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니

by 이현신

현재는 종이 잡지 발행을 중단하고 디지털 플랫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성인잡지 <플레이보이>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성인용 잡지였다. 창간 당시부터 ‘섹스만이 아니라 지적인 즐거움도 판다’는 철학을 표방하며 마틴 루서 킹, 스티브 잡스, 피델 카스트로, 존 레논 등 역사적 인물들과 심도 깊은 인터뷰를 진행했고,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무라카미 하루키, 이언 플레밍 같은 거장들의 소설이나 에세이를 비롯해 정치, 경제, 인권에 대한 진보적인 칼럼을 꾸준히 실었다. 오프라인 클럽도 운영했는데 1960~80년대에는 미국에 수십 개의 플레이보이 클럽이 있었다. 플레이보이 바니(Playboy Bunny)로 불렸던 호스티스의 토끼 복장이 아주 유명했다. 관련 행사나 공식 행사에서는 지금도 토끼 머리띠, 꼬리, 커프스, 나비넥타이를 착용한다.

플레이보이 잡지 이야기를 하는 건 바니라는 애칭을 가진 한 여인에 관해 말하기 위해서다. 쌍꺼풀진 큰 눈과 도톰한 입술을 가진 그녀를 볼 때마다 나는 플레이보이 바니가 떠올랐다. 그녀가 기지촌의 호스티스 출신이라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1990년대 폴란드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했던 무관의 아내였다. 폴란드는 소련의 해체로 위성국가 신세에서 벗어났으나 여전히 생필품이 부족했다. 미군 피엑스에서 캘리포니아산 쌀과 쇠고기와 치즈를 비롯한 생필품을 대리 구매하기 위해 바니의 집을 드나드는 한국 사람이 많았는데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바니의 집 현관에 붙어 있는 안내문에는 ‘이 집은 한국식 전통을 존중하니 들어오는 사람은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어야 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글귀를 읽는 순간 나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 재외 공관 직원의 대다수가 미국, 영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이 뿌리 깊게 박혀있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실망했기에 바니의 태도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바니는 영어도 잘했고 브리지 게임도 잘해서 외교관 부인회에서 한국인의 우수함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녀는 정결하면서도 아름답게 집안을 장식할 줄 알았고 음식 솜씨도 뛰어났다. 김치나 불고기는 물론이고 잡채와 갈비찜을 비롯한 한국 음식을 맛있게 만들었다. 서양 요리도 물론 잘했다. 덕분에 바니가 주최하는 파티는 인기가 있었다.

외교관 부인회는 친목 도모를 넘어 실질적인 민간 외교를 담당한다. 각국의 전통 요리, 의상, 예술을 소개하는 행사를 돌아가며 주최하는데 한국은 전통의상을 소개하는 패션쇼를 열기로 했다. 손으로 짠 무명에 천연 염색을 한 개량 한복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도 런웨이에 서게 되었다. 그때 바니는 전통 혼례 때 신부가 입는 활옷을 입고 싶어 했다. 나는 바니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바니는 런웨이에 오르지 못했다. 그녀가 기지촌 출신이라서 안 된다고 했다. 내게는 바니의 소원을 들어줄 권한이 없었다.

한국전쟁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기지촌에서 발생한 달러 수입은 한국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수출할 물건이 거의 없던 시절 기지촌은 달러가 직접 유입되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1960년대 초반 자료에 따르면, 기지촌 경제를 통해 벌어들인 외화가 한국 총수출액의 약 10%~20%를 차지했다. 당시 정부는 기지촌 여성들을 달러를 벌어오는 애국자 혹은 산업 역군이라 치켜세우며 관리를 독려하기도 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절망이 가득했던 바니의 아름답고 큰 눈을 잊지 못한다.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다는 부채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녀가 행복하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녀는 진정한 의미에서 지적인 사람이었고, 주체성을 잃지 않은 애국자였다. 지구의 어느 곳에서 여전히 한국식으로 신발을 벗으라고 현관에 써 붙인 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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