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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신 May 24. 2022

잃어버린 시간

[단편소설]


만년설에 덮인 산봉우리와 회청색 바다가 수채화 속 풍경처럼 아련하다. 

바다가 푸르지 않은 건 설산을 품은 탓일까 진줏빛 하늘을 담은 탓일까. 안개처럼 내리는 고운 보슬비 탓인지도 모른다. 설산이 잠겨 있는 바다만으로도 이곳이 지구의 끝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파도 한 점 없이 고요한 바다에 유람선과 어선들이 얌전히 떠 있다. 아버지는 언젠가는 수평선 너머로 가고야 말리라고 말하곤 했다. 아버지에게 바다는 극복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열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긴 시간이 흐른 뒤에 나는 아버지의 꿈을 좇아 우수아이아에 왔다. 땅끝마을이라 불리는 지구 최남단 도시. 1,000Km만 항해하면 남극에 가 닿는 곳. 가없는 바다를 지키는 등대가 있는 곳. 아버지를 향한 나의 염원이 서린 곳.

아버지를 피해 달아나기 바빴던 시절이 있었다. 아버지에게서는 언제나 비린내가 났다. 나는 아버지가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은은한 스킨로션 향을 풍기며 출근하는 상상을 하고는 했다. 아버지도 자식들이 어촌을 떠나기를 바라셨는지 넉넉지 못한 형편에서도 딸인 나를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보냈다. 긴 시간이 흐른 지금, 아버지에 대한 나의 소망도 나에 대한 아버지의 소망도 부질없는 꿈이 되고 말았다. 나는 실업자가 되었다. 가장자리부터 지워지다가 완전히 사라지고 마는 신기루처럼 내가 다니던 회사는 문을 닫았다.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나. 나를 기다리는 건 무얼까. 두려움, 절박함, 자괴감, 실망 같은 감정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시간은 많은 걸 바꾸는 힘이 있다. 내가 싫어했던 모든 게 그립다. 아버지의 작업복에서 풍기던 비린내와 못 박힌 손과 뺨에 닿던 수염의 까칠한 감촉까지…. 아버지는 손재주가 뛰어나고 손놀림이 빠른 어부였다. 아릿줄을 만들 때 아버지의 솜씨가 단연 빛났다. 자로 잰 듯 정확한 위치에 낚싯바늘을 끼우는 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손을 따라 시선을 돌리기 힘들 정도였다. 

커피 한 잔을 다 마시기도 전에 비가 그쳤다. 카페에서 나온 나는 여행 안내소를 향해 발길을 옮긴다. 안내소 입구까지 사람들이 길게 줄서 있다. 우수아이아 관광 안내소에서는 여권에 지구 최남단 도시에 온 사실을 기념하는 스탬프를 찍어 준다. 나도 줄 끄트머리에 선다. 일곱 가지 스탬프 문양이 벽면에 붙어 있다. 남극으로 가는 관문(Puerta de entrada a la Antártida)이라는 스페인어 문장이 펭귄을 둘러싸고 있는 스탬프가 마음에 들었다. 내 시선이 스탬프 문양에 꽂혀 있을 때 앞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스탬프를 많이 찍으면 여권 훼손으로 입국이 제한될 수 있다는 직원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일곱 가지를 몽땅 찍어달라며 우기는 사람이 있었다.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용기 있다고 해야 할지. 스탬프가 잔뜩 찍힌 여권을 머리 위로 흔들며 앳된 얼굴의 금발 청년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내 여권에도 펭귄과 방문 날짜가 찍혔다. 유람선 매표소로 가서 내일 아침 9시에 비글해협으로 출발하는 표를 샀다. 

이제 도시를 둘러볼 차례다. 여행 안내소에서 받은 지도를 보며 동쪽으로 걷는다. 도시의 동쪽 끝에 선박박물관과 감옥박물관이 있다. 나는 선박박물관부터 보기로 한다. 범선 모형들이 전시된 방에는 다윈이 타고 왔다는 비글호가 돛을 활짝 펼치고 있었다. 다윈 덕분에 우수아이아 앞바다가 비글해협이라는 이름을 얻은 셈이다. 

