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시대, 알랭 드 보통
알랭 드 보통의 책으로 2014년에 출간됐다. 출간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얻을 수 있는 게 차고 넘치는 책이었다. 한국에서는 '뉴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는데 읽어보니 'The News: A User's Manual'이라는 제목이 더 책의 내용을 잘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779029
이 책의 프롤로그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이 일은 사용설명서가 필요 없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하고 쉽고 빤한데다 특별한 구석이라고는 없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마치 숨쉬기나 눈을 깜박이는 것과 같다.
사용설명서라는 책이 대뜸 ‘이 일은 사용설명서가 필요 없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저자는 이어지는 몇 문장에서 현대 사회에서 뉴스가 소비되는 행태를 돌아본다.
보통 하루 이내의 간격을 두고(이따금 그 주기는 훨씬 짧아지기도 한다. 특히 불안한 상태라면 고작 십 분이나 십오 분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뭘 하고 있었건 간에 뉴스를 확인하기 위해 하던 일을 멈춘다. 앞서 마지막으로 뉴스를 일별한 이후 이 행성 곳곳에서 일어난 인류의 엄청난 성취, 재난, 범죄, 전염병, 복잡한 연애사에 관한 결정적 정보를 잇달아 투여받겠다는 기대를 품고 일상을 잠시 멈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어느 방향으로 어느 정도의 속도로 변하는지, 사회 규칙이 어떻게 개정되거나 개정될 예정인지 뉴스를 통해 학습한다. 이런 정보는 각 개인의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며 삶의 방향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참고 자료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직업이나 배우자를 고를 때, 자녀를 교육할 때, 혹은 애초에 결혼을 하거나 자녀를 낳을지 말지 결정하는 순간부터 뉴스에서 접한 소식을 통해 우리 사회의 발전 가능성과 그 안에서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가늠해 보며 결정한다.
현대 사회의 이와 같은 특성 때문에 뉴스는 끊임없이 생성되는 수많은 소식 중 자신들이 고른 소식에 사회 구성원의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어떤 사안에 관심을 집중시켜 세금과 공공 인력이 해당 사안을 해결하는 데 투입되도록 만들기도 하고, 또 다른 사안에 관심을 집중시켜 기존 안건에서 물적, 인적 자원을 회수하게 만들기도 한다. 때로는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사안을 터뜨려 여론이 한곳에 집중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저자의 문제 인식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뉴스라는 상품이 사회와 그 구성원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이토록 막대한데도 학교도, 정부도, 그 어디에서도 이 상품을 현명하게 소비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주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문제 인식의 결과가 바로 이 책이다. 저자는 읽거나 들을 줄 안다면 사용설명서 없이도 누구나 손쉽게 소비할 수 있는 이 상품이 우리에게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그 이면과 속내를 살펴보고 현명한 소비자로 거듭나는 방법을 300쪽에 걸쳐 안내한다.
책은 뉴스를 크게 정치, 해외, 경제, 셀러브리티, 재난, 소비자 정보로 나눠 각 분야별 뉴스의 특징과 해당 분야의 뉴스를 어떻게 소비하는 게 좋은지 하나씩 설명한다. 종종 실제 발행됐던 기사를 예시로 사용하기도 하며, 소비자가 아니라 제작자를 향해 올바른 뉴스를 제작하기 위한 방안이나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 책의 장점은 뉴스를 단순히 비판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뉴스가 자신의 상업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소비자를 두렵게 혹은 분노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기에 소비자 입장에서 이를 의식하고 경계할 필요가 있지만, 그럼에도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뉴스는 ‘모든 시민이 작지만 지극히 중요한 국가의 통치자는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핵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 그렇기에 이렇게 정성을 들여 ‘사용설명서’를 제작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마음에 남았던 몇 가지를 글로 남긴다.
