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받은 학점 'C0'는 영광이었다.

타인의 생각을 존중할 수 있는 태도는 서울대를 나온 것 보다 낫다.

by 주주서인

그는 나름 유명한 교수였다. 나는 어린 시절 그의 책을 읽었었고, 그에게 한번 배워보고 싶었다.

나는 그가 재직한 학교를 다니지 않았지만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와 학점교류가 허용되어 그의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똑똑한 사람, 좋은 책을 쓰고 유명한 대학을 나온 사람을 만나볼 생각에 신났었다. 그러나 첫 수업만에 그 신남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본인 자랑과 본인과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내게 다른 수업을 듣도록 권고한 사건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하루 만에 내가 그동안 그에게 가졌던 마음이 사그라 들 수는 없었다. 차차 알아가면서 내가 품었던 그 좋았던 마음들이 살아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교수님 수업을 들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첫인상을 잘 믿지 않는다. 사람을 오래 봐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그 첫인상은 그의 모든 것이었다. 동영상 수업을 듣는 것이 오히려 그가 주장하는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정도였다. 우리에게 있어 승리의 역사만 좋은 것이 아니라, 어둠의 역사, 즉 마이너스 헤리티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해 주어 배울만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49와 51의 차이라고 할까? 공정한 듯 보이면서 치우치는 듯한 그의 말과 행동들은 내게 의문을 품게 했다. 오히려 그 '공정한 듯'보이는 말들은 그의 치우친 주장을 강화하기 위한 은폐물 같아 보일 정도였다.

그의 수업에 대해 내가 제출한 의견은 다음과 같다.


그는 김구의 잘 못된 점을 지적했다. 김구의 신화를 넘어야 한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구는 젊은 시절 잘못을 많이 했다. (일본사람을 죽이고, 과거시험을 대리시험으로 치르는 등) 그 외에도 그는 김구의 잘못된 점에 대해 많은 지적을 했다. 나는 이 수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평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인들(마하트마 간디, 링컨, 세종대왕 등)을 통해 위대한 사람이 완벽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에게 완벽을 요구하는 건 맞지 않다. 각자의 소양대로, 깊이대로 사는 것이다. 민족의 위대한 영웅도 시작은 개인적 야망이었다..... (중략) 그가 완전무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분을 존경한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백범에게 가진 호감의 핵심은 우리 민족이 독립된 나라에서 아름답게 잘 살기를 바랐던 그분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비록 백범이 가진 옳지 않은 선택들이 있을지라도 통일된 나라에서 대한민국 사람들이 아름답게 사는 것을 바랐고 평생을 그런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는 것은 기려야 할 당연한 일이다....(중략) 평생을 스스로가 아닌 조국을 위해 헌신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단순히 성공만 바라는 사람이었다면 친일파로 살아도 가능했을 것이다."


안중근에게 보낸 조 마리의 편지에 대해 그는 언론에 나오는 사실들이 과장되고 윤색되었다고 말하며 그의 논문을 읽게 했다. 또한 그의 논문을 읽기 전 언론에 나오는 것을 보고 생각을 쓰고, 그 후 그의 논문을 읽은 후 생각을 쓰게 하는 과제를 냈다. 이 과제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어머니 조 마리의 편지에 윤색된 혹은 과장된 사실이 있을지라도 다음과 같은 면에서 남겨진 기록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아들 안중근을 사랑하는 마음, #나라를 위하는 마음 #독립을 위한 마음...(중략) '호의를 지닌 주제일수록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려는 엄정성, 애국적 주제일수록 비판적 사유가 허용되는 학문적 개방성이 견실하게 확보되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안중근’ ‘조마리아’에 대한 호의를 가진 사람으로, 실제 그 왜곡이라는 문장과 신문기사를 대입해 봤을 때 그 의미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본다....(중략) 또한 수의를 지어 보낸 것과 구입한 것은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수의를 보냈다'라는 뜻에서 일맥상통하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자식을 위해 옷을 지어 입히기도 하지만 사서 입히기도 한다. 구입해서 보냈다고 해서 왜곡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어머니 조마리아의 사랑이 상쇄되는 것도 아니다. 수의를 구입했냐, 지어 입혔나의 차이일 뿐 큰 틀에서는 의미가 와전되지 않았다고 보인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왜곡이라 알고 있는 명성황후 사건에 대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기말과제인 영화 '호타루와 특공대'라는 영화를 보고 감상문 쓰기였다. 이 영화는 한국인 가미가제 특공대 탁경현이라는 사람과 관련된 영화다. 이 탁경현이라는 사람은 사천사람이고 그의 유해는 현재 일본 신사에 있다. 이 사건은 2007년 있었던 사건( 사천에 가미카제대원 추모비..日여배우 (daum.net))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요약하면 일본의 한 여자배우가 꿈에 나타난 한국인의 말(비행기를 조종하며 죽는 것에 후회는 없지만 조선사람이 일본사람의 이름으로 죽는 것이 억울하다.)을 잊지 못해 그를 수소문한 끝에 그가 탁경현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그의 고향에 위령비를 세우고자 했지만 결국 시민단체 등의 반대로 세우지 못한 사건이다.

