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람은 비슷하게 행복하지만, 불행한 사람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나의 불행과 우울도 처음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울이라는 감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나도 모르는 사이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서서히 스며들었다.
처음엔 그저 피곤해서 그런 줄 알았다. 공부에 집중이 잘 안 되고, 친구들과 만나도 웃음이 잘 나오지 않았다몸이 아픈 것도 아닌데 늘 무기력했고, 하루 종일 누워 있다가도 죄책감이 밀려왔다.
‘나는 왜 이렇게 아무것도 못 하지?’
그 자책이 나를 더 깊은 우울로 밀어 넣었다. 결국 병원에 가기로 했다.
예약 전화를 걸기까지 한 달은 망설였다. 전화를 걸어 놓고도 몇 번을 취소했다.
‘정신과에 가면 진짜 환자가 되는 걸까?’
이 바보 같은 생각 하나가 나를 두 달이나 붙잡았다. 그 두 달 동안, 나는 매일 “내일은 괜찮아질지도 몰라”라는 거짓 희망에 매달렸다. 하지만 아무 일도 변하지 않았다. 결국 용기를 내서 상담을 받았고, 그날 나는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그때는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다.
‘이제 병명이 생겼으니까, 치료하면 나을 수 있겠지.’
그렇게 약을 먹고, 상담을 받고,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상태는 단순히 좋아지거나 나빠지는 식이 아니었다. 기분의 호전과 악화가 주기적으로 반복됐다. 며칠 동안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가, 갑자기 이유도 없이 다시 무너졌다. 기분이 올라가면 잠을 거의 자지 않아도 괜찮았고, 뭘 해도 잘 될 것만 같았다.머릿속은 너무나 맑았고, 세상이 내 편인 것 같았다. 그때의 나는 ‘이제 회복되는 중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회복이 아니라 경조증의 시작이었다. 나는 밤을 새워 계획을 세우고, 갑자기 새로운 일에 뛰어들었다. 통장 잔고를 신경 쓰지 않고 충동적으로 물건을 샀고, 친구들에게 “요즘 너무 좋아, 모든 게 잘 풀릴 것 같아.”라고 말했다. 그때의 나는 진심이었다. 그만큼 들떠 있었고, 그 들뜸이 병의 일부라는 걸 몰랐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그 반동은 너무 컸다. 며칠 뒤, 아무 이유 없이 무너졌다. 하루 종일 침대에서 나오지 못했고, 아침에 눈을 뜨면 “또 하루가 시작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았던 감정이 빠르게 식어버리고, 모든 게 무의미해졌다. 그 주기가 반복되면서, 나는 점점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됐다. 기분이 오르면 불안했고, 기분이 가라앉으면 죄책감이 밀려왔다. 이게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 병에 대해 너무 혼란스러웠던 나는 임의로 단약을 하기로 했다.
결국 다시 병원을 찾게 되었다. 그것도 아주 악화되어서, 그 때 나는 삶을 포기하려했고, 보호병동에 입원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진단명이 바뀌었다.
F31.9 — 상세불명의 양극성 정동장애.
우울증이 아니라, 조울증이었다.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조울증’이라는 단어는 낯설고, 어딘가 무섭게 들렸다. 조증 상태일 때는 스스로 건강하다고 느꼈으니까. 그런데 그건 착각이었다. 기분이 좋을 땐 아프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안다. 우울만큼이나 조증 또한 병적인 증상이며, 그 역시 위험한 상태라는 것을.
이 병은 아직도 내 안에 있지만, 이제는 그것이 ‘나의 일부’라는 걸 안다. 병이 나를 정의하지는 않지만, 그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이건 내가 조울증을 이겨낸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아직도 완전히 괜찮지 않다. 언제 다시 조증이나 우울이 찾아올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다시 회복하는 법을, 그리고 돌아오는 길을. 이제 그 방법을 나누고 싶다.
내가 어떻게 나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다시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는지를.
이 글은 병의 기록이 아니라, 나를 다시 이해하게 된 과정의 기록이다. 그리고 어쩌면 당신도 이 글을 읽으며 자신의 마음 한켠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불완전하지만 여전히 살아가는 나처럼, 당신도 오늘을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