우리는 당장 내가 먹고사는 문제만으로 충분히 머리가 복잡하기 때문에 그 외의 것은 최대한 단순하고 명확하기를 바란다. 여기서 ‘단순하다’는 것은 ‘내 머릿속에 이미 정립돼 있는 어떤 기준에 따라 해당 뉴스를 쉽게 분류하고 처리해 소화할 수 있는지’를 의미한다. 우리의 뇌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태어나 성장하면서 접하는 수많은 정보를 모두 머리에 남길 수는 없어서 여러 정보 중 본인이 판단하기에 자신의 생존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정보를 골라 이를 자신만의 기준으로 분류/처리/가공해 뇌에 저장한다. 인간의 능력은 결국 외부에서 어떤 신호가 들어왔을 때 이 신호가 어떤 의미인지 파악하는 정보 처리 능력이며, 능력이 좋은 사람이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신호의 의미를 파악해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어떤 소식이 지루하게 들리는 이유는 실제로 나와 별 상관없는 소식이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해당 소식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일 수도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야 더 많은 광고를 붙이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뉴스는 자신들이 전달하는 소식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최대한 쉽게 소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소식이 자신과 깊이 관계있는 소식이라고 여기며 지루하지 않게 느끼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한다’는 이미지를 지키고 싶어 한다. 공정하다는 이미지 역시 뉴스 사업을 떠받치는 큰 기둥이기 때문이다.
이런 니즈를 충족하기 위해 오랜 세월 정보 정제 및 전달 기술을 갈고닦아온 뉴스는 취재한 사실을 교묘하게 가공해 더 많은 소비자가 더 많이 분노하거나 더 겁먹게 만들거나, 혹은 그 영향력과 범위를 최대한 줄여 많은 사람들이 지루하게 느껴지도록 만들 수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들이 가공하고 있다는 것을 소비자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다.
이런 기술들을 적절히 섞으면 다음과 같은 일이 가능하다.
민주 정치의 진정한 적은 다름 아닌 뉴스에 대한 적극적인 검열이라고 여기기 쉽다. 따라서 무엇이건 발언하고 출판할 자유가 문명 세계의 당연한 동지라고 생각하기도 쉽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정치적 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진을 빼는 데에 검열보다 훨씬 더 교활하고 냉소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이 힘은 사람들 대다수를 혼란스럽고, 따분하고, 정신 사납게 만들어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에 관여한다. 그리고 이는 가장 중요한 사안의 맥락을 대다수 대중이 단 한순간도 붙잡을 수 없도록 무질서하고, 복잡하고, 단속적인 방식으로 사건들을 보도하는 행위를 통해 이뤄진다.
권력을 공고히 하길 소망하는 당대의 독재자는 뉴스 통제 같은 눈에 빤히 보이는 사악한 짓을 저지를 필요가 없다. 그 또는 그녀는 언론으로 하여금 닥치는 대로 단신을 흘려보내기만 하면 된다. 뉴스의 가짓수는 엄청나되 사건의 배경이 되는 맥락에 대한 설명은 거의 하지 않고, 뉴스 속 의제를 지속적으로 바꾸며, 살인자들과 영화배우들의 화려한 해악에 대한 기사를 끊임없이 갱신하여 사방에 뿌림으로써, 바로 조금 전 긴급해 보였던 사안들이 현실과 계속 관계를 맺은 채 진행 중이라는 인식을 대중이 갖지 않도록 조처하기만 하면 된다. 이 정도면 대다수 사람들이 가진 정치적 현실을 파악하는 능력을 약화하는 데 충분할뿐더러,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경우 사람들이 정치 현실을 바꾸기 위해 끌어냈을 결의를 훼손하는 데도 충분하다. 현 상태는 뉴스를 통제하기보다 오히려 흘러넘치게 할 때 오래도록 충실하게 유지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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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많은 버전의 현실이 존재하기에, 실재하는 국가와 언론기관들이 날마다 확고한 태도로 보도하는 국가가 같은 것이라고 보기조차 어렵다. … 뉴스는 어떤 이야기를 조명하고 어떤 이야기를 빼버릴지 선택하면서 단지 현실을 선택적으로 빚어낼 뿐이다.
뉴스는 우리를 현실과 분리해 낼 수 있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처럼 그들은 우리가 그들이 원하는 형태의 사회만 보도록 만들 수 있다.
여기에는 거대하면서도 대체로 파악할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다. 이는 시민들이 서로에 대해 갖게 되는 이미지를 조합하는 힘이고,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이들일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구술하는 힘이고, 우리의 상상 속에 한 국가를 건설하는 힘이다.
