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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훈 Aug 10. 2020

속도의 한계를 보여줄게

This is Hip-Hop! 그 첫번째

2020년을 살아가는 사람즐 중에서 힙합을 모르는 사람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확실한 것은 과거에 비해 힙합이 대중화되었고 인지도 또한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나는 고등학생 때 처음 힙합을 접하고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힙합의 역사, 스타일, 스킬 등을 공부하며 랩을 잘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었다. 물론 지금도 힙합을 좋아하지만 확실히 예전만큼은 즐기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아마도 나이가 먹어가면서 좀 더 차분하고 감성적인 것을 찾게 되어 힙합이 점점 멀게 느껴진 것이 아날까 생각해본다. 힙합을 조금이라도 찾는 지금, 한 때는 쇼미더머니에 나가 본선 진출하는 것을 꿈만 꿔 본 내 인생 속 힙합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내가 처음 힙합을 접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이다. 한창 아이돌 전성시대라고 할만큼 아이돌이 가요계를 점령하고 있을 무렵, 양산형 아이돌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발라드를 즐겨 듣고 있었다. 아마도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듣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당시 나의 짝궁이자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반이 되었던 김주의 PMP 속 노래를 같이 듣게 되었는데 그 때 흘러나온 노래가 바로 화나의 '가면무도회'였다.


기존에 듣던 노래와 달리 빠른 템포에 낮게 깔리는 목소리, 귀에 쏙쏙 박히면서도 빠르게 말하는 것이 인상 깊었었다. 그렇게 처음 힙합을 접하게 되었고 관심이 생기면서 다른 래퍼들을 하나 둘 찾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힙합이 대중화되지 않아 듣는 친구들이 별로 없어 김주와 몇몇 친구들만이 힙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당시에 나는 그 대화에 끼고 싶어 집에 가면 래퍼들을 찾고 그들의 노래를 들었다.


화나 다음으로 알게 된 래퍼는 가리온, 한국의 1세대 래퍼인 MC메타와 나찰이 만든 그룹으로 한국에 힙합을 널리 알리기 시작한 힙합계의 문익점 선생님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가리온을 알게 되고 그들의 노래를 듣기 시작하면서부터 친구들과 노래방을 가면 꼭 불렀던 것이 바로 가리온의 '영순위(Feat. 넋업샨)'이다. 지금도 노래방 가서 '영순위'를 불러 보라고 하면 가사를 안보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정말 많이 불렀던 곡이다. 한글 위주의 가사와 쏙쏙 박히는 라임, 중독성 있는 비트는 나의 구미를 당기기엔 충분했다.


한창 가리온, 화나, MC스나이퍼 등 다양한 래퍼들의 노래를 쭉 돌려 듣다가 나에게 힙합의 매력에 아주 푹 빠져들게 만들어 준 래퍼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바로 "드렁큰 타이거"였다. 타이거JK라고도 불리는 그의 노래를 쉬는 시간은 물론 등하교 시에 MP3에 넣어 온종일 듣곤 했으며 '영순위'를 제치고 'Monster'는 나의 18번 애창곡이 되었다. 더불어 그의 아내인 미래누님의 곡 또한 즐겨 듣게 되면서 더욱 더 힙합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었다.

힙찔이 시절 김지룬

지금은 친구들과 힙합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나도 쉽게 나눌 수 있지만 그 당시의 힙합은 정말 외딴 섬 그 자체였다. 마치 육복희 선생님이 처음으로 미니 스커트를 입었을 때 당시의 대중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힙합을 좋아한다고 하면 의아해 하거나 이상하게 바라보며 그런 노래를 왜 듣느냐고 할 정도로 힙합의 인식은 부정적이거나 그런 노래가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소외된 장르였다.


