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

by 이현신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누적 관객 수 1,200만 명을 돌파했다. 한국 영화 침체기에 이룬 쾌거라며 연일 뉴스를 장식하고 있고, 영화는 역시 집이 아니라 극장에서 봐야 제맛이라고 주장한다. 극장이 아니라 영화관인데? 글을 쓰는 사람이라 그런지 나는 단어의 정확한 개념에 집착하는 편이다. 극장은 연극, 뮤지컬, 무용, 오페라, 인형극 등을 상연하는 곳을 통칭한다. 영화관은 오직 영화를 상영하는 시설만을 지칭한다. 과거에는 영화도 활동사진 공연으로 보았기 때문에(스크린 앞에서 변사가 대사를 실시간으로 읊었다), 오래된 상영관들은 피카디리극장, 대한극장처럼 극장이라는 이름을 썼다. 그러나 CGV, 롯데시네마 같은 현대적인 멀티플렉스는 영화관이라 불러야 한다. 미국이든 영국이든 독일이든 프랑스든 영화관에서 연극을 공연하지 않고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하지 않는다. 극장과 영화관은 명백하게 구분된다.

서론이 길었다. 장항준 감독이 언론 인터뷰에서 해외 관람객들의 반응을 전했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에서 왜 수백 년 전 왕조 시대의 권력 찬탈과 비극에 이토록 열광하고 공감하는지 신기해한다고. 또한 한국 관객들은 단종 서사에서 12・12사태를 다룬 ‘서울의 봄’을 떠올리고, 권력을 찬탈당하고 정의가 패배하는 비극이 아주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라고 느끼며, 엄흥도처럼 자신의 안위를 뒤로하고 옳은 일을 하는 인물에게 깊이 공감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일찍 영화관에 도착한 나는 맨 뒷자리에 앉아서 계단을 올라오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젊은 사람이 많았다. ‘왕과 사는 남자’의 관람객을 세대별로 분류하면 3월 11일까지 20・30세대가 46%, ‘서울의 봄’을 관람한 20・30세대는 56%로 734만 명이라고 한다. 이 수치는 20・30세대가 정치에 무관심하고 이기적이라는 세평을 뒤집는다. 가슴이 그들을 영화관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하니 정말 기쁘다. 임진왜란 때도,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도, 의병이라는 이름의 군대가 있었다. 국가가 아무런 보상을 해 주지 않을 줄 알면서도 의병들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대한민국은 가슴으로 애국하는 조상을 가진 나라다. 우리 민족의 DNA에는 실리를 따지지 않는 뜨거운 애국심이 뿌리박혀 있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계엄을 실패로 만든 장본인은 시민들이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국회의사당으로 달려가서 총을 든 군인들과 맞섰다. 열정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나온다. 가슴은 위험의 강도나 정도를 분석하지 않는다. 끌리는 대로 행동하게 만든다. 왜곡된 사실을 보도하는 장문의 기사보다 한 편의 영화가 끼치는 영향이 더 큰 이유다. 영화는 감성에 호소하는 예술이다. 피 안에 흐르는 정의를 향한 뜨거운 열정이 젊은이들을 영화관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서울의 봄’ 1,312만 명, ‘왕과 사는 남자’가 개봉 36일 만에 1,200만 명을 돌파한 이유를 찾기 어렵다.

‘왕과 사는 남자’가 여전히 상영 중이므로 최종 관람객 수가 얼마나 될지 아직 모른다. 명량의 1,761만 명을 넘기를 바라지만 넘지 못해도 상관없다. 우리 젊은이들의 가슴에 옳은 일을 하는 인물에게 깊이 공감하는 능력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영화니까 그런 거 아니냐고. 그들은 게임처럼 영화를 소비하는 것뿐이라고. 틀렸다. 2025년 20대와 30대가 전체 도서 구매자 내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약 40%였다고 한다. 영화라서 많이 본 게 아니라 그 어떤 세대보다 정의롭고 어떤 세대보다 지성적인 세대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에게서 희망을 본다. 미국・이란 전쟁이 진행 중이고 세상은 불확실성으로 가득하지만 나는 우리 젊은이들이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들어 갈 거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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