이 힘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왜냐하면 뉴스가 전개하는 기사들은 실로 자기 결정적인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의 동포 다수가 미쳐 날뛰는 폭력적인 인간이라는 소리를 규칙적으로 듣는다면, 우리는 밖에 나갈 때마다 두려움과 불신으로 가득 찰 것이다. 돈과 사회적 지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를 전달받는다면, 우리는 평범한 생활에 굴욕감을 느낄 것이다. 정치가들이 모두 거짓말을 한다는 암시를 받는다면, 우리는 이상주의와 순수함을 조용히 치워버리고 정치가들의 계획과 선언을 죄다 조롱할 것이다. 경제가 충만함의 가장 중요한 척도이며 향후 최소 10년간 재앙 같은 상황이 닥치리라는 말을 듣는다면, 우리는 다시는 충분한 자신감을 가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뉴스를 소비할 때 어느 정도는 긴장한 상태로 소비하는 게 좋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서체와 가장 권위적이며 믿음직한 헤드라인 아래 숨어 있을지 모를, 잠재적으로 역겨운 바보짓에 대해 항상 회의적인 태도로 경계 태세를 유지해야' 한다.
뉴스는 국가가 겪는 문제의 뿌리가 상류층의 범죄 행위에 근본적인 기원을 두고 있다고 상상하도록 부추긴다. … 그 규모와 복잡성 때문에 그 누가 아무리 이 세상에 대한 풍성한 질문을 던지더라도 세계는 늘 그 이상의 문제를 지닐 수밖에 없다. 무척이나 규정하기 어렵고 다종다기한 이 현실이 앞으로 어찌 될 것인가에 대해 언론은 그저 피상적인, 가끔은 엄청나게 잘못된 지도를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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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제의 경우 소위 유일한 ‘해결책’은 메시아적 리더, 국제회의 혹은 신속한 전쟁에 기대는 게 아니라, 100년 혹은 그 이상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는 변화를 기다리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 인내다.
분노는 겉보기에 어떤 상황에 대한 비관적인 반응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세상이 지금보다는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에 대한 징후다. 집 열쇠를 잃어버릴 때마다 소리를 질러대는 남자는 열쇠가 절대로 분실될 일이 없는 어떤 우주에 대한 아름답지만 무모한 믿음을 불현듯 내보이는 것이다. 정치가가 공약을 어길 때마다 분노하는 여자는 선거에 속임수가 개입돼서는 안 된다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상적인 신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예술을 가장 실용적으로 정의한다면, 사람들의 머릿속에 개념들을 강력하게 심는 방법을 터득하려는 훈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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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은 하찮은 것에 주목한다. 작고 눈에 띄지 않는 것, 다른 사람들(쟁기질하는 사람과 목동, 여러분과 나, 그리고 바쁜 저널리스트)이 놓치고 지나가지만 우리의 무관심과 냉담함을 거두도록 하는 데 있어 본질적인 것 말이다.
진정한 예술가라면 작고 하찮은 것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학자들이 모기나 파리가 멸종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논리적으로 추정해 그들의 진정한 가치를 밝혀내는 것처럼 예술가들은 인간 사회에서 그런 지점을 발견해 다수의 오해 혹은 괄시로부터 그들 혹은 그것을 보호할 수 있는 인문학적 장벽을 건설해야 한다.
또한 예술은 그러한 장벽을 개개인이 자신의 내면에도 구축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떠한 이유로 혹은 아무 이유 없이 자존감이 낮아져 자신이나 타인을 향해 공격성이 표출되려는 순간을 막아줄 장벽이 필요하다.
예술은 치유의 힘을 가진 매체로, 관객들을 인도하고 독려하고 위로하며 더 나은 자기로 진화하도록 거든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처리하는 데 무척이나 애를 먹었을 수많은 심리적 취약점들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다.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실수를 지혜롭게 웃어넘기지 못하고, 타인에게 깊이 공감하지 못하거나 타인을 용서하지 못하고, 괴롭힘을 당한다는 직접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 한 고통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희망을 품은 채 꾹 참고 견뎌낼 뚝심도 없으며, 일상의 아름다움에 감사할 줄 모르고, 죽음을 적절히 예비할 수도 없는 우리의 무력함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장벽 건설이 어려운 이유는 같은 예술 작품을 접해도 서로 얻을 수 있는 게 개인마다 혹은 상황에 따라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인생의 어느 시기에 읽느냐에 따라 얻을 수 있는 가치가 천양지차다.