전시공간으로 변한 오래된 감옥에는 실물 크기의 인형들이 수감생활을 재현하고 있었다. 줄무늬 죄수복을 입고 지름이 20cm는 됨직한 둥근 쇳덩이를 발목에 매달고서. 감옥을 지은 다음 도시 건설에 동원되었다는 죄수들은 모두 정치범이었다고 한다. 옥사를 둘러보는 동안, 어쩌면 우리 모두 감옥에 갇힌 죄수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구라는 감옥, 국가라는 감옥, 사회라는 감옥, 가족이라는 감옥. 벗어나기 어렵다는 의미에서 모두 비슷하다고 느낀다. 어쩌면 아버지는 가족이라는 감옥에 갇혔던 게 아닐까.

아버지와 나를 이어주는 끈이 바다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조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 바다로 와야 했다. 단번에 우수아이아까지 오지는 않았다. 설산을 넘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동안 아버지를 잠시 잊은 적도 있었다. 400년 동안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는 광야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모든 생명체가 소멸에 이르고 만다는 붉은 사막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름다웠다. 존재의 소멸 앞에서 한 개인의 고뇌나 회한, 이별과 절망, 구속이나 질곡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광막한 사막을 진작 보았다면 나의 선택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독방을 쓴다. 동숙자의 숙면을 방해하지나 않을까 두려워서다. 2인 1실 기준으로 책정된 여행상품이기에 추가 비용을 내야만 했다. 결벽증에 가까운 이런 성품이 아버지를 닮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다. 아버지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려고 하지 않았다. 폐는커녕 모든 사람을 배려하는 삶을 살았다. 아버지가 가장 많이 하신 말은 ‘내가 걸어간 자리는 표시가 나야 한다.’였다. 

“누구도 지나가지 않은 길은 아직 길이 아니지? 잡초가 무성하고 돌멩이도 널려 있을 거야. 그 길을 처음 가는 사람이 돌멩이를 치우고 풀을 잘라내야 하는 거란다. 그래야 다음 사람이 그 길을 따라 편안하게 걸을 수 있지 않겠니?”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의 말도 삶의 방식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이용당하는 거 같아서 속상했고, 타인에게 베푸는 만큼 내 몫이 줄어드는 거 같아서 불만이었다. 이웃집 아이들에게는 자상했지만, 우리 남매에게는 엄격했다. 맏딸인 나에게 특히 엄해서 어떻게 하면 하루빨리 아버지의 집에서 나갈 수 있을까 고심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을 안다. 일밖에 모르는 머저리, 호구, 주변머리 없는 사람, 멋대가리도 없고, 재미도 없다는 엄마의 핀잔이 사실이면서 동시에 폄훼였다는 것도 안다. 가장이 되고 나서야 나는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해하는 만큼 사랑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를 사랑하지 못했다. 

감옥박물관의 복도를 걸으며 때늦은 후회를 한다. 그리고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바다가 떠오르고, 뒤이어 등대가 떠오른다. 내가 태어난 집 바로 앞에 방파제가 있었고, 방파제 너머 등대가 있었다. 이른 새벽, 하늘이 연보랏빛으로 깨어나면 등대의 불빛이 작은 별처럼 반짝였다. 나는 명멸하는 등대의 불빛이 아버지의 귀갓길을 인도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시신 없는 죽음이라서 아버지를 추모할 곳이 바다 외에는 없다. 나는 기제사를 지내는 마음으로 매년 팔미도 등대에서 새해를 맞는다. 올해 첫 일출은 보지 못했다. 인천에서 출발한 유람선이 어둠을 헤치고 팔미도에 도착했을 때 잔뜩 흐린 하늘에서 눈송이가 하나둘 떨어졌다. 등대에 올랐으나 눈발을 흩뿌리는 구름 탓에 희부연 바다와 몇 척의 배만 보았다.

십 년 전 그날도 하늘은 잿빛이었다. 캠퍼스를 가로질러 기숙사에 가는 동안 광택을 잃은 납빛 하늘에서 빗방울 하나가 툭 하고 이마에 떨어졌다. 빗방울 개수가 늘어났고, 떨어진 나뭇잎들이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가방을 머리에 이고 달리는 동안 바다도 이렇게 미쳐서 날뛰는 게 아닌지 걱정되었다. 휴게실에 가서 TV를 켰다. 빨간색 글자가 화면을 채웠다. 제주도 인근 해상에서 조업 중이던 배 여러 척 침몰. 가슴이 벌렁거리며 손이 떨렸다. 이상하게 불길했다.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아버지한테서 무슨 연락 없었어요?”

