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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상순 Nov 14. 2023

쌍코피와 맞바꾼 레벨 2

-프리다이빙 레벨업 테스트

역시나 잠을 설쳤다. 개방수역 테스트를 위한 풀장은 수도권에 있었다. 내비게이션에 의하면 3시간 15분쯤 걸리는 거리였지만 초행길이었고 테스트를 앞둔 터였다. 시간에 쫓기지 않아야 긴장을 덜 수 있다. 조금 더 일찌감치 길을 나서는 편이 낫다. 


밤새 기온이 곤두박질친 탓일까. 공기압 램프가 떴다. 오전 7시가 조금 지난 시간, 문을 연 정비소가 있을 리 만무했다. 고속도로 휴게소의 타이어 공기 주입기를 떠올렸지만 조작법을 모르니 허둥댈 게 분명했다. 다행히 네 개의 타이어 모두 평균적으로 공기압이 낮은 상황이었다. 차가 한쪽으로 쏠릴 위험은 없었다. 일단 주행을 해보기로 했다.   


주행을 시작하니 공기압이 약간씩 올라갔다. 점차 중천으로 떠오르는 태양도 기압을 올리는 데 한몫했다. 그래도 노란 램프와 네 개의 바퀴를 차례로 가리키며 기압이 낮음을 '경고'하는 경고등의 점멸은 몹시 신경이 쓰였다. 과속하지 않으면서 앞으로 가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테스트를 함께 치르는 다른 교육생 및 강사들과 단체출발을 하지 않고 개인출발을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낯선 이들과 왕복 6시간을 함께 하는 자리, 오십이 넘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런 자리가 힘들다. 좋게 말하면 남들을 배려하는 거고, 시니컬하게 표현하면 남들 신경 쓰느라 내 페이스를 잃을 게 뻔했다. 차라리 초행길 운전 스트레스를 감당하는 것이 나았다. 적어도 그 길엔 내가 좋아하는 음악과 내게 익숙한 속도가 있으니까.


용인에 접어들어 잠깐 헤맸지만 대체로 딥스테이션으로 가는 길은 편안했다. 길을 잃으니 공기압 램프 따위는 아예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길을 찾는 게 더 상위의 목표가 되었으니 말이다. 딥스테이션에 도착하자 돌아갈 길을 지운 사람처럼 내 존재의 쓸모는 새로운 수심에 적응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정말이지 공기압 램프는 수심 테스트를 마치고, 2층 야외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수고했다는 인사를 주고받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내 머릿속을 차지하지 못했다. 모두와 헤어져 시동을 건 순간, 그때 점멸하는 경고등을 봤다. 마치 처음인 것처럼. 


물이 너무 따뜻했다. 슈트를 입는 동안 땀이 날 만큼 따뜻했다. 일부러 슈트를 천천히 입고 다른 사람들보다 약간 뒤에 물러서서 한 박자 늦게 핀을 신고, 마스크를 쓰고, 스노클을 물었다. K강사는 레벨 테스트 보러 간다는 내게 '무조건 릴랙스'라는 문구를 선물했다. '릴랙스가 깨지면 이퀄도 안 된다'는 문장을 가슴에 새겨야 했다. 평가관님을 따라 수심 15미터 풀로 향했다. 먼저 프리이멀전으로 이퀄을 체크하기로 했다. 첫 번째 시도, 9미터에서 귀가 뻥 뚫리는 느낌이 오지 않아 턴. 2번째 시도 10미터에서 턴. 세이프티를 맡아주신 강사님의 조언대로 해드퍼스트가 아닌 풋퍼스트로 내려가 다시 이퀄을 체크하기로 했다. 확실히 다르다. 5미터 풀에선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압력이 있다. 낯선 기운이 감지되니 긴장감이 몰려왔다. 프리이멀전으로 이퀄이 잘 안 되는데 CWT를 할 수 있을까. 5미터 풀에선 이퀄 때문에 애 먹은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할 수 있을까. CWT로 12미터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캔디볼을 잡고 턴 한 후 상승해야 테스트에 통과할 수 있는데, 그게 오늘 내가 상상한 그림인데 할 수 있을까. 


"이퀄을 뻥, 뻥 이렇게 하지 말고 뻐어어어어어어엉, 다시 공기 모았다가 뻐어어어어어어엉 이렇게 길게 합니다. 이퀄하는 동안 피닝 부지런히 하고요."


평가관님의 조언을 듣고 입수 준비를 했다.  K강사 말하길, 이퀄만 잘 되면 다른 동작들은 몸이 다 기억할 테니 걱정 말라고. 그래, 또 해볼밖에. 하지만 주말 딥스는 만원이었고 입수하려는 다이버와 부이에서 대기 중인 다이버의 핀들이 서로 부딪치기 일쑤였다. 남부대 풀장에서 어떤 다이버의 방해도 받지 않으면서 입수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게다가 입수 전 릴랙스에 시간을 많이 쓰는 나로선 보통 신경이 쓰이는 상황이 아니었다. 다행히 다이버들과 부딪히지 않는 방향으로 입수했고 평가관님의 조언대로 이퀄을 길게 했다. 한번 이퀄하는 동안 네 번 정도 피닝을 한 것 같다. 그렇게 내려오다 보니 어느덧 캔디볼이 눈앞에 있었다. K강사와 밥먹듯이 연습했던 턴 동작을 시전할 차례였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터닝 한 다음 이퀄을 하던 손으로 유도줄을 잡아당긴 후 피닝하면서 상승했다. 수면 가까이 오니 수심과는 다른 소리가 나기에 한 손을 뻗어 부이를 찾았다. 성공이었다. 잘했다는 칭찬도 받았다. 하강 시 배를 접는 기분으로 조금 더 릴랙스 하고 올라올 때도 마찬가지로 자세를 잡으라는 조언을 받았다. 이땐 몰랐지만 이것으로 CWT 테스트는 이미 통과를 한 터였다. 