그렇게 소외받고 괄시되던 힙합의 인식이 변화되기 시작한 시기는 2012년 6월, '쇼미더머니'가 처음 등장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처음부터 주목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굉장히 파격적이었다. 그 때 당시에는 슈퍼스타K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대 히트를 치면서 여러 방송사에서는 슈스케와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하였고 나름의 성공을 맛 보았다. 하지만 그런 오디션 프로그램은 대부분 발라드 가수를 뽑거나 밴드, 아이돌들이 주목을 받을 수 있는 무대로 래퍼들은 그저 조금의 관심만을 받은 채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곤 할 때였다. 그런 시기에 처음으로 등장한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바로 '쇼미더머니'인 것이다.


당시 잭스키스의 리더였던 은지원이 솔로 래퍼로 활동하면서 '쇼미더머니'의 진행을 맡았었고 심사위원 출연진으로는 가리온, 주석, MC스나이퍼, 45RPM, 미료, 더블케이, 버벌진트, 정재훈이 출연하였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서 이들을 다 아는 사람들이 몇이나 있을지 궁금하다. 당시에는 몇가지 논란거리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미료가 심사위원이라는 점이었다. 당시 브아걸에서 랩을 담당했던 미료는 아이돌이었는데 아이돌인 미료가 힙합 서바이벌의 심사위원 자격으로 지원자들을 평가할 능력이 되냐는 논란이 있었고 정재훈 또한 그런 논란이 있었다. 여기서 정재훈은 80년대, 90년대 초반 출생자들은 어느정도 알만한 비트박스의 후니훈이다. 사실 나도 이때 처음 알았다.


개인적으론 '쇼미더머니1' 엄청난 성공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힙합을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줬다는 점이다.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지원자의 실력이 훌륭한 것은 물론 개인의 스토리까지 담아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잡았는데 이 것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자주 활용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쇼미더머니1'이 이러한 재미와 감동을 모두 잡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쇼미더머니1'의 우승자이자 AOMG의 기둥 중 하나인 권혁수 a.k.a 로꼬이다.


당시 로꼬는 권혁수라는 본명으로 참가하여 준수한 실력을 보여주었고 어머니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 또한 보여주면서 많은 시청자들을 눈물 흘리게 만들었다. 당시 그의 멘토였던 더블케이와 함께 결승전에서 선보인 'Home'은 지금 들어도 명곡이라고 생각한다. 결승전 무대가 방영되고 노래방에 'Home'이 나오자마자 친구들과 열창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 그가 지금은 AOMG를 대표하는 래퍼 중 한명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하고 한편으로는 그의 성장과정을 지켜본 것 같아 뿌듯했다.


그렇게 '쇼미더머니1'이 화려한 막을 내리고 1년 후 이현도와 MC메타가 주축이 되어 '쇼미더머니2'가 시작되면서 힙합의 황금기가 다가올 것임을 알리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한국힙합의 황금기의 시작은 '쇼미더머니2'부터가 아닌 '쇼미더머니2' 이후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일단 '쇼미더머니2'의 진행방식에 대한 아쉬움이 가장 컸다. '쇼미더머니' 1과 달리 2는 크루의 개념을 도입해 심사위원이 참가자가 될 수도 있는 시스템이었는데 이 시스템은 오디션이라고 보기엔 참가자들의 기회를 뺏는 것만 같아 별로라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우승 또한 심사위원이었던 소울다이브가 하면서 다소 어이 없는 결과가 아니었나 라는 생각을 했었다.


