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그렇다고 진짜 그렇게 나타나면 어떡해요
2020.09.24
많은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그러하듯이, 모든 건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됐다. 지난 일요일이었을까, 한 남자 아이돌의 거울 셀카가 내 트위터 타임라인으로 흘러들어왔다. 요즘 각종 아이돌 팬들을 그들의 최애 그룹으로부터 훔쳐가고 있다고 악명 높은 그룹 더보이즈의 뉴였다. 흰색 트레이닝복과 새까만 크로스백, 흑백 줄무니 양말에 운동화 차림이 예뻤고 입술을 삐죽 내민 표정이 귀여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는 그의 머리 스타일을 보고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앞머리와 투블럭 안쪽만 탈색하고 나머지 부분은 흑발인 머리가 동글동글하게 드라이되어 있었고, 이 귀엽고 힙터지는 머리는 뉴의 스타일과 완벽하게 어우러져 전 세계 케이팝 팬을 그의 손민수로 만들기에 전혀 모자라지 않았다. 아무튼 나는 결심했다. 뿌리 염색할 때도 됐겠다, 돌아오는 주에 이 스타일로 머리를 하겠다고.
그 당시에는 “저는 뉴군 머리 양아치 같아서 별로예요"라고 한 트친 한 명을 제외한 온 세상이 나의 결정을 응원하는 것만 같았다. 문제의 거울 셀카를 리트윗 했던 세미-더비(더보이즈 팬덤) 친구의 부러움도 사고, 미용실 예약했다는 트윗에는 모르는 사람까지 마음을 찍어 줬다. 탈색하느라 머릿결이 상해서 못 할 수도 있겠다고 우려했으나, 미용사 쌤까지 가능하다고 단박에 말씀하셔서 정말이지 모든 일이 일사천리였다. 주말이면 이 지긋지긋한 물 빠진 카키색에 뿌리도 자랄 대로 자란 머리를 정리하고 유사 남돌로 거듭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사실 양아치 같은 머리라는 말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냥 예쁘고 귀엽기만 한데 왜?
그러나 설렘은 이내 걱정으로 바뀌었다. 대학에 다니거나 서빙 알바를 할 때야 탈색을 하든 머리를 밀든 상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 환경에서는 확실히 이상한 말 얹는 사람이 무례한 또라이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 내 새로운 일자리는 사무실이었다. 그것도 길거리에 멀끔한 오피스룩밖에 보이지 않는 강남구 삼성동의 사무실 말이다. 지난주에 이미 탈색모로 출근했으니 염색을 또 해도 안될 건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첫날 오리엔테이션에서 “우리 회사는 복장 규정은 따로 없지만 알아서 단정하게 잘 차려입으면 될 것 같다”라는 말을 들어버린 이상 나는 더 이상 맘 편히 있을 수가 없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단정인 걸까. 탈염색을 하면 단정하지 못한 걸까? 머리 색깔이 요란해도 드라이를 차분하게 하면 단정한 거 아닌가? 심지어 ‘알아서’라니. 사회초년생에게 ‘알아서’란 과연 희소식일까 고문일까. 지금 내 앞에 ‘적당히’라고 적힌 레시피는 과연 박막례 할머니 간장국수 비법일까, 아니면 단 10g도 잘못 계량해선 안 되는 프랑스 정통 마카롱 레시피일까.
혼돈에 빠진 나는 그 주 내내, 심지어 미용실에 가서까지 이 염색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미용사분께 다시 한번 사진을 보여드리니 ‘이건 무슨 듣도 보도 못했는데 망할 가능성까지 높아 보이는 머리냐’고 차마 말은 하지 못해 떨떠름해하시는 티가 나서 더 망설여졌다. 그렇게 손민수를 포기하고 윗머리에 브릿지만 조금씩 넣어달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미용사분은 나의 굳은 결심을 다시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아니에요, 하고 싶은 거 하셔야죠!라고 하시면서. 결국 나는 근 일주일간 고민은 했지만 단 한순간도 진심으로 바라지 않은 적 없었던 염색을 강행했다. 바깥쪽 머리를 정수리에 핀으로 고정하고 얼굴형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머리 아랫부분에만 탈색약을 바를 때 현타가 진하게 오긴 했지만, 그 정도야 어떤 헤어스타일을 하든 겪는 일 아닌가. 탈색과 흑발을 한 머리를 헹구고 말리기까지 하니 이따금씩 안 어울리면 어쩌지 하고 걱정한 게 무색할 정도로 머리가 마음에 들었다. 미용사분은 급기야 사진 속 그분보다 잘 어울린다고(저분의 개인적인 의견이다), 당신은 예전에 다른 미용사들이 난해한 스타일 주문받으면 은근슬쩍 자기가 잘하는 스타일로 하자고 설득하는 게 너무 싫었는데 역시 사람은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고 하셨다. 맞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나도 탈색한 부분을 핑크색으로 덮어버리기까지 했겠지.