“두 시간쯤 되었나? 날씨가 심상찮아서 조업을 포기하고 돌아온다더라. 왜?”

“뉴스 보세요. 지금 속보가 나오는데 제주도 인근에서 배가 여러 척 침몰했대요.” 

나는 전화를 끊기 무섭게 기도실로 달려갔다. 제발 아버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 달라고, 침몰한 배들 가운데 아버지의 배가 없게 해 달라고 빌었다. 난생처음 신에게 한 기도였지만, 내 기도는 소용이 없었다. 이어지는 뉴스 특보 속에 아버지의 이름이 있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배는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기상대의 늑장 예보에 많은 배가 침몰했다는 비난이 뉴스의 앞머리를 장식했고, 실종된 배도 사람도 많았으나 구조작업은 중단되었다. 나는 기적처럼 아버지의 배가 나타나기를 바랐다. 상선이든, 화물선이든, 남의 나라 어선이든 아버지의 배를 발견해서 타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구조했다는 뉴스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아버지와 이별했다. 아버지가 어느 무인도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오래오래 생각했다. 시신이 없으니 장례식도 없었다. 사망신고를 하기 전까지 아버지는 서류상 산 사람이었다.

어부의 딸이 갯가가 아닌 곳에서 삶을 시작할 수는 없는 일이다. 눈을 뜨고 있을 땐 언제나 바다가 보였고 일 년 열두 달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썰물이 지면 방파제 안쪽 바다는 깊이가 일 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투명한 물 아래 잔잔한 조약돌이 깔려 있었고 물살은 돌멩이를 간지럽히기 좋을 만큼만 살랑였다. 아버지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를 바다에 데리고 가서 헤엄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여동생과 남동생은 언니에게만, 누나에게만 아버지가 헤엄을 가르쳐 주었다며 원망하고는 했다. 덕분에 나는 등대섬까지 헤엄쳐서 갈 수 있었다. 접시에 담긴 물처럼 잔잔한 바다에는 보일 듯 말 듯 투명한 새우와 새끼손톱만 한 뿔소라가 많이 살았다. 뿔소라의 작고 단단한 뚜껑이 앙증맞고 깜찍했다. 나는 뚜껑을 가지기 위해 뿔소라를 많이 잡았다. 그렇게 작은 건 잡으면 안 된다는 개념이 없었다. 아버지가 나를 심하게 혼냈다. 

“이렇게 작은 걸 잡다니! 아무리 애라지만 어찌 이리 생각이 없냐. 내가 그러라고 가르치더냐?”

새끼를 잡으면 안 된다고 하면 될 일인데 그렇게 가르쳤냐고 하니 너무 서러웠다. 아버지가 무섭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해서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며 말없이 서 있었다. 억울한 마음이 컸다.

“새우든, 물고기든, 뿔소라든 방파제 안에서 잡으면 안 돼. 알았냐? 자라서 큰 바다로 나가야 하는데 다 잡아버리면 나중에 아버지가 잡을 게 없잖아. 알았지? 대답 안 해?”

나는 끝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마지못해 고개만 끄덕였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바다 생물과 고기 잡는 법이 적힌 책들을 사 오셨다. 바다로 나가지 않아도 쉴 새 없이 무언가를 해야 했던 고단한 어부였지만 책을 펼쳐놓고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나는 아버지의 말이 옳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인망어업은 바다 밑 해저에서 그물을 끌기 때문에 진흙과 모래가 일어나 바닷물을 깨끗하게 만드는 해면 같은 생물을 죽음에 이르게 하므로 금지해야 한다거나, 그물눈이 너무 조밀하면 어린 물고기까지 그물에 걸리니 안 된다거나 하는 내용이었다. 아버지의 말이 내 머릿속에 굳건하게 자리를 잡았다. 지금도 어린 대게까지 싹쓸이를 했다거나 그물로 바닥을 훑어서 마구잡이로 남획한다는 뉴스를 보면 주먹을 불끈 쥐게 된다. 

