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옳다 by 정혜신
상대방의 감정과 똑같이 느끼는 것이 공감인가. 공감을 잘한다는 건 상대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상태까지 가야 하는 것인가. 아니다. 공감은 똑같이 느끼는 상태가 아니라 상대가 가지는 감정이나 느낌이 그럴 수 있겠다고 기꺼이 수용되고 이해되는 상태다. 그 상태가 되면 상대방 감정 결에 바짝 다가가서 그 느낌을 더 잘 알고 끄덕이게 된다. 상대와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상관없다.
같은 감정을 느껴야만 공감이 아니다. (...) 엄마와 아들도 각자 개별적 존재들이라서 서로가 느끼는 감정은 당연히 다르다. 엄마가 아들이 느끼는 감정을 이상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고 인정해 주는 느낌을 아들에게 전달할 수만 있으면 된다. 그게 공감이다. (p270~271)
관계에서의 상처는 경계에 대한 인식의 부재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다.
“얘는 딱 자기 아빠야, 얘는 딱 어릴 적 나야, 얘는 나랑 정반대야”와 같은 말들은 내 아이를 부모와의 연결 속에서만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나와 ‘내가 아닌 너’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의 언어다. 자식을 바라보는 게으른 시선이다. (p200)
아이에게 물어보지 않은 것은 물어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일지 모른다. 이 사태에 대한 엄마로서의 진단이 이미 내려진 상태다.
(...) 적절한 질문을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다. 궁금해야 질문이 나온다. 궁금하려면 내가 내린 진단과 판단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의 틈이 있어야 한다. (p267)
자신의 고통에 진심으로 주목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치유의 결정적 요인이다.
(...) 내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고 듣고 또 듣는 사람, 내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또 물어주는 사람,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먹먹하게 기다려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이 있으면 사람은 산다. (p108, 109)
‘자기’를 드러내면, 그러니까 내 감정, 내 말, 내 생각을 드러내면 바로 싹이 잘리거나 내내 그림자 취급만 당하고 사는 삶은 배터리가 3퍼센트쯤 남은 방전 직전의 휴대전화와 비슷하다.
(...) 내 존재가 희미하게 사라져 가고 있다고 느끼면 자기 존재 증명을 위해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일, 심지어는 폭력적 행동도 불사한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끔찍한 말과 행동을 화살처럼 퍼붓던 일베 회원들 몇 명을 붙잡고 보니 고립된 처지의 유약하고 위축된 개인들이었다. 일상에선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는 허약한 존재들이었다. 경찰도 피해자도 허탈해할 만큼. (p93~94, 95)
존재가 소멸된다는 느낌이 들 때 가장 빠르게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증명하는 방법이 폭력이다. 폭력은 자기 존재감을 극대화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누군가에게 폭력적 존재가 되는 순간 사람은 상대의 극단적인 두려움 속에서 자기 존재감이 폭발적으로 증폭되는 걸 느낀다. (p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