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청소년 문학 작가가 ‘시한부’에 응답해야 할 것

by 오만

<어린이청소년 문학 작가가 ‘시한부’에 응답해야 할 것들>


이 소설을 펼쳐 든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에서였다. 청소년 작가가 직접 쓴 자신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가 궁금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 고민이 좀 앞섰다. 15세 청소년이 쓴 작품임을 감안하고 책을 읽어야 할지, 출판된 서적으로서 기성 작가들과 같은 선상에서 작품을 평가해야 할지 기준을 잡기 힘들었다.

분명 글만 보자면, 그러니까 우리가 ‘필력’이라 뭉뚱그려 말하는 것들로만 보자면 기성 작가들의 것보다는 부족한 게 많았다. 특히 내게 가장 거슬렸던 것은 지나치게 의미를 두려고 꾸민 문장들이었다.

선유가 우리에게 거는 기대와 내뱉는 우울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아니 어쩌면 오직 나는 이런 생각이 점점 들 수밖에 없었다.
'귀찮다.'
특출 난 재능 없으면 공부해야지, 진짜 철없네라고 생각해도 입 밖으로 나오는 말들은 전부 유선유를 응원하는 말들이었다. 어차피 우린 남이고 네가 어떤 인생을 살든 내 상관은 아니니까.


내가 이 소설에서 기대하고 흥미를 느낀 문장들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솔직하고 대담한 문장들. 하지만 많은 경우 소설 문장들에 의미가 덧입혀지면서, 관념적이고 상투적인 문장으로 변해갔다. 이 점이 자꾸만 책장을 덮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문체에 대한 이야기는 논외로 하고, <시한부>를 읽으며 느낀 가장 큰 어려움은 내가 주인공의 고통에 공감을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 소설이 청소년 자살, 자해라는 심각한 문제를 담고 있음에도 그것이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주인공의 선택이 ‘고작, 이런 걸로?’라고 읽히니 글을 읽는 추동력이 생기기 힘들었다.

주인공 수아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성인과 사귄다는 소문에 시달린다. 그러나 소문 속 성인 남성은 실제 수아의 십 대 사촌오빠였다. 그러나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숙박업소 앞에서 수아가 남성과 같이 있었다는 사실만이 친구들 사이에 퍼져나가 수아를 괴롭혔다. 수아는 이후 끊임없이 자살 충동을 느낀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수아는 자기 몸에 상처를 내며 이러한 충동을 달랜다.

하지만 성인 독자인 나는 이게 ‘죽을 만한’ 일이라고 느끼지 못했다. 고작 초등학생 아이한테, 잠깐 흥밋거리로 소비될 이런 소문 같은 거, 이게 과연 죽음의 계기가 될 만한 사건이 될까. 거대 서사 없이 주인공의 심리를 중심으로 장편 소설을 이끌어가면서 이 정도의 사건으로, 읽는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어느 정도 훈련된 독자로서, 또한 이야기의 창작자로서 이 사건은 ‘이야깃거리’가 되지 못한다고 느껴졌다. 적어도 주인공이 극단적 선택을 할 만한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의 학대 또는 또래 집단의 지속적인 괴롭힘 등 누가 봐도 주인공에게 연민을 느낄 만한 ‘-거리’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 책의 마지막 ‘작가의 말’을 읽고, 그리고 <시한부>의 비평 모임을 통해 나의 생각이 얼마나 얕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어린이청소년 문학의 가장 큰 모순은 그것을 읽는 대상과 쓰는 주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지금 이 문장을 쓰면서도 깜짝 놀랐다. 쓰는 이를 주체로, 읽는 이를 대상으로 표현한 것부터가 얼마나 권위적인가. 어쨌든 어린이청소년 문학은 어린이청소년을 대상으로 쓰면서도 쓰는 이가 성인이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다.

성인 작가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쓰기에는 이미 그 어린이는 옛날의 존재가 되었고, 성인 작가가 어린이를 상상하며 쓰기에는 실제 어린이는 자신의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살아가는 현실적 존재이다. 그래서 작가 머릿속에 존재하는 독자들은 대개 실존하는 독자와 거리감이 있다.

