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의 소통

by 검둥새

세미나를 하나 진행하게 되었다.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공부하고, 자료를 만들고, 발표 연습도 했다. 같이 진행하는 후배와 짬을 내어 만나고, 회의실을 빌려 아이디어를 주고받고, 발표 흐름을 다듬었다. 후배는 세미나에 대해 이런저런 불안을 털어놓았다. 나는 괜한 걱정이라고 웃어넘겼다. 준비도 많이 했고 자신감도 충만했다. 후배에게 걱정할 시간에 발표 준비나 더하라고 핀잔을 주었다.

세미나는 취소되었다. 예상치 못한 이슈로 인해 참석자들의 일정이 모두 꼬여버렸다. 세미나에 참석 가능한 사람은 소수였고, 결국 취소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후배를 다독이면서 생각했다. 역시 생각대로 되는 게 없구나. 허탈했다. 사실 이 허탈함은 단순히 일이 틀어진 데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세워놓은 '이상적인 그림'이 무너지는 것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이었다.


이상적인 그림 속의 나는 완벽했다. 깔끔하게 설명하고, 질문에 막힘없으며, 진행은 매끄럽다. 나는 이러한 그림을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을 기반으로 한 자신감도 갖췄다. 하지만 현실은 그림이 펼쳐질 조건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허탈함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비롯된 고통이었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느끼는 고통. 이러한 고통이 발생하는 이유는 이상에 대한 나의 집착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고통을 단순히 육체적 아픔이나 불행이 아니라, '뜻대로 되지 않음(dukkha)'이라 말한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

그 뜻대로 되지 않음을 견디지 못할 때 우리는 괴로워한다.

"태어남도 괴로움이요, 늙음도 괴로움이며, 사랑하는 이와 헤어짐도 괴로움이다."

불교의 이 말은 세상이 본질적으로 고통스럽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것은 변하고, 그 변화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 괴로움이 생긴다는 뜻이다. 즉, 무엇이 되려 한다는 생각이 집착이고, 그 생각이 깨져 느끼는 불편함이 바로 고통이다. 고통은 언제나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내가 세운 이상적인 그림이 무너질 때 느끼는 불편함은, 결국 그 이상에 매달려 있던 나의 마음이 만든 고통이다.


“이건 이렇게 되어야 한다”, “이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고정된 생각, 즉 현실을 하나의 형태로 가두려는 마음이 집착이다. 집착은 세상을 ‘내 기준의 세계’로 축소시킨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기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조건이 변하면 결과도 변하고, 인연이 달라지면 관계도 달라진다. 그럼에도 나는 변하지 않는 결과를 붙잡으려 했다.

그때 이미 고통은 시작되고 있었다.


불교는 말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바로 연기(緣起)의 가르침이다.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서로의 조건이 되어 잠시 머물 뿐이다. 세미나 연습을 진행하며 마신 커피 한잔조차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커피콩을 재배한 농부, 원두를 볶은 사람, 운송을 맡은 기사, 컵을 만든 공장, 그리고 그것을 마시는 나. 그 수많은 인연이 한자리에 모여야 커피 한 잔이 비로소 생겨난다. 내가 세미나를 준비한 일도, 후배와 나눈 대화도, 그날 느낀 허탈함도, 모두 다른 조건들이 얽혀 만들어낸 잠정적인 장면이었다. 그중 하나라도 달라졌다면, 나의 감정과 생각 역시 전혀 다른 것이 되었을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그렇게 조건 위에서 일어난다.


나는 그 조건들의 얽힘을 보지 못했다. 결과만을 바라보며 “이래야만 한다”라고 집착했다. 세상은 늘 변화하고, 인연은 늘 흘러가는데 그 흐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고정된 이상 속에 나를 가두었던 것이다. 결국 고통이란, 세상이 변하는 방식과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충돌할 때 생기는 마찰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존재인가. 연기의 관점에서 보면, 나 역시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상황이 바뀌면 감정이 바뀌고, 인연이 달라지면 내가 달라진다. 기뻐하는 나, 실망하는 나, 후회하는 나, 그 모든 나는 조건의 그물 속에서 잠시 드러나는 하나의 모습일 뿐이다. 이 사실을 이해하면, 고통은 사라지지 않아도 고통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다.

‘이상적인 나’와 ‘실망한 나’ 중 어느 쪽도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기의 관점에서 보면, '이상적인 나’도, ‘실망한 나’도, 모두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만 존재하는 임시의 모습이다. 조건이 바뀌면 감정도, 생각도, 나의 정체성마저 바뀐다. 그렇다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조건을 탓하거나 결과를 붙잡는 데 있지 않다. 그저 지금의 조건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달라지는 나를 바라보는 데 있다. 그것이 불교가 말하는 통찰의 시작이고, 나에게는 ‘나와의 소통’의 첫걸음이었다.


결국 불교가 말하는 해탈은 세상을 벗어나는 일이 아니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일이다. 고정된 기대를 내려놓고, 조건의 흐름을 바라보는 일. 그 흐름 속에서 나는 조금씩 자유로워진다. 세상은 내 뜻대로 되지 않지만, 그 뜻대로 되지 않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세상과, 그리고 나 자신과 소통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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