'쇼미더머니2'는 넉살, 지조, 딘딘, 매드클라운 등 지금도 유명한 래퍼들이 대거 참가하였고 탈락을 맛 보았다. 그중에서도 '쇼미더머니2'를 누구보다도 재미있게 만들어 준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스윙스와 아웃사이더이다. 스윙스는 '괴물래퍼'로 아웃사이더는 '이십사이더'로 불리면서 '쇼미더머니2'가 흥행하는데 앞장 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시 스윙스는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던 굉장히 실력있는 래퍼 중 한명으로 첫등장부터 다른 지원자들을 잡아 먹을 듯이 포효하면서 엄청난 임팩트를 주었다. 패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력 또한 출중하여 단번에 대중들의 이목을 끌어내었다. 스윙스가 4차 무대에서 선보인 7분 가량의 'RAW' 완전 날 것의 무대는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무대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솔직히 스윙스가 왜 우승을 못했는지는 아직까지도 의문이지만 당시에 소울다이브가 '영순위' 치트키를 꺼내들었기에 이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쇼미더머니2'의 또 다른 진주인공 아직까지도 '이십사이더'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어 놀림을 받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빠르게 랩을 하는 래퍼 중 한명, 아니 개인적으론 가장 빠르다고 생각하는 속사의 달인 아웃사이더이다. '외톨이'로 엄청난 인기를 끌며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색다르게 리듬을 타던 비트 위의 나그네 아웃사이더는 '쇼미더머니2'에 출연하여 최고와 최악을 모두 보여주었다.


아웃사이더하면 뭐가 떠오르냐고 사람들에게 물어본다면 많은 사람들이 '속도의 한계를 보여줄게'를 말할 것이다. 아웃사이더는 '쇼미더머니2' 2차 무대에서 매드클라운, 아이비와 함께 박지윤의 성인식을 불렀는데 이 무대에서 아웃사이더는 명장면을 남긴다. 2차 무대의 클라이맥스 즈음 비트가 멈추고 아웃사이더의 독백이 이어진다. 이 독백은 아직까지도 많은 의문을 남기고 있지만 전설의 시작이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의 독백은 이러했다. "그 어떤 이들은 내게 빠른 랩이 다라고 하지만...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색대르게 리듬을 탈 때 흘려왔던 외로움의 눈물만큼 나 역시 또 자라고 또 자라"라고 말하며 빡빡이 아저씨에게 준비됐냐고 묻는다. 그렇게 아웃사이더는 속도의 한계를 보여준다며 빡빡이 아저씨와 배틀을 하기 시작한다. 엄청난 속도로 래핑을 하기 시작한 아웃사이더는 결국 빡빡이 아저씨를 두 손 들게 만들었고 방청객들의 엄청난 환호와 함께 무대는 막을 내린다.


이렇게 전설을 써내려간 그는 4차 무대에서 또 다른 전설을 써내려 간다. 그 전설은 '이십사이더'를 만들어 냈으며 당시에 곡 제목처럼 '가슴앓이'를 하였다. 당시에 공연비 200,000원이라는 최저 공연비를 기록하면서 '이십사이더'라고 불리게 된 그는 함께 무대를 꾸민 k-타이거즈가 격파한 송판 값보다도 못벌었다며 한동안 엄청난 조롱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아웃사이더만큼 빠른 래퍼는 많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정말 충격과 공포였다.


물론 '쇼미더머니2'는 이들 외에도 스윙스를 떨어뜨릴 뻔한, 지금은 그룹 장덕철의 멤버로 더 유명한 강덕인, 육지담의 랩선생이자 무한의 바다 허인창, 넉언니 넉살, 엄카래퍼에서 이제는 예능래퍼가 된 딘딘, 마미손 의혹을 받고 있는 가사 절기의 달인 매드클라운, 운전할 때 좌회전 혹은 우회전 밖에 못하는 프리스타일 최강자 지조, 잘 먹고 잘 살라고 덕담해 준 타래까지 정말 다양한 래퍼들이 참가를 하여 화제가 되었다.


지금도 종종 친구들과 쇼미 이야기를 하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그럴 정도로 당시에 쇼미는 우리에겐 가장 핫한 이야깃거리였고 쇼미가 방송되던 다음 날에는 교실 곳곳에서 쇼미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누가 다음 라운드에 진출할 것인지, 누가 우승할 것인지 등으로 열변을 토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한국 힙합의 황금기는 '쇼미더머니2' 이후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함께 나눠보도록 하자. 힙합을 좋아하고 즐겨 들는 나로썬 내 나이 또래의 독자들이 이 글을 읽으면서 그 때 당시를 추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땐 그랬지"라는 생각을 하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This is HipHop 그 첫번째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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