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I believe

by 나무

날씨가 차다.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은 지상을 얼린다. 나뭇가지 위에도, 들판 위에도, 사람들 손끝에도, 그리고 언제 사랑했다는 듯이 타오르던 옛사랑마저 식힌다.


공원의 가장자리를 걷는다. 한산해진 사람들 사이로 작은 무대가 보인다. 어느 봄날, 계단에서 음악을 듣던 나, 그리고 기타를 치던 상현이 아른거린다.

무대 옆을 따라 올라가는 길목, 클럽을 향해 걸어가던 두 명의 남녀의 수줍은 미소, 스치듯이 손이 부딪치고 서로 어색해하며 괜스레 웃음 짓던, 초록 잎이 설익던 그때가 떠오른다.

나의 발걸음은 왼쪽으로 돌아서, 상현의 작업실로 향한다.

모든 것이 돌고 돌아서 다시 원점이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 없이, 시간만 흘러간다. 또 다시, 사랑은 지나가고 홀로 남아서 남겨둔 미련을 묻는다.

핸드폰이 울리고 액정에는 김대리의 이름이 뜬다.

김대리 : 잘 지냈어? 요즘 업무가 바빠서 연락 못했네. 미안해. 우리 내일 만날까?

나 : 예, 시간 되시면 봐요.

그에게 난, 필요하긴 하지만 필요 충분하지 않은 존재, 소파에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문뜩 생각나서 찾는 오징어 다리와 같다. 항상 그의 시간표에는 나의 항목이 누락되어 있다. 옆에서 바라보았으면 몰랐을 그의 마음 속, 뜬구름이 걷히자 이제야 확실히 보인다. 내가 좋아하는 그는 나의 바람이 만들어낸 환상이었음을.

상현의 불 꺼진 작업실은 적막하다. 어두워진 작업실 입구에서 쭈그려 앉아서 그를 기다리던 내가, 추울까 봐 옷을 덮어주려 나오는 그가 그려진다. 나는 발길을 돌려 왔던 길을 내려간다. 그와 함께 서있던 버스 정류장, 내가 그를 기다리던 지하철 역 입구, 그와 함께 먹던 음식점, 이 길 위에 흩뿌려진 옛 기억을 추억한다. 내 발걸음이 멈춘 곳, 겨울 분위기로 덧칠한 클럽 간판이 보인다.

핸드폰이 울리고, 액정에 진주의 이름이 오른다.

진주 :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나 : 어, 잘 지내지. 동동이는 잘 자라고 있어?

진주 : 그럼, 요즘 뱃속에서 요동을 쳐서 문제지, 잠깐만

진주는 내 말을 잘라내고 수화기 너머의 다른 이와 대화를 하고 있다.

진주 : 이 자식아, 빨리 노래 안 불러?

상현 : 됐어.

진주 : 궁상 떨지 말고, 제대로 고백은 해봤어? 빨리 불러.

상현의 노래가 수화기 너머로 들린다.




I Believe 그댄 곁에 없지만

이대로 이별은 아니겠죠.

I Believe 나에게 오는 길은

조금 멀리 돌아올 뿐이겠죠.

모두 지나간 그 기억 속에서

내가 나를 아프게 하며 눈물을 만들죠.

나만큼 울지 않기를 그대만은

눈물 없이 날 편하게 떠나 주기를

언젠가 다시 돌아올 그대라는 걸 알기에

난 믿고 있기에 기다릴게요. 난 그대여야만 하죠.

I Believe 내가 아파할까 봐

그대는 울지도 못했겠죠.

I Believe 흐르는 내 눈물이

그댈 다시 내게 돌려주겠죠.

자꾸 멈추는 내 눈길 속에서

그대 모습들이 떠올라 눈물을 만들죠.

나만큼 울지 않기를 그대만은

눈물 없이 나 편하게 떠나 주기를

언젠가 다시 돌아올 그대라는 걸 알기에

난 믿고 있기에 기다릴게요. 나 그대여야만 하죠.

나 그댈 알기 전 이 세상도 이렇게 눈부셨는지

그 하늘 아래서 이젠 눈물로 남겨졌지만

이 자릴 난 지킬게요. 그대란 이유만으로

나에게는 기다림조차 충분히 행복하겠죠.

사랑한 이유만으로 또 하루가 지나가고

오는 길 잊어도 기다릴게요.

난 그대여야만 하죠.

난 그대여야만 하죠.

I Believe_신승훈




내겐 약속을 해야 만날 수 있는 그가 있다.

내겐 약속을 하지 않아도 만날 수 있는 그가 있다.


핸드폰 너머의 상현의 노래가 끊어지고 클럽 앞을 서성이던 나의 발걸음이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간다. 웨이터가 오랜만에 온 나를, 어제 본 사람마냥 편하게 대기실로 들어가라고 손짓한다. 나는 멈칫한다.

이제 와서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 이제 너만 보겠다는 다짐, 사랑한다는 고백, 달달한 시어를 나열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나는 상현의 노래를 듣고 싶다.

대기실 앞, 문 너머로 상현과 진주의 투덕거림이 들린다.

진주: 왜 고백을 안 해? 그냥 고백했으면 되잖아. 아니면 친구로 지내면 되는 거고.

상현: 난 아영이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도 좋으니, 아영이가 좋아하는 사람 만났으면 좋겠어, 난 정말 많이 좋아하니깐, 많이 보고 싶으니깐, 매일 아영이 생각으로 차있으니깐, 나의 고백이 아영이 발목을 잡을까 봐, 두려워.

진주: 발목 잡는 게 어디 있어, 넌 너의 사랑을 하고 아영이는 아영이의 사랑을 하면 되지. 각자의 사랑에서 충실하면 돼.

상현: 쿨 한 척 하기는, 밤마다 전화하던 사람이 누군데?

진주: 그때는 몰랐던 거지, 어떻게 하면 다시 내게 돌아올까?를 고민했었는데, 다 부질없더라. 그래도, 고백을 해야 사랑을 시작하고, 이별을 해봐야 소중한 걸 알고, 상처를 받아봐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겠더라. 이것저것 따지며 두려워 말고 사랑해봐. 그 끝은 누구도 알 수 없잖아.

무대 위에서 연주를 마친 중년 기타리스트가 박수갈채를 받고 대기실로 내려오는 길에 나를 슬쩍 밀친다. 대기실 문이 열리고 닫히면서 어렴풋한 상현의 실루엣을 바라본다.

나를 향한 상현의 진심을 들은 뒤로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음을 쓸어 담는다. 어설픈 사랑을 말할 수 없는 암담함을, 표현할 수 없는 서글픔을 상현은 언제나 내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뒤를 돌지 않았을 뿐, 상현은 나와 함께였다. 잊고 있었다. 지금도 그가 내 뒤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대기실 문고리를 잡고 돌린다.


곧 상현을 마주할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나는,

그래도 그가 보고 싶은 나는,

아직도 사랑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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