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과제를 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슬픔을 가지고 있다. 그것의 중량은 본인만 알고 있다. 죽음 앞에선 타인의 불행보다 지금 내 손톱 밑에 가시가 아픈 법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내 손톱 밑에 가시가 아프다고, 죽음을 목전에 둔 누군가 앞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세상에서 나의 슬픔보다 큰 슬픔은 없지만, 인간이라면 부끄러워해야 할 일 앞에서 슬픔을 삭이는 것도 그리고 고통의 크기를 비교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중략) 영화를 통해 그들을 보면 ‘아직 어린 그들’ ‘세뇌당한 그들’ ‘아리랑을 부른 한국인 특공대원’ ‘약혼녀를 잃은 젊은이’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민족이 당한 슬픔 앞에, 독립을 위해 노력한 사람의 고통 앞에서 그들이 부르짖는 절규는, 생사를 목전에 둔 사람 앞에서 손톱 밑의 가시가 아프다 말하는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들은 슬픈 가해자이며 시대의 희생자다...(중략) 영화에는 일부 드러난 김선재 개인의 슬픔에는 공감한다. 약혼자를 잃고, 어린 나이에 타향에서 일제를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한 사람. 그 후 그는 아리랑의 나라, 대한민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인 여배우의 꿈에 나타나 슬퍼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를 부정하는 한국의 가족들, ‘귀향기원비’마저 거부하는 상황들 앞에 나는 그의 개인적 슬픔에 공감한다.

다만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희생한 사람을 두고 그것을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오는 것은 반대한다." 나는 이 과제의 제목을 다음과 같이 정했다.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독립지사의 넋은 일본 여배우의 꿈에 나타나지 않는다 : 영화 <호타루>와 특공대(탁경현)"


이러한 과제와 강평을 남긴 후 마지막 수업이 되었다. 교수님은 매우 화가 나 있었다. 그는 모든 학생들의 과제를 가져와 이런저런 지적을 하였으며 특히 나의 과제에 대해서는 본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화를 내며 줄줄 읽었다. 또한 그는 F학점을 줄 것을 경고하며 모든 학생들에게 F를 주면 어떨 것 같냐고 물었지만 내게는 묻지 않았다. 그러나 그 F는 누가 봐도 나를 향한 것이었다. 사실 과제를 내면서 B 정도는 받을 것을 예상했지만 F는 예상 못했다. F를 받으면 지금 상황(일하면서 학교를 다니는)에서 3학점을 날리는 셈이고, 나는 한 학기를 더 다녀야 하는 아주 곤란한 상황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날 내게 한 말은 다음과 같다.

"애국자, 본인과 나는 화학적으로 결합되지 않는 사람, 본인 수업을 이해하지 못했다" 등이었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았다. F를 받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곤란한 상황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수업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은 글을 혼자 적었었다.


"1) 모든 수업을 충실히 듣고 모든 과제를 제출했으나 교수님이 생각한 방향과 다르다고 ‘F’ 운운하는 것은 이때껏 들어보지 못한 발언이며 무례한 협박성 발언이라 생각합니다.

2) my history를 강조하면서 본인의 생각과 반하는 것에 대해서는 불쾌하게 생각하시고 사람들 앞에서 그 내용을 줄줄 읽으시면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심히 무례했다고 생각합니다. 정답이 있는 객관식 시험도 아니었으며, 저는 교수님의 의견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교수님의 생각이 그러함을 제가 받아들였다면, 교수님도 다른 생각이 있을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교수님이 그리 좋아하시는 넬슨만델라의 연설 (a rainbow nation at peace with itself and the world. )처럼 말입니다.