자연의 섭리를 중히 여겼던 아버지는 돈을 많이 버는 어부가 되지 못했고, 돈을 많이 벌지 못했기 때문에 아내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나는 엄마의 태도가 부당하다고 느꼈다. 어린 눈에도 부지런한 아버지가 무능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새끼를 잡으면 안 된다고 나를 타이르면서 정작 자신은 닥치는 대로 물고기를 잡았다면 아버지를 미워했을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6학년 어느 여름날 아버지가 헤엄치러 갈래? 하고 물었다. 수영복 위에 긴 티셔츠만 걸친 나와 달리 아버지는 남방셔츠에 바지까지 차려입었다. 나는 두어 걸음 뒤에서 조심히 아버지를 따라갔다. 아버지는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지만, 갈서서 걷자고 하지는 않았다. 아버지와 나는 방파제 위에서 옷을 벗었다. 테트라포드를 쓰지 않고 바위와 시멘트로 뭍과 연결해서 지은 방파제는 경사를 이루며 바다에 면해 있었다. 사면을 따라 걸어 내려가는 아버지의 등이 하얬다. 목덜미와 팔은 알밤 색이었다. 자로 그은 듯 확연히 색이 달랐다. 아버지의 하얀 속살이 낯설었다. 나는 엉덩이를 경사면에 붙이고 앉은걸음으로 내려갔다.

아버지가 등대를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바다는 잔잔했고 물은 기분 좋을 만큼 시원했다. 아버지의 두 팔이 번갈아 물 위로 솟구쳤다. 아버지의 뒤통수를 보며 나도 팔다리로 힘껏 물을 헤쳤다. 입술을 적시는 물맛이 짭짤했다. 아버지의 팔이 물을 젓지 않는다고 생각한 순간 뒤통수가 아니라 얼굴이 보였다. 아버지는 한 손을 흔들며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뭍에서와 달리 숨기는커녕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아버지가 나를 기다려준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아버지에게 빨리 가기 위해 힘껏 팔다리를 움직였다. 아버지가 두 손을 물 위로 올려 좌우로 흔들었다. 빨리 오라는 뜻인가? 오지 말라는 뜻인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천천히 와야지. 바다에서는 힘 빠지면 안 돼. 호흡도 체력도 아껴야 해. 자, 잠시 쉬자. 힘을 완전히 빼고 편안히 누워 봐.”

코앞까지 온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가 먼저 하늘을 보고 누웠다. 무심하게 둥둥 떠 있는 거라면 나도 자신 있었다. 온몸의 힘을 뺐다. 소금기 있는 바닷물이 내 몸을 띄워주었다. 아버지와 나란히 바다에 누워서 하늘을 본 건 처음이었다. 투명하고 파란 하늘에 새하얀 뭉게구름이 떠 있었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 속 구름처럼 동글동글한 윤곽선이 부드러웠다. 실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다 쉬기를 반복하며 등대섬에 닿았다. 먼저 섬에 올라간 아버지가 내 손을 잡아서 바위 위로 올려주었다. 등대지기도 없는 작은 등대였다. 바위에 앉아 등대지기 노래를 불렀다.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노래가 끝나자 아버지가 말했다.

“우리 딸 가수 해도 되겠다. 그런데 너는 아버지가 창피하냐?”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왜 아버지만 보면 도망가냐?”

나는 그런 적 없다고 딱 잡아뗐다.

“그래? 네 말 믿으마.”

처음이자 마지막 동행이었다. 날이 좋으면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가던 아버지가 뭍에 계셨던 건 배를 수리하거나 아니면 뭔가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을 거다. 그 당시에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왜 나와 함께 등대섬에 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게 낚시를 가르쳐 준 사람도 아버지였고, 어두운 밤 방파제에서 고둥을 잡는 비법을 알려 준 사람도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첫 딸인 나에게 바다의 서울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내가 태어난 집이 바닷가 나라의 서울이라고 했다. 여동생에게는 태양의 서울, 외아들인 남동생에게는 하늘의 서울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아버지는 바다만큼, 태양만큼, 하늘만큼 자식들이 잘되기를 바랐던 걸까. 

너무 엄격하고 완고한 아버지의 성품 때문에 노심초사했던 때가 많아서인지 나는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집은 지붕과 벽이 있는 물리적인 공간이지만, 무형의 가치도 함께 존재한다. 따뜻한 잠자리와 엄마의 손맛이 깃든 음식이 있는 곳, 낯익은 냄새와 손때 묻은 내 물건들이 있어서 언제라도 돌아가고 싶은 곳, 아무런 구속 없이 뒹굴뒹굴 구르며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곳, 집은 그런 곳이라야 한다. 그러나 내게 있어 집은 반드시 탈출해야 하는 감옥이었다. 물건은 언제나 제 자리에 있어야 하고, 취침 시간이나 기상 시간도 지켜야 했다. 바른 자세로 앉아서 밥을 먹어야 했고 반찬 투정은 용납되지 않았다.

