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서를 쓰다
공부가 하고 싶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아버지는 보기 좋게 지인에게 사기를 당했고, 나는 원서대금조차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아무것도 없었다. 엄마는 한마디 말조차 없었다. 이불보따리 하나를 들고, 할머니네로 갔다. 싸늘한 시선, 쯧쯧 혀 차는 소리가 꼭꼭 문을 닫아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덜컥, 결혼해 버렸다. 어쩌면 나는 집을 탈출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공부를 할 거야. 대학 졸업장 하나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취직이 졸업장 하나면 바로 되는 줄 알았다. 어쩌면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컸는지도 몰랐다.
아이가 태어나고, 방송대에 지원서를 냈다. '국문학과' 음, 뽀대 났다. 괜찮은 걸? 기분만 좋았다. 시험과 출석수업엔 늘 집안일이 겹쳐 빠지기 일쑤였다. 당연히 계속할 수 없었고, 휴학이라는 위안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게 십여 년이 지나버렸다.
하나 둘 공부를 하기 위해 집을 떠나는 아이들을 배웅하면서 집 안이 조용해졌다. 그제야 공부하고 싶은 욕구가 솟았다. 열심히 공부했다. 머리가 따라주지 않아 밤을 새워서 시험준비를 하면서도 즐거웠다. 드디어, 대학 졸업장을 받게 되었다. 그날은 온 세상이 반짝였다.
그리고 직장도 다니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더구나 내가 스스로 번 돈은 자신감과 꿈을 가지게 했다. 남편이 직장에 다니고 있었지만, 늘 위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던 지난날이었다. 그런데, 그 즐겁고 꿈을 마구마구 만들어가고 있던 즈음에 나는 암, 유방암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임파선으로 전이가 되어 암덩어리의 크기가 커서 사전 항암에 들어갔다. 8차, 3주마다 피를 뽑고 백혈구 수치의 정상을 확인한 후에 항암주사는 허락이 되었다. 그리고 수술이 시작되었다. 눈을 뜨니 여섯 개의 피주머니가 잠자는 동안 이루어진 수술의 결과를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것이다. 피주머니가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퇴원 날짜는 가까워 오고 있었고, 나는 두어 달을 입원해 있는 동안 삶의 방향을 만들게 되었다.
'나를 위해서 살자. 우선은.'
속으로만 삼키고, 돌아서서 눈물짓고, 밤마다 일기장에는 말 못 했던 언어들이 가득가득 쌓였다. 퇴원하고 반년이 지난날, 나는 대학원에 지원서를 냈다. '한국사' 과정에. 평소에 역사를 좋아했던 나를 떠올리며, 박물관을 즐겨 찾았던 때를 기억하며 덜컥.
'즐겁게 공부해야지~.'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그런데, 면접에서부터 뒤틀리기 시작했다. 왜 한국사를 찾아왔냐, 관심이 가는 시대는 언제이며 설명할 수 있느냐, 덜덜덜 떨다가 면접실을 나온 뒤에 주저앉아버렸다. 아, 나는 바보다. 그런데 합격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가능성에 기대를 한다는 말과 함께.
스무 살의 파릇파릇한 아이들과 함께 설렘이 시작되었다. 교정은 늘 활기찼고, 이리저리 다니며 학교를 구경하는 일은 즐거웠다. 그러나 논문 발제부터 시작해 과제물은 나의 잠을 뺏어 버렸다. 미인은 아니지만, 저녁 아홉 시부터는 잠자는 시간이었는데, 새벽 한 시를 훌쩍 넘기기가 일쑤였다.
발제문은 버거웠지만, 한자가 틀려서 혼나고, 늘 한 템포 늦어서 민망하기도 했지만, 졸업을 하게 되었다. 아니, 수료를 했다. 논문을 쓰지 않았으니. 그래도 많이 배웠고, 좀 더 공부해야겠다는(스스로) 생각을 가진 것이 큰 수확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