3) 만약 저의 과제내용이 불쾌하셨을지라도 굳이 과제를 들고 와서 본인이 과제를 보고 느낀 생각을(그것도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표출하시면서) 하나하나 낭독하는 것은 제가 이때까지 모든 수업을 통해 듣지도 보지도 못한 광경이었습니다.

4) 학생이 부족하면 교수로서 가르치면 되는 것이고 학생과 의견이 다르다면 그 의견에 대해 교수님 생각을 말씀하시되, 그것을 강요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불쾌함을 표출하시는 것은 교수로서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 생각합니다...(중략) 저는 ‘F’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고, 그 발언을 그저 들었다는 것이 심히 불쾌합니다. 저는 교수님의 의견에 동의하는,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제가 수업에 불성실하게 참여한 것 또한 아닙니다. 성실하게 참여했기 때문에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본인이 주장하는 바가 다른 사람에게 관철되지 않는다고 본인이 가진 아주 작은 권한으로 교수에게 어떤 것을 주장하기 어려운 학생들을 대상으로 “F를 주면 어떻겠냐고 묻는 것이” 상식적인 걸까요? 물론 그 F는 저에게 향하는 말이라 생각하긴 합니다...(중략) 지성인의 전당이라는 대학이 단순히 교수님이 정해놓은 정답을 말하는 곳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이 좋아하시는 my history, - heritage, rainbow nation이라는 단어는 교수님께는 적용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


오늘 학점은 공개됐고 나는 C0였다. 대학원에서 받은 C0는 F나 마찬가지다. 이런 점수는 학부 때도 잘 받지 않는 점수다. "F가 아니라 다행이었다고 생각해야 하나? 어쨌든 3학점은 취득했으니 다행인가? 그렇다 해도 이런 점수는 정말 당황스럽구나, 교수님에게 전화를 해볼까?" 몇몇 생각이 다 떠올랐으나 결국 마지막에 든 생각은 그 교수에게 받은 C0는 영광이라는 것이다. 또한 학점을 이수하게 해 줬으니 감사하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는 그 사람 말에 동의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가 주장하는 바에 놀라야 하고, 감탄해야 하고, 인정해야만 받을 수 있는 점수일진대,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모든 것에 부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핵심적인 부분, 특히 과제의 경우 그의 말처럼 나는 그 교수님과 '화학적으로 결합될 수 없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애국자라고 말했다. 물론 비아냥거리는 애국자였지만 나는 이 수업을 통해 애국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또한 애국을 하게 되면 개인적으로 포기해야 할 일들이 생긴다는 것도 말이다. 그가 내게 준 '애국'이라는 단어의 결과가 C0라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가?

대학은 지성인의 전당이라고 한다. 知性人, "인간의 본질은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데 있다고 하는 인간관" 남의 말을 들을 줄도 알고, 의견을 존중할 줄 알고, 내 말을 주장을 할 줄도 알고, 그럼으로써 나의 지식을 높이고 타인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 지성인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이것은 대학에 속해 있다고,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유명한 책을 썼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유치원만 잘 나와도 알 수 있는 것이다.


CO 학점에 대해 이의제기 않기로 했다. 그에게 그 점수를 받은 것이 지금도 영광이지만 향후 더 큰 영광으로 다가올 것이라 생각한다. 그가 가진 생각은 그칠 줄 모르는 교만함의 극 이상,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대단해 보이는 그의 논리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결국은 알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타인의 말을 존중하지 않는, 본인 말만 맞다고 하는 편협함의 결국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또 한번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그러고 있지 않는가?"

"나도 나의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는가?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약한자를 상대로 협박성 발언을 하고 있지 않는가? 자만심의 끝에 서서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지 않고 뭉개버리는 것은 아닌가?"


나의 2025년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에게 귀한 교훈을 준 그에게 감사하다.

세상 태어나 처음 1월 첫날 일출을 보게되었다. 여러 감동이 섞인 2025년을 시작한다. 화이팅!!

2025. 1. 1. 사천에서







keyword
작가의 이전글눈으로 읽은 예수를 마음으로 봅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