가장 힘들었던 건 편안하게 빈둥거릴 수 없다는 거였다. 아버지는 휴식을 위한 약간의 나태함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소설책을 읽건, 예습이나 복습을 하건, 집안일을 돕건, 하여간 무언가를 하고 있어야 했다. 공상에 빠져 있노라면 어김없이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아버지 눈에 띄지 않는 게 상책이라서 바다에서 돌아오시지 않기를 바란 적도 많았다. 아버지의 실종이 내 염원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자책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소원대로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부재가 내게 안일을 허락한 건 아니었다. 맏이였기에 가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져야 했다. 임종하지 못했으므로 잔소리라 여겼던 아버지의 말이 유언이 되고 좌우명이 되었다. 내가 지나간 자리엔 흔적이 남아야 하고, 정리 정돈을 잘해야 하고, 책임감이 있어야 하고, 맡은 일은 시간 내에 마무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버지가 몇 번이나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의 고모이자 할아버지의 여동생이 결혼할 때 증조할아버지는 불현듯 딸에게 외양간 청소법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부의 집에 외양간이 있을 리 없었다. 증조할아버지는 결혼식을 며칠 앞둔 딸을 친척 집에 보내 외양간 청소를 하도록 했다. 외양간 냄새 때문에 소박이라도 맞으면 책임지실 거냐며 할아버지가 증조할아버지에게 대들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의 처신이 정말 훌륭했다고 칭찬했다. 나는 아버지도 증조할아버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가혹하다고 여겼고 지나치다고 여겼다.      

아침에 일어나니 유리창이 하얬다. 보슬비보다 짙은 안개가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유람선을 타기 위해 서둘러 선착장으로 갔다. 미지의 세계로 탐험을 떠나듯 배가 해무 속으로 나아갔다. 짙은 안개 때문인지 갑판에 나와 있는 승객은 없었다. 나만 외로이 뱃전에 기대 서 있다. 억누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꿈과 욕망은 어떻게 위로를 받았을까?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떤 즐거움도 누리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차다. 효도 한 번 하지 못했다는 후회 때문에 비감에 젖는다.

대학생이 되어서 가장 좋았던 점은 아버지와 맞닥뜨리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아버지가 뭍에서보다 바다에서 더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잠잘 때를 제외하면 얼굴을 마주할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그 짧은 시간조차 아버지와 대면하지 않을 방안을 궁리하느라 머리를 쥐어짰다. 기숙사에서 마지막으로 퇴실하는 학생이었고, 제일 먼저 입실하는 학생이었다. 방학 중에도 계절학기 수강을 핑계 삼아 가능하면 집에 가지 않으려고 애썼다. 

기숙사에는 전국에서 온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 잘 사는 집 아이들이었고, 의사, 변호사, 교수, 사장이 그 애들의 아버지였다. 나는 친구들의 아버지와 내 아버지를 비교했고, 열등감을 느꼈으며, 아버지를 멀리했다. 아버지는 나를 기다렸지만, 나는 아버지를 보러 가지 않았다. 내가 범한 가장 큰 잘못이자 돌이킬 수 없어 절망스러운 일이다. 그때는 흘러간 시간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거도 몰랐고, 사랑한다는 말을 영원히 들려줄 수 없다는 거도 몰랐다. 백사장에 떨어진 한 방울의 물처럼 아버지는 홀연히 사라졌다.

 안개가 옅어지자 푸른 하늘이 조각조각 드러났다. 회청색을 띠던 바다색도 점점 파래졌다. 시야는 쨍 소리가 날 것처럼 맑았고 구름 사이로 투명한 햇살이 화살처럼 쏟아져 내렸다. 공기 중에는 내게 익숙한 짭조름한 냄새가 섞여 있지 않았다. 나는 어디로 가건 바다만 보면 물속으로 뛰어들곤 했다. 어떤 바다의 물은 고향의 바닷물보다 짰고 어떤 바다의 물은 싱거웠다. 우리나라 근해에서 잡힌 물고기가 맛이 있는 건 적절한 염도 때문인지도 모른다.