내가 ‘작가의 말’에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을 받은 문장은 이것이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평범한 가정에서 잘 자란 아이도 우울증을 앓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었다.


나는 나의 십 대를 떠올려보았다. 나 역시 평범한 가정환경 속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원만한 교우 관계 속에서 자랐다. 그럼에도 죽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때를 떠올리며 ‘고작 그런 걸로 죽고 싶어 했다니’, 웃으면서 이야기할 만큼 지금은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그때의 마음을 그렇게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과거의 나’를 지금의 내가 ‘타자화’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까 성인이 된 나는 어린이청소년 독자가 겪고 있는 고통을 ‘타자화’한다. 타자가 된 입장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이해하고, 또 쓴다. 문학 속 등장인물이 현실 속 인물을 똑같이 재현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거리감을 가지고 ‘이야기’로서 이 책을 접했기에 나는 구구절절 쓴 수아의 이야기가 지겨울 따름이었다. ‘시간 지나 봐. 그런 거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태도로 청소년의 고통을 대하는 기성 작가는 결코 다룰 수 없는 고민과 고통을 <시한부>의 작가는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이제 비평 모임에서 이야기한 ‘인터넷 기반 아동들’에 대한 개념을 통해서도 이 작품을 이해해보고 싶다.

인터넷과 디지털 기기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사회에서 나고 자란 아동들을 ‘디지털 네이티브’라고 한다. ‘인터넷 기반 아동들’이란 개념도 이것과 유사할 것이다. 이 아이들의 특징으로는 남자아이들의 경우 직접적 폭력성 증대, 여자 아이들의 경우 ‘관계적 공격성 증대’로 요약할 수 있다.

관계성에 깊은 관심을 두는 세대에게 평판을 상하게 하는 소문 등은 사회적 죽음을 의미한다. 그들에게 사회적 죽음은 물리적 죽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주인공 수아가 느낀 고통의 깊이는 (디지털 네이티브가 아닌) 기성세대가 가늠하는 것보다 훨씬 깊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들었다. 과연 이러한 특성이 ‘인터넷 기반 아동들’이라고 불리는 존재의 세대적 특성이라 볼 수 있을까. 이것은 세대가 아닌 젠더의 문제는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었다.

2023년에 방영된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 <더 글로리>에 대한 비평문 중 흥미롭게 읽은 것이 있다. 씨네 21에 실린 ‘<더 글로리>의 복수는 가해자의 성별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나’, 부제로는 ‘왜 여자 가해자들은 죽지 않았을까’라는 글이다. (출처 : http://m.cine21.com/news/view/?mag_id=102309)

이 글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더 글로리>의 남자 가해자들은 모두 죽었다. 실제로 목숨을 잃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자 가해자들은, 최대 가해자인 박연진을 포함해 누구 하나 목숨을 잃진 않았다. 그렇다면 문동은의 복수가 남자 가해자에게만 더 가혹했던 걸까? 비평문의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보았다. 여성 가해자들에게 죽음은 바로 ‘사회적 죽음’을 의미했다. 그들은 모두 소문, 동영상 유포 등의 방법으로 ‘지옥을 사는’ 방식의 복수를 당한다. 그것의 크기는 남성 가해자들이 받은 물리적 죽음보다 결코 작지 않다. 이게 이 드라마의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씁쓸한 부분이다. 젠더에 따라 다른 처벌 방식, 다른 죽음의 방식.


결국 ‘관계 의존성’에 대한 문제는 젠더의 특성이지, 세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그런 특성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게 특징이라고 하면 이해할 만하다. 동시에 특성이라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결과일 뿐이고, 결국 그렇게 된 원인, 즉 ‘인터넷 기반’이라는 특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깊이 고민해 볼 필요는 분명 있을 것 같다.