다음은 레스큐. 수심  5~10미터에서 익수자를 구조하는 테스트다. 익수자 역할을 맡아 입수하는 순간 핀이 다른 다이버와 부딪혔고 이때부터 계속 릴랙스가 깨졌던 것 같다. 릴랙스가 깨지니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덕다이빙 자세마저 흐트러졌다. 유도줄과 멀어져 겨우 손을 뻗어 줄을 잡은 채로 익수자 역할을 수행했다.  몸의 발란스가 깨진 상태에서 구조자 역할을 해야 했는데, 나는 늘 구조자 역할을 맡았을 때 마음이 급해지곤 했다. 이전에 익수자 역할을 맡았을 때 구조자 역할을 맡은 다이버가 동반 입수를 하지 않고 텀을 길게 두고 입수한 덕에 숨이 막혀 애를 먹은 적이 있다. 아마도 이 경험 때문에 익수자 역할을 하는 분을 배려해야 한다는 마음이 생긴 것 같고 그 배려가 나를 배려하지 못하게 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수심에서 충분히 릴랙스와 이퀄을 하지 못한 채로 구조를 위해 입수하고 마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 테스트에서는 익수자가 10미터를 넘겨 12미터까지 하강하는 바람에 더 애를 먹었다. 하지만 내가 이퀄이 충분히 잘 된 상태였다면 이것도 별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평가관님은 나의 세이프티를 맡은 강사님을 호되게 질책했다. 구조자를 10미터 밑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했어야 했고, 쌍방 간에 이퀄 상태를 살피면서 테스트를 진행해야 했다면서. 나는 첫 번째 구조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했다. 코피가 터졌기 때문이다. 


턱과 이마에 엄청난 압력이 느껴졌고 코의 느낌도 기이했다. 부이를 잡자마자 평가관님은 나를 풀장 구석으로 데려갔고 자신의 눈을 보라고 했다. 하얀 마스크 안쪽에 핏물이 고여 있었다. 마스크를 벗고 입과 코를 물에 담근 채로 가볍게 공기를 뿜어 피를 뺐다. 나 이외의 세 명의 교육생은 모두 테스트를 통과했지만 나는 코 안쪽이 마를 때까지 30분을 대기해야 했다. 평가관님은 아직 시간 여유가 많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위로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뭔가를 망쳤다는 기분이 들었다. 릴랙스가 깨졌고 좁은 공간에서 덕다이빙이 원활하지 않았고 입수직전 이퀄을 안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처음부터 루틴을 다시 돌리기도 했다. 다른 교육생들이 수심 10미터 버디 되어보기, 15미터 이상 수심 타기 등을 시도하는 동안 나는 창가 가까이 앉아 핀을 벗고 코가 마르길 기다려야 했다. 내가 망친 건 내가 상상한 그림이었다. 처음에 성공했던 CWT처럼 레스큐도 멋들어지게 통과하는 것. 익수자의 뒤통수와 턱을 잡고 손을 쭉 뻗어 수심으로 나와 BTT와 구조호흡을 깔끔하게 해내는 것. 그것이 내가 미리 그렸던 그림이었다. 


30분 후 실시한 레스큐 테스트에 통과했지만 또 피가 났다. 평가관님은 출수를 명령했다. 한번  코피가 나기 시작하면 이퀄은 절대 해서는 안된다고, 피가 귀로 흘러 중이염을 유발할 수 있고, 중이염은 한 달 이상 고생(=다이빙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내 표정이 너무 측은했던 것일까. 평가관은 지정된 출수 시간 직전에 한번 더 수심을 타 보자고 제안했다.  나는 또 콧 속이 마르길 기다리면서 30분을 기다렸다. 출수 예정 시간 10분 전, 평가관님은 나를 부이가 아닌 딥스의 바오밥 나무 앞으로 데려갔다. 이 나무가 유도줄이라 여기고 입수해 보라고 했다. 귀는 아프지 않았고 나는 바오밥 나무의 뿌리를 가만히 만진 후 올라왔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5미터 수심과 15미터 수심은 달라도 많이 달랐다. 5미터 수심에선 이퀄이 충분하지 않아도 버틸 수 있었지만 15미터 수심에선 어정쩡한 이퀄로는 수압을 이겨낼 수 없었다. 그 세계를 환대하는 방법을 나는 아직 잘 모른다. 다만 딥스에서의 첫 CWT, 안단테와 같았던 이퀄과 그 평온함을 지지해 주던 힘찬 피닝의 감각만이 살아있다. 그 감각을 고집하진 않겠지만 기억하고 싶다. 헛된 그림을 그렸다고 자책하지 않고 그 순간 누렸던 충만함, 하강과 상승의 완벽한 발란스가 선사했던 평온을 잘 가꿔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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