햇살이 퍼지건만 바람은 여전히 서늘하다. 조그만 회색 바위섬에 바다사자들이 앉아 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수십 마리쯤 된다. 덩치 큰 녀석이 몸을 일으키더니 크와앙 거리며 옆에 있는 녀석의 머리를 밀친다. 논다고 하기에는 동작이 크고 거칠다. 싸우거나 말거나 나머지 바다사자들은 편안하게 누워 있다. 승객들은 카메라를 들이대느라 여념이 없다. 나도 사진을 찍는다.

전방의 물색이 코코아색이다. 가까이 다가가니 갈색 해초가 수중 숲을 이루고 있다. 고향의 등대섬 부근에 곰피가 많았다. 곰피는 표면이 오돌토돌해 다시마와 구별된다. 나는 바다를 짙게 물들인 해초가 곰피라고 믿는다. 어린 시절 데치지 않은 곰피에 밥을 싸서 먹었다. 양념장은 달인 멸치젓에 파, 마늘, 풋고추를 곱게 다져 넣은 것이었다. 약간 미끈거리기는 하지만 씹히는 맛이 일품이어서 나는 곰피를 좋아했다. 요즘은 고향에 가도 곰피를 볼 수 없다. 바닷물이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추억에 잠겨 있을 때 등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유람선이 등대를 향해 나아간다. 등대의 색깔이 기호처럼 쓰인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았다. 흰색은 대부분 유인 등대다. 빨간색은 항로 오른쪽에 장애물이 있다는 표시이고 흰색은 왼쪽에 장애물이 있다는 표시이다. 노란색은 소형 선박이 다니는 간이통로를 알려 주고 초록색은 암초가 많으니 가까이 오지 말라는 경고라고 한다. 아버지와 내가 헤엄쳐서 갔던 고향의 등대는 빨간색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등대는 아래위는 붉은색이고 가운데는 흰색이다. 오른쪽에 장애물이 있는 유인 등대란 뜻일까? 

바다나 등대가 신비로운 건 순간순간 달라지는 물색 때문이리라. 기온은 물론이고 바람과 구름의 개수에도 영향을 받는 것 같았다. 계절과 상관없이 물색이 짙어지면 전날보다 따뜻하게 입었던 기억이 난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순간은 환상 그 자체다. 수면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 해무는 등대부터 지우고 뭍으로 올라온다. 새하얀 안개가 눈 깜짝할 사이에 가로등과 도로와 집들을 삼킨다. 그런 날이면 나는 미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들었다. 시계 제로인 마을에 울려 퍼지는 개 짖는 소리. 나는 눈을 감고 가만히 서서 소리를 구별하려고 애썼다. 저 소리의 주인은 옆집 강아지, 저 소리의 주인은 뒷집 진돗개. 개 울음소리로 방향을 가늠하며 집으로 가노라면 미궁을 탈출한 테세우스가 된 기분이었다.

등대섬 근처에서 배가 속도를 줄였다. 펭귄이 등대를 빼곡하게 둘러싸고 있다. 사람들이 “야, 펭귄이다.”를 외치며 환호했다. 안내자가 펭귄이 아니라 황제 가마우지라고 알려 주었다. 다윈은 물갈퀴 달린 발과 하얀 배 때문에 펭귄으로 착각할 법한 황제 가마우지를 진화론의 증거로 삼았다. 황제 가마우지는 걷고, 잠수하고, 날 수 있다. 다다다다, 물을 박차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다. 황제 가마우지들이 힘차게 이륙한다. 

설산을 품은 바다와 황제 가마우지와 바다사자를 아버지와 함께 볼 수 있다면…….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버지는 실종된 게 아니라 파도에 실려 이곳까지 오신 게 아닐까? 아버지가 어딘가에서 여전히 살고 있지 않을까? 오랫동안 나는 용궁이 실재하기를 바랐고, 아쿠아맨이 왕으로 등극하는 해저 왕국이 있기를 바랐다. 아쿠아맨의 아버지처럼 내 아버지도 먼 바다의 등대지기로 살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아버지의 사망신고를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사람은 나였다. 에녹 아덴처럼 반드시 돌아오실 거라고 우겼다. 억지에 가까웠지만, 아버지를 외면했다는 가책이 무겁게 가슴을 짓눌러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죄송하다거나, 철이 없어서 그랬다거나, 제발 용서해 달라거나 하는,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는데 영원한 이별을 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할 거면 하루빨리 하는 게 낫다는 엄마와 여러 번 다투었다.

