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인정하는 공식적인 '이상한 애'가 있었다. 하필 그 애가 내가 일하는 곳에서 같이(아주 가까이) 일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싸늘하긴 했다. 말이 없었고 일을 잘하지 못했다. 세간에 뿌려진 '이상한 행동'은 내가 없는 동안 한다고 했다. 나는 그 실체를 알지는 못했지만 오래된 동료로부터 들은 소식을 믿었다. 그는 할 수 있는 일만큼 했다. 아주 적은 양의 일이었다. 또한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으며 일이 조금만이라도 많아지면 괴로워했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이상행동(왔다 갔다 하기, 뭔가를 끊임없이 먹기, 얼굴을 쓸어내리기, 이상한 소리 내기 등등)을 지속했다. 가끔은 불쌍했고 가끔은 화가 났다. 나는 그 사람을 어르고 달래고 화내고 사정도 하면서 그를 이끌어가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물론 일이 많아지면 나는 그에게 해야 할 일을 적어주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게 했고 할 수 없는 일은 내가 했다. 그러나 아무리 시켜도 기한 내 끝내지 못했고 일이 복잡해질 만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결국 그 기한 전에 나 혼자 부랴부랴 그 일을 끝내야 했다.
그러나 그나마 다행인 건 반항하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예의가 없거나 하지는 않았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네'(물론 대답만 그러했다) 했고 노력하려고 애쓰는 모습도 보았다. 다른 사람들 있는 곳에서 한다는 그 이상한 행동도 나는 보지 못했다. 그저 믿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다는 사실을,
나는 그가 ADHA로 보았다. 전형적인 그런 모습이었다. 공부는 잘하는 것 같았지만 사는 내내 인간관계의 어려움이 있었으리라 본다. 그는 대화를 하려고 노력 하긴 했으나 방법을 몰랐다. 그냥 얼어버리는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그를 조금 불쌍히 여겼다. 남들이 그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도 '예전보다 나아졌다' '내 앞에서는 그러지 않는다' 정도로 옹호해 줬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내게 하는 말이 '정들었네'였다.
처음에는 그저 웃었지만 그 말을 곰곰이 되새기니 내가 아주 그런 부류(이상한 걸 하는 소문이 있는, 일도 못하고 안 하는 등)의 동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소 끼리끼리 논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 사람 가려가며 살았다. 그 와중에 그런 말과 생각은 내 옷에 묻은 오물처럼 느껴졌다. 아주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일을 잘하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매우 화가 났다. 나의 일과 더불어 그의 일까지 해야 했었다. 그러니 더 화가 났다. 이런 사람을 내가 불쌍히 여겼다니, 이런 사람과 동류로 취급받다니...
나는 그전보다 더 그를 불평했다. 나는 그와 정들지 않았고 나는 그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만인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를 다른 곳을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결국 그는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다.
환호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사람은 갔는데 올 사람이 없었다. 사람 하나가 있었지만 그는 그 보다 더 일이 안 되는 사람이었다.
멘붕이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집으로 돌아가 생각했다. 그동안 나의 불평들을, 나는 늘 불평했다. "사람이 이상하다, 더 좋은 사람을 보내달라." 그리고 또 불평했다. 그러나 바뀔 때마다 더 좋지 않은 사람들로 바뀌어져 갔다. 지금은 그중에 가장 최악인 상황이었다. 아예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쌓아 올린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예수님이 생각났다.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의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9장 9~13절
예수님은 신이니까 이럴 수 있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내가 예수님을 믿는 궁극적인 마음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일진대, 나는 44년을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 사람이었다. 혈우병을 가진 여인처럼 예수님의 옷깃만 만져도 병이 나을진대, 나는 예수님의 발끝에 손 하나 얹지 못하고 44년을 살아온 것이다. 그냥 상식적인 선에서 판단하고 행동하고 미워하고 기뻐했다. 그 '상식'이라는 틀 안에서 나의 슬기로움을 자랑했고 나의 능력을 과신했다. 나는 나름 인정받는 사람이었고 뭘 하든지 정확하고 신속했다. 자신감은 높았고 자존감 또한 굉장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의 이 강점은 아무도 나를 건드릴 수 없는 무기가 되었다. 상식적이지 못한 행위 앞에서는 누구든지 말로 이길 수 있었고 옳지 않은 일이면 상사라도 고언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상식을 중요하게 여겼고 나의 바른(?), 바르다고 생각한 품성을 좋아했다. 때때로 어려움이 있어도 힘써 잘 이겨냈고 막아내고 일어났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을 배우지는 못했다. 다만 오랜 시간 교회를 다녀 아는 것이 많아, 어떤 당황한 사건들이 일어나면 성경에서 본 예수님이 생각이 났다.
그러나 나의 예수님은 나와 달랐다. 현실적으로도 강한 자보다 약한 자 그리고 죄인들을 살피셨고 많은 권력과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미워하는 누군가를 가차 없이 처단(?) 하지 않았다. 누구나 미워할 수 있는 죄인들과 어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셨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살 수 있었음에도 죽으셨다는 것이다. 3일 내내 많은 사람들의 희롱과 욕설과 저주를 온몸에 끌어안으시고 그들을 위해 우셨다는 것이다.
나는 이 예수를 믿었지만 현실에서는 예수가 없었다. 오로지 나만 있었다.
아주 적은 모욕도 감내하지 못했으며 내가 보지 못한 소문에 의거한 일들마저 그 사람이라 단정하고, 함께하기를 거부한 것도 모질라 불쾌해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보다 단정해야 했고 강해야 했고 멋져야 했다. 어떤 오물도 용납되지 못했다. 나는 딱 그만큼의 사람이었다. 내가 세상에서 비난하고 비판했던 그 사람들과 비슷한, 크게 경중의 차이가 없는 사람인 것이다.
무엇이 나를 그리 잘나게 생각했을까?
성경을 눈으로만 보았기 때문이다.
내게 신은 그저 위로였고 현실에서 이루기 힘든 것들의 소원성취의 방편일 따름이었고, 습관이었고, 두려움이었고 알 수 없는 미래를 대비하는 도구였고, 죽은 뒤에도 천국 가겠다는 욕심이었다.
신은 내 삶을 윤택하게 해줘야 하는 대상일 뿐이었다.
나의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나의 부족함을 깊이 느꼈다. 나는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대단하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안된다 할 때,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멀리할 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자세이며, 내 손을 펴서 약자를, 나를 비난한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자신은 없다. 하나를 깨우쳤다고 예수의 발뒤꿈치조차 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는 알았다. 나의 모든 생활에 예수는 있었고 나는 그 예수를 이제 계속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내게 행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본다. '가장 작은 자' 현실에서 마주친 가장 작은 자(약한 자, 병든 자, 더러운 자, 못된 자, 불평하는 자, 미워하는 자, 슬퍼하는 자 등)는 어디에서든 있다.
나는 그 작은 자들을 이제 예수님으로 봐야 할 것 같은 자신 없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감사'라는 것은 어떤 순간에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매 순간 감사할 일들은 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나의 더 큰 욕심으로 몰랐을 뿐이다. 태양이 늘 거기에 있지만 구름이 가리면 볼 수 없듯이 나의 욕심의 구름들로 인해 보지 못한 태양과 같은 감사를, 보이지 않는 '어떤 순간에도' 해야겠다는 다짐 또한 드는 날들이다.
나는 눈으로 읽은 예수를 마음으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