네 시간 반 정도에 걸쳐 머리를 한 것 같다. 나는 내 새로운 머리가 너무 좋았고, 미용실에서 나오면서 이렇게 기분 좋았던 적이 또 없었다. 아직 머리색이 빠지기 전이라 월요일이면 형광 핑크색 머리로 회사를 가야 하는 게 약간 부담스러웠지만 말이다. 아무튼 모든 게 좋았다, 주변인들의 반응을 접하기 전까지. 그날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머리가 예쁘고 잘 어울린다고 하는 동시에 놀라거나 신기해했다. 그리고 어떤 분에게는 “되게 파격적으로 염색하셨네요~”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러자마자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집에 돌아가니까 엄마는 “그 머리가 네가 지향하는 바니?”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은은한 충격을 받은 나는 밑도 끝도 없는 고민에 빠졌다. 내가 지금 규정상 ‘단정’의 범위를 벗어난 건 아닐까? 트친 말마따나 진짜 양아치 머리인 걸까? 혹시 회사에서 한소리 들으면 어떡하지, 출근할 때마다 까만 스프레이라도 뿌려야 하나, 근데 주말이라 지금 사도 빨리 못 받을 텐데, 설마 다시 어둡게 염색하라고 하는 거 아냐? 그리고는 머릿속으로 다음 주 월요일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시나리오를 그려보았다.
“가은 씨, 알아서 잘하라고 했는데 이러면 어떡해요. 아무리 규정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 이건 도를 지나쳐도 너무 지나쳤잖아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묘하게 눈을 피하며) 죄송합니다만, 명확한 기준도 없는 ‘단정함’에 어긋난다고 제 돈과 시간을 써서 다시 머리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저는 첫 월급도 안 받았고 이미 염색에 돈을 많이 써서 당분간 미용실 가기도 어려운 상태인걸요.”
최악의 경우를 망상하면서도 알고는 있었다. 걱정과 달리 아무 일도 안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걸. 사실 남들은 내가 무슨 머리를 하든 관심이 없는데 내가 생각을 너무 많은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1%라도 있었기에 끝까지 긴장을 놓지 못했다. 그래서 머리가 마음에 들어 행복했지만서도 그 주말이 너무 고됐다. 누군가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을 두려워하면서도 자꾸 스스로 난감한 상황을 만드는 내가 어처구니없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초코브라운이나 코토리베이지 염색이나 하고 말 것이지, 내 취향은 왜 이 모양이어서 고생한담? 나는 주목받는 것도 싫어하면서 왜 이렇게 특이한 걸 좋아하지? 아니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건 그렇게 특이하지 않은데 내 성격이 내성적일 뿐일지도 몰라. 근데 그 인간들도 참 이상해. 정말 자기 머리를 알록달록하게 물들이거나 색을 싹 빼버리고 싶었던 적이 없나? 다들 그렇게 무난하게 차려입고 다니니까 나 같은 사람이 괜히 세상의 편견에 맞서는 투쟁가라도 되는 양 비장하게 사는 거 아냐. 진짜 지금 자고 일어나면 다음 주 화요일이나 수요일이었으면 좋겠다.
걱정을 너무 많이 해서였는지, 출근 당일 아침에는 마음이 오히려 평온했다. 하지만 혹시 몰라 내 옷장에서 가장 단정한 흰 셔츠와 까만 면바지를 입었다. 일교차 때문에 위에 겉옷도 하나 걸쳤는데, 하필이면 왜 또 입을 옷이 빨주노초파랑 총천연색 스누피 가디건밖에 없었던 걸까. 그렇게 그 어떤 승객도 탈색머리를 하지 않은 월요일 아침 버스를 타고 출근을 했다. 자리에 앉아서 나보다 나중에 출근한 사람들을 보면 인사를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긴 머리 얘기를 하기엔 아직 말도 안 튼 사람이 대부분이니까. 그런데 지난주 내내 점심 같이 먹었던 옆자리 대리님도 아무 말을 안 하는 것이었다. 옆자리 신입이 투블럭에 심지어 아랫부분은 핫핑크로 염색하고 왔는데 본 척도 안 하는 게 언제부터 가능했지? 그렇게 정적이 흐르는 사무실에서 모니터만 보고 있었는데, 드디어 대리님이 내 머리를 보고 말을 건넸다.
“염색했어요? 우와 이제 봤어요! 한번 봐도 돼요? 숏컷 진짜 잘 어울린다~”
아니나 다를까, 그 월요일은 역시 아무 일도 없이 흘러갔다. 이런 시나리오 또한 진작에 상상했지만, 이 정도로 조용히 지나갈 줄이야. 학생인권조례 이전의 중·고등학교에서 마냥 머리를 다시 덮을 일은 당연히 없었고, 무례한 얘기도 듣지 않았다. 심지어 점심을 먹으러 나가 보니 드문드문 탈색머리, 밝은 애쉬 계열 머리, 브릿지를 넣은 머리를 한 사람들도 오피스룩을 입고 다른 직장인들과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으며 어울리고 있었다. 대체 왜 나는 지난 이틀간 그렇게 괴로워해야 했을까? 원하던 머리를 한 기쁨을 만끽해도 모자랄 판에. 세상은 나한테 별 관심 없다는 걸 납득하기는 왜 이렇게 어려운지. 특히 조금이라도 평범함을 벗어났을 때 온 시선이 나에게 꽂히는 것만 같은 불안감은 어쩌면 좋을지. 어쩌면 내 알록달록한 취향에 초를 치는 학생주임은 사회가 아니라 내 마음에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나는 원칙주의자 치고는 되게 이상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