아버지는 온 동네에 소문난 애처가였다. 아버지의 아내 사랑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네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아내를 어린아이 돌보듯 했다. 어부의 아내이면서도 엄마는 물고기 배를 가를 줄도 몰랐고, 생선을 토막 낸 적도 없었다. 아버지가 손질해서 가져다주면 끓이거나 굽거나 졸이기만 했다. 한겨울에 먹는 시원한 대구탕도 제사상에 올릴 조기나 민어도 아버지의 손길이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는 정리를 잘하라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말라거나, 숙제를 다 했느냐고 잔소리를 했지만, 아내에게는 지청구하지 않았다. 연탄불이 꺼지면 피우는 사람도 아버지였고, 마당을 청소하는 사람도 아버지였다. 빈대떡이라도 부치는 날에는 누가 볼까 염려가 되었는지 방안에 앉아서 맷돌을 돌렸다. 

아버지와 헤어진 지 어느새 십 년이 흘렀다. 겨울이 되면 나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호떡을 사 먹는다. 몇 살 때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칼바람이 귀를 에어 낼 것처럼 휘몰아치던 겨울 저녁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현관 안으로 들어선 아버지가 품에서 꺼내놓은 건 호떡 5개였다. 호떡은 따뜻했다. 너무 뜨겁지도 않고 식어서 굳지도 않은, 딱 먹기 좋은 상태의 호떡에서는 달콤한 흑설탕 냄새가 났다. 엄마는 “난 또, 겨우 호떡이야?”라고 말했다. 엄마가 호떡을 먹었는지, 더 달라고 떼쓰는 남동생에게 주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내 몫의 호떡을 아껴서 조금씩 베어 먹는 데만 열중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호떡이었다. 

땅콩과 깨가 박힌 큼지막한 엿이나 단팥빵, 도넛 같은 간식을 사 온 사람도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쇠고기나 돼지고기 같은 육식은 하지 않았고, 싱싱한 생선을 먹을 수 있어서 그랬는지 자반고등어나 굴비도 좋아하지 않았다. 엄마의 식성은 정반대였다. 엄마가 족발을 사 오면 아버지만 빼고 우리끼리 둘러앉아서 먹었다. 아버지는 외계인이라도 보는 것처럼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보고는 했다. 아버지는 쇠고깃국도 국물만 먹었다. 그럴 때면 나는 얼른 아버지가 남긴 건더기를 챙겨 먹었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사소한 기억들이 너무 아파서 아버지의 실종 이후 나는 쇠고깃국과 족발을 먹지 않는다.

엄마는 아버지의 두 번째 발가락이 엄지발가락보다 길어서 불만이었고, 발가락 사이가 벌어져 오리발 같다고 흉을 보았다. 나도 검지 발가락이 엄지발가락보다 길다. 검지가 엄지보다 길면 아버지가 먼저 죽는다는 속설이 있다. 엄마는 너 때문에 아버지가 일찍 죽었다며 나를 원망하고는 했다. 아버지를 닮은 내 발가락은 몰톤 발가락이라 불리는 일종의 기형이다. 발가락 자체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으나 무릎이나 골반에 영향을 미친다. 피로골절이 생기기도 하고, 발바닥에 티눈이나 굳은살이 박이기도 한다. 아버지가 발바닥의 굳은살을 작은 칼로 도려내는 광경을 자주 보았다. 나이테처럼 가는 줄무늬가 있는, 딱딱하고 노르스름한 살 조각이 무척 신기했다. 굳은살을 그렇게 자주 도려내야 했던 이유가 발가락 때문이었다니. 책을 즐겨 읽던 아버지가 불리한 신체조건으로 가혹한 육체노동을 견뎠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몰랐다.

