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위의 무지
의문투성이였다. 백지를 보다 보면 그랬다. 그래서 여러 번 그었다. 누군가는 선을 한 번에 그으라고 했다. 어떻게 한 번에 꿰어내는지, 한 번만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지, 여럿이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가 여럿일 수는 없는지. 무지함 따위에 대한 질문에는 대답을 얻지 못했다. 침묵은 메아리를 남겼다. 그려진 걸 느낄 때 느껴진 걸 그렸다. 흐려지다 선명해졌고 갈라지다 뭉쳤다. 기우고 덧댄 자국마다 반향이 맺혔다.
어느덧 선 위에 놓였다. 이방인이자 방랑자로 서 있었다. 붉었다 푸르렀고 물처럼 흐르다 불처럼 번졌고 무색 무형이었다가 암흑처럼 번졌다. 눈앞에 잘 포장된 채로 놓인 길을 걷다가 샛길로 빠져 겉돌기도 했다. 발목을 붙잡는 쇠사슬이자 붙드는 동아줄이었고 실처럼 엉키다가도 앞으로 이끌어주는 실마리였다. 끊어낼 수 없었다, 끊는다고 끊어질 선이 아니기도 했다.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낯선 익숙함에 다다랐다. 미시감과 기시감에 휩싸여 양 끝단을 되짚곤 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권태와 막연함에 목 조이며 몸부림쳐놓고 정작 끝을 두려워했다. 구분되지 않는 경계였다. 타인과의 경계는 선명해지고 내 안의 경계는 흐릿해졌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그 사람이 드러난다던데, 그어진 곳마다 망설임이 묻어 나오려나.
그리고 난 여전히 여러 번 긋는다. 갈피가 불확실한 자취를 따라간다, 어차피 하나의 그림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