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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가의 나라 May 21. 2021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 기록인의 나 홀로 선언

Bravo My Life!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남들은 꿈이 없어서 걱정이라 하지만 나는 꿈이 늘 있었고, 자주 바뀌었다. 초등학교 때는 가수가 되고 싶었다. 언니들은 그런 내게 “너는 노래를 못 부르는데 왜 가수가 되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 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가수가 되고 싶어, 시도 때도 없이 집에서 노래를 불렀고(내 소리를 듣고 건너 건너 건너 아랫집에 살던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가신 언니분이 올라오셔서 씩 웃으며 “누가 노래 부르는가 했다”라고 할 정도로 목청은 컸다), 학교에서는 공부하기 싫은 시간이 되면 선생님들은 나를 불러서 노래를 시켰고 나는 “열심히” 불렀다. 당시 내 친구들은 내 수준인지 모르겠지만 내게 노래 잘 부른다고 했고, 나는 언니들보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믿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노래를 부르면서 가수를 꿈꿨다. (참고로 전국 노래자랑 등에 기회가 되면 나간 흑역사도 있다) 아니, 대학교 진학 후 여성 락밴드 동아리 오디션에 지원했다가(보컬) 탈락할 때까지 가수를 꿈꿨다. 그 이후에 나는 가수의 꿈을 접었다. 이유는 내가 못해서가 아니다. 같이 지원한 보컬들이 내가 생각해도, 나보다 잘 불러서 우물 안 개구리를 실감했다고 해야 하나?


  그러나 동아리 오디션 탈락 후 전화가 왔는데 선배들이 보기에 나는 보컬보다는 드럼을 치면 잘 칠 것 같다고 했다. 그 당시 나는 급한 데로 고등학교 말년에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한 덕에 “몸무게 10kg 증가”라는 보상을 받았는데, 키도 컸는데 몸까지 커지니 여성 락밴드에 “딱” 어울릴만한 모습이었다. 고민하다가 그거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락밴드에 들어갔는데 또 드럼이 재미있었다. 어릴 때 피아노 학원을 다니고 싶었으나 아무도 보내주지 않았고, 보내줄 여력도 없던 내게 음악을 배우게 해 줬고 다양한 악기들 틈에서 늘 우뚝 서있는 드럼에 앉아있는 내 모습이 나는 좋았다. 그때부터 드러머의 꿈을 꾸게 되었는데 뭔가를 하면 워낙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라 또 누구보다 열심히 드럼을 배웠고 연주했다. 누가 봐도 드러머적인 외모로(당시 유행하던 호랑이 얼굴이 크게 새겨진 옷을 입고), 드럼을 연주하고 다녔는데 공연이 있을 때 청중으로부터 오는 환호는 내가 가수가 되었을 때 받았을법한 것과 유사했을 것이다. 약 6년 정도 드럼을 연주했는데, 결정적으로 드러머의 꿈을 접은 것은 드럼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상경해 대학을 진학한 친구의 드럼 솜씨와 열정을 보면서 그까지 할 수 없었던(당시 부모님의 취직에 대한 당부 등) 내 상황을 본 뒤에다.


  그 외에도 검도, 테니스, 피아노를 배우면서 늘 취미보다는 업이 되는 상상을 하곤 했고 대학교 때 나간 학생회장 선거를 통해 정치인을 꿈꾸기도 했다. 늘 나의 상상은 어떤 일을 하든 그 자리의 정상에 서있었으며 그것을 위해 노력했다. 대충이 아니라 “열심히” 무언가를 했다.

  다행히 부모님의 바람대로 먹고살 수 있는 공무원이 되었는데, 개인적으로 공무원이 될 때에도 낮에는 참한 공무원으로 밤에는 재즈바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고 공무원이 된 후 일상적으로 읽던 책이 나를 위로해줄 때 나는 또 작가를 꿈꾸고, 결국 그 꿈을 이뤘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 이야기를 왜 할까?

  책을 출간하고, 글 쓰는 것도 나름 인정받았는데 지금 나의 글쓰기 상태가  중구난방으로, 그동안의 수많은 꿈들을 위해 "노력한" 그때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신문사 기고, 브런치 게시  혹은 논문형식으로 전문가 집단에 글을 내고 싶다는 생각에 어느 곳에도 어울리지 않는 완결되지 못하고 목적성을 잃은  글을 지난 3주 동안 써대고 있는 나를 보니 한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공공기록은 왜 중요한가?”라는 주제에 요즘 혹한 문익점 선생님 내용을 억지로 끼어넣다 보니 신문에도 브런치에도 낼 수 없는 글이 되었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해 기록관을 상상해보다”라는 글을 썼는데 신문사에 내기도, 전문가 집단에 내기도 애매한 글이 되었다.


  망친 글을 들고 있는데, 내 사주가 생각났다. “이것저것 하지 말고 한 우물만 파라”는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

  지금껏 내 인생을 돌아보면 내가 만약 한 가지에만 몰두했다면 나는 누구보다 먼저 정상에 올랐을 것이다. “무식한 놈이 용감하다 “라는 말을 싫어하지 않는 나는 ”노력“을 누구보다 귀중하게 생각해 무식해 보일 만큼 무던하게 노력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게  많은 나는 꿈을 바꾸곤 했는데 유일하게 오랜 시간 바꾸지 않, 생활의 일부였던 글쓰기에서 또 분야가 나눠져서 갈팡질팡하니 기가 찰 노릇인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쓴 이유는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선언한 것이다.(아무도 관심 없을지라도) 이제 브런치에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할 것이다. 내가 이때까지 걸어온 많은 꿈들은 글쓰기를 위한 방편이며 나도 박경리 선생님의 그림자라도 쫓아가는 사람이 될 것이다.(또 나는 정상을 상상하고 꿈꾼다. 이건 이제 나도 못 말린다.)

  이제는 집중하려고 한다.

  “공공기록은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를 계속적으로 연재하고 덧붙여 살아가는 이야기도 쓰려고 한다. 글쓰기를 통해 인생을 정리하는 형편이니 내 인생의 요소요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누구와도 소통 가능하도록 쉽고 즐겁게 쓸 것이다.

 이렇게 글을 쓰니 또 정리가 된다. 내 등을 토닥토닥해주고 싶다. 또한 나는 늘 그러하듯이 잘할 거라고라도 말해주고 싶다.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 내 인생에게 감사하고 수고한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목표를 정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또 "열심히" 길을 가련다. 오늘도 참 좋다.

  Bravo My Life!  

가끔 아프고 복잡하고 슬픈 그런날이 와도,
다시 열심히 즐겁게 시작해보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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