2025년 1월 19일 서부지법 폭동을 보며 나는 우리나라에 대한 어떠한 믿음, 최소한의 가치가 붕괴되었음을 느꼈다. 우리나라, 우리 국민이 지켜나갔던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처참하게 짓밟혀버리는 순간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폭도들 중 절반 가량이 2, 30대의 젊은 남성이었다는 점이다.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초등학교를 나온 30대 후반의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학교에서 컴퓨터와 인터넷을 배운 첫 세대라고 한다면, 이 젊은 폭도들은 ‘인터넷 기반 아동’들의 특징에 좀 더 가까운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물리적 폭력성 증가’ 역시 세대의 특징으로 볼 수 있을까.

그럼 그 특징은 어디서 나올까.


내 생각에는 인터넷의 ‘빠름’과 ‘단순화’가 이 세대의 특성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강화시킨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인터넷 매체의 ‘글자 제한’, ‘세줄 요약’, ‘십분 압축’ 등은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보여준다. 이는 빠르게 지식을 확장할 수 있는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무언가를 제대로 보고 이해하는 데에는 취약하다.

극우 유튜버들의 선동이 그렇게 잘 먹히는 것은 이 복잡한 사회를 짧고 단순하게 설명해 준다는 것에 있다. 하지만 두 시간짜리 영화를 십 분으로 압축한 영상이 그 영화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고, 삼백 페이지의 책을 세 줄로 요약한 것이 그 책을 충실히 반영할 수는 없듯이,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는 것에 길들여져 있어서는 제대로 된 세상을 볼 수 없다.

‘인터넷 기반’의 특징은 결국 맥락을 무시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데 있다. 맥락을 보지 않는다는 것, 상황을 단순화시킨다는 것은 결국 그것에 가까이 가지 않겠다,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알아가려 노력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요즘 학생들은, 또는 요즘 젊은이들은 책을 많이 읽지 않아. 그래서 문해력이 낮아’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나는 이 말에 반대한다. 그들이 말하는 ‘책’은 출판된 형태의 전통적인 매체를 의미한다. 하지만 웹툰, 웹소설 등의 매체로 읽을거리를 확장한다면 활자에 대한 접촉이 그리 눈에 띄게 낮아졌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양산형 웹툰, 또는 웹소설의 형태를 보면 조금은 문제가 보인다. 흔히 ‘회빙환(회기, 빙의, 환생)’이라고 불리는 웹 기반 형태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또는 독자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대부분의 양산형 웹툰, 웹소설은 (빙의의 경우) 교통사고, (회기, 환생의 경우) 살해 또는 원한에 사무친 죽음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빙의의 경우) 책에서 본 세상, (회기, 환생의 경우) 이미 자신의 살았던 과거의 세계를 다시 산다. 그들은 누가 악인이고 누가 조력자인지, 앞으로 어떤 일이 어떠한 형태로 벌어질지 모두 알고 있다. 누군가를 판단하고, 사건을 해석하고, 페이지를 돌려 행간의 의미를, 인물들의 숨겨진 심리를, 행위의 내포된 뜻을 유추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명료하다.

결국 ‘문해력이 낮다’의 문제는 단어 뜻을 많이 알고 적게 아는 것에 있지 않다. 문맥을 읽을 수 있느냐의 것이다. 하지만 요즘 ‘인터넷 기반’의 세계에서는 문맥을 읽을 필요가 없다. 떠먹여 주는 데로, 쓰여 있는 데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는 웹기반 콘텐츠의 ‘문학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사물을, 사건을, 심지어 타인을 단순, 명료하게 보게 하는 인터넷 기반 사회에서 우리 어린이청소년 문학 작가들이 추구해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 것이다.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것이 최근의 흐름이긴 하지만, 과연 그것이 옳은 것인가 고민해 본다. 타인을 ‘타자화’하고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으려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나 문학적으로 옳은 태도일까.

우리는 선악의 이분법에 사로잡히지 말고, 타인을 ‘타자화’시키는 얕은 수법에 빠지지 말고, 인간에, 우리 이야기의 등장인물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 내가 <시한부>를 읽으며 깨달은 바는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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