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시작
낭만의 여름이 시작되다
여름 장마 덕분에,
나의 불쾌지수는 아주 높이 올라가고 있다.
아무리 큰 우산을 쓰고,
장화를 신고, 웅덩이를 요리조리 피해도
내 모습은 꿉꿉함 그 자체다.
머리는 부시시해지고,
몸은 끈적거리고,
팔 한쪽은 당연하다는 듯 물기에 젖어 있다.
피해보려 애써도,
장마는 결국 피할 수 없다는 걸
나는 왜 매번 잊고 사는 걸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물기를 머금은 흙과 꽃잎,
나무들은 그 속에서도 노련한 냄새를 낸다.
여름은 그 안에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장마는 어쩌면 감정의 계절이다.
나이를 먹으며 울기도 어려워졌지만,
어떤 날엔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나를 감싸주는 듯한 느낌을 줄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그 빗속에 조용히 숨고 싶어진다.
여름 속, 장마 안에서
나는 언제나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되곤 한다.
비 오는 오후,
처음엔 소리 없이 스며들던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맘때면 늘 그랬다.
괜히 누군가 나를 데리러 와주기를 바랬다.
특히 남자친구가 아무 말 없이,
그저 나를 데리러 와주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상상하곤 했다.
현실은 대부분 그런 장면 없이 흘러갔지만,
그럼에도 비 오는 날이면 나는 혼자 상상했다.
내 삶이 한 편의 드라마였으면,
그리고 내가 그 이야기 속 주인공이었으면,
"비가 내릴 때마다 마음이 괜히 흔들고,
'사랑받고 싶다'는 감정이
빗물처럼 조용히 내 안을 가득 채워왔다."
첫 장마는 언제나 그런 나를 떠올리게 한다.
유난히 감정에 취하던 계절.
누군가에게 데려가 주기를 기다리던 마음.
조용히 나를 감싸주던,
그 여름의 비.
그때의 시간은 내게 여운과 그리움,
그리고 낭만으로 남아 있다.
지금도 비가 내리면,
그때처럼 생각을 꺼내본다.
생각해보면,
나는 비 오는 날 혼자인 시간이 많았던 것 같다.
혼자 길을 걷다가,
빗방울이 천천히 떨어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이슬이 맺힌 풀잎 위로 떨어지려는 물방울 하나.
그 모습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아직 떨어지지 않은 그 찰나가 좋았다.
멍하니 그 순간을 바라보다 보면
풀 냄새가 공기 속을 가득 채운다.
그 냄새는 언젠가를 기억하게 한다.
자연속에서 뛰어놀던
나의 어린 시절.
흙범벅이 된 얼굴, 젖은 머리, 망가진 옷차림.
그럼에도 해맑고 자유롭던 시절.
그 여름의 기억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마치 풀 냄새가, 그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듯이.
여름의 장마는 나에게도 작은 행복을
계속해서 안겨주고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그 속에서 슬픔도,
외로움도, 희망도 함께 느꼈다.
여름의 기억은 그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안다.
'여름의 낭만은 언제나
내 기억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