아버지의 작업복 주머니에는 언제나 책이 들어 있었다. 내가 읽었던 동화책도, 세계문학 전집과 대백과 사전도 아버지가 할부로 샀다. 엄마는 영업사원의 꾐에 빠져서 쓸데없는 책을 자꾸 산다고 눈을 흘겼지만, 아버지는 못 들은 척했다. 백과사전이나 양장본 전집을 팔기 위해 주기적으로 선창에 오던 서적 외판원은 아버지가 부탁하면 자기가 취급하지 않는 책들도 사다 주었다. 우리 집에는 일본 소설책이 많았다. 아버지가 읽고 나면 내가 읽었다. 소설 속 배경이 되는 바다나 갯마을이 우리 동네와 흡사했다. 해가 뜨는 바다, 지는 바다, 풍랑이 이는 바다, 등대와 바닷가의 작은 집들, 잡아 온 생선을 이웃과 나누는 장면들까지 모두 비슷했다. 나는 이런 이유로 아버지가 일본 소설을 많이 읽는다고 이해했다. 

학교에서 가정 형편을 조사할 때마다 아버지 학력을 고졸로 적을까 갈등하고는 했다. 그때마다 사람은 정직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이 떠올라 중졸 옆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아버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건 아버지 잘못이 아니었다. 술을 좋아하셨던 할아버지는 술에 취해 무단횡단을 하다 뺑소니 사고를 당했다. 어부들은 대개 바다에서 죽는다. 할아버지는 뭍에서 죽었으나 바다에서 죽느니만 못한 죽음이었다. 창졸간에 가장이 된 아버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배를 파는 것보다 배를 타는 게 나았다. 

“아버지처럼 죽지는 말아야지.”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되뇌었던 말이다. 할아버지처럼 죽지는 않았으나 할아버지의 죽음보다 나을 것 없는 죽음이었다. 대학 4학년 마지막 학기에 나는 가장이 되었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아버지의 강박을 비로소 이해했다. 게으름을 피우는 자식들을 용납하지 못했던 건 경험에서 유래한 두려움 때문이었으리라. 아들의 학업을 중단시키면서도 남편의 작은 똑딱선을 팔지 않은 할머니의 처절한 선택도 이해하게 되었다. 가끔, 아니 꽤 자주, 학교에서 아버지의 학력을 적을 때나 표지가 해진 책이 아버지 주머니에서 나올 때 나는 할머니를 원망하고는 했다. 작은 똑딱선이 큰 목선이 되었지만 바다가 가져가 버렸기에 우리에게는 배를 팔아야 할지 가지고 있어야 할지 선택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사라진 후 엄마는 아버지의 물건을 남에게 주거나, 버리거나, 태웠다.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집에 갔을 때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손때 묻은 책들도 모두 버려졌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하다 여겼던 게 당연하지 않았다. 장례식이란 산 자들이 위안을 구하는 행위일 뿐 죽은 자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시신으로 돌아온 어부의 집에는 이별을 애달파하는 달콤한 감정들이 넘쳐났지만, 장례식을 치르지 않은 우리 집에는 부재가 가져온 허무와 허탈만 유령처럼 떠돌았다. 

못 견디게 아버지가 보고 싶다. 나는 가방에서 엽서와 볼펜을 꺼낸다. 어제 감옥박물관에서 아버지를 생각하며 엽서와 우표를 샀다. 엽서에는 바다사자가, 우표에는 등대가 그려져 있다. 난생처음 아버지에게 편지를 쓴다. ‘세상의 끝에서 당신을 그리워합니다.’라는 한 문장을 쓰고 나자 목이 메었다. 아버지라는 말만 입 안을 맴돌았다. 

“아버지. 아버지는 지금도 누군가의 길이 되려고 하시겠지요?”

십 년 만에 불러보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틀림없이 거칠고 황량한 바다를 지키는 등대가 되셨을 거야. 지금은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밤이 되면 아버지가 불을 밝히실 거야. 지구의 끝까지 온 어부들이 아버지가 밝힌 불빛을 보고 무사히 육지로 귀환할 거야. 나는 진정으로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버지, 사랑했고, 사랑합니다. 언제까지나 사랑할 거예요. 

나는 생수병의 물을 버리고 우표를 붙인 엽서를 넣었다. 펭귄을 보기 위해 섬에 내렸을 때 가만히 생수병을 바다에 띄웠다. 잃어버린 시간의 조각들을 다시 모을 수만 있다면……. 아버지와 영원히 이별한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 자락이 허물어졌다. 무너져 내린 내 마음을 싣고 생수병이 천천히 등대를 향해 흘러갔다. 

(2022년 한국소설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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