을 거 같다. 종현은 등 뒤에 있던 케이크를 꺼내어 여준의 얼굴에 박는다. 여준은 복수한다고 종혁과 옥신각신하자 바닥에 있던 풍선들이 사방에서 터진다. 그 와중에 상현은 진주에게 축하한다며 포옹한다. 종현과의 결투에서 중심을 잃은 여준이 넘어지면서 풍선이 한꺼번에 폭죽처럼 터진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들의 청춘이 무르익는다.
의자를 치우고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둘러앉아서 소주와 음료수, 주전부리를 꺼내어 먹는다. 여준이 연거푸 건네 준 술잔에 취기가 올랐는지 눈이 풀러 있다. 여준은 술병을 내게 기울면서 묻는다.
여준 : 하는 일이 뭐야?
나 : 회사원이지.
여준 : 월급 꼬박꼬박 나오지?
나 : 응, 뭐 그렇지.
여준 : 상현아 얼른 결혼해라, 우리 같은 하루살이 인생은 별 볼일 없잖아. 나도 이제 취업해야지. 지난달부터 원서 넣었는데 계속 떨어지더라, 스펙도 딸리지, 경험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지. 이제 애기도 태어날 텐데. 아버지 노릇은 해야 할 거 아니야. 언제까지 기타만 두드릴 수 없는 거잖아.
종현 : 우리가 뭐 어때서? 음반 준비도 하고, 곡도 쓰고 있잖아. 레슨도 하고 있고.
여준 : 그걸 지금 10년째 해서 문제지, 지금이야 나이도 어리고 여기 저기서 불러주는 데도 많아서 괜찮지만 언제까지 이걸 해서 집 사고 차 사냐고. 매번 음반 제작이다 뭐다 해서 들어가는 돈이 너무 많잖아. 그냥 포기하는 것도 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우린 처음부터 안 되는 거였어. 음악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종현 : 그렇지 않아, 아직 때가 아닌 거지. 우리 앨범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우리는 같이 음악 할 때가 재미있어. 안 그래?
아무도 말이 없다.
진주 : 야! 오늘 분위기 왜 이래? 프러포즈 받았는데 우울하게 할 거야? 나 술 마신다.
여준 : 안 돼, 뱃속에 애기를 생각해야지.
진주 : 우울할 필요 없어, 음악 하는 게 뭐, 대수라고. 좀 어려운 날도 있고 좀 많이 버는 날도 있잖아. 그때그때 고민하면서 살면 되지. 뭐가 문제야.
상현 : 진주 말이 맞네. 오늘은 축하의 날이잖아. 어차피 이 문제는 우리가 계속 고민했던 거고, 그만 두려고 해도 결국 음악으로 위로받는 게 우리 인생 아니야?
종현이 여준의 머리를 팔을 휘둘러서 감싼다.
종현: 애 아빠 됐다고 늙은이 같은 소리하고 자빠져 있네. 내가 너보다 3 개월 일찍 태어났거든?
여준이 살려 달라고 발버둥 치고 상현은 둘을 말리고 있다. 진주가 내게 기대어 나지막하게 읊조린다.
진주 : 예전에 상현이랑 사귀었죠. 둘이 고등학교 때부터 음악을 같이 하던 친구였고, 20대의 반을 상현이랑 함께 보냈어요.
나 : 그 스킨십의 상대가 상현이었어요?
그녀가 웃는다.
진주 : 우리 공연 보셨구나, 맞아요.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저만 좋아하고 있더라고요. 더군다나 그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라 내 음악이었다는 사실, 우리가 아직 어리고 어설퍼서 그게 사랑이라고 믿었던 거죠. 사랑 참 복잡하죠?
나는 긍정의 표시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진주 :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흘러가다가 고이면 그게 사랑인 거죠. 그 사실을 상현을 통해서 알게 됐어요. 그만큼 상현이를 잘 알고 있다 보니 지금 상현이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도 알 거 같고요.
나 : 예?
진주 :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사랑을 줄 수 있다는 것, 그게 얼마나 큰 기적일까요?
이미 다른 남자의 애를 가진 진주는 아련하게 상현을 바라본다. 누군가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지만 사랑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진주가 상현을 놓아 준 것처럼,
나는 진주의 물음에 대답을 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