어쨌거나 어떤 작품에 정당한 가치가 있는데도 공감하기 힘들다면, 우리는 그 작품을 우리에게 딱 맞는 시기에 만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작품의 객관적 가치를 인지하면서 ‘위대한’ 책, 영화, 전시를 마주함에도, 그 작품에 대해 냉담하고 지루해하며 죄책감마저 느끼기도 한다. 그건 비평가들이 훌륭한 약사처럼 처방하지 못해 그 작품이 어떤 상황에서 적합한 교정물이 될 수 있는지 충분히 혹은 섬세하게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예술 작품이 지닐 수 있는 가치의 상당 부분, 심지어 결정적인 부분이 관객이 처한 심리적 상황에 따라 달리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불편한 진실이긴 하다. 예술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과 우리 내면의 욕구가 맞아떨어지는 소중한 순간에만 진정 생생하게 다가올 수 있다.
저자는 섬세한 감각으로 각 예술 작품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해 해설함으로써 각 개인이 꼭 필요한 시기에 적절한 예술 작품을 골라 접할 수 있게 만드는 것도 뉴스(예술 저널리즘)가 맡아야 할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고 설명한다.
수많은 아이들이 아이돌이나 유튜버를 꿈꾸며 사는 셀러브리티의 시대다. 셀러브리티 뉴스와 관련된 저자의 다음 말은 그동안 셀러브리티와 그와 관련된 일련의 사회적 현상 전체를 싸잡아 매도하며 비판하는 자세로 살아온 나 자신을 반성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셀러브리티를 ‘똑같이 따라하는’ 사람을 두고 안쓰러운 가짜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선망에 기초한 모방이 높은 수준으로 이뤄진다면, 이는 훌륭한 삶의 필수 요소가 된다. 경탄하기를 거부하는 것, 성공한 사람의 성취에 아무런 흥미도 보이지 않는 것은 타당한 근거 없이 오만하게 자신을 중요한 앎으로부터 떼어내 버리는 짓이다
내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그들을 끊임없이 비판했던 이유는 이 현상이 사회(특히 내 아이들에게)에 끼치는 해악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아직 이루지 못한 경제적 안정을 먼저 이룬 그들을 질투하는 마음도 분명 있었다. 특히 다음 문단을 읽을 때에는 마치 내 모습을 들킨 것 같이 화끈거렸다.
우리 중 몇몇은 내심 질투의 압력에 굴복하면서, 명백하게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세계로부터 비극적으로 무시당하고 이내 잊히고 말 자아로 인해 아픔을 느낄 공산이 크다.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한때 품었던 희망과 실제로 이룬 것 사이의 간극으로 인해 고뇌할 것이다. 또 동년배들(심지어는 우리보다 훨씬 어린 사람들)이 스스로 입증해 낸 성공의 능력과, 우유부단하고 소심한데다 이리저리 헤매는 우리의 자아가 만들어낸 하찮은 성취 사이의 격차 때문에 고통받을 것이다. 이런 괴로움 때문에 감상적인 비애감에 젖기도 하겠지만, 어느 순간이 지나면 자기 연민도 더는 재밌지가 않다.
물론 ‘실리콘밸리 상위 20인의 투자자’ 같은 제목에다 그럴듯한 삽화를 집어넣은 신바람 난 기사를 보며 실존적 공포를 느끼는 게 가장 합리적인 반응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사를 훑고 나면 우리는 주말판 신문을 한쪽에 내동댕이친 다음 주먹으로 식탁을 힘껏 내리치게 될 것이다.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셀레브리티를 동경하며 따르는 이유를 인간 그 자체로서는 존중받기 어려워진 사회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돈이나 권력 같은 것은 부차적인 이유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 걸까? …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의 핵심에는 감동적이면서도 연약하고 단순한 열망이 있다. 바로 제대로 대접받고 싶다는 바람이다. 돈, 호화로운 삶, 섹스 혹은 권력에 대한 욕망 같은 것들은 부차적인 자극제일 뿐, 존중받고 싶은 마음이야말로 유명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원동력이다.
유명해지기 위해서 혹은 유명세를 유지하기 위해서 인생 전부를 거는 이유라고 하기에는, 이런 마음은 충분히 강력한 것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명성의 반대말인 치욕이 불러일으키는 부정적인 감정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그토록 필사적으로 유명해지기 바라는 까닭은 외면당하고, 업신여김 당하고, 구석에 홀로 남겨지거나, 줄 맨 뒤로 가라는 명령을 받거나,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고, 몇 주 뒤에 다시 전화 달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정말 불에 덴 듯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유명해지고 싶다는 바람은,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존중받기가 거의 불가능한 세상에서 우리의 존엄성을 온전히 인정받으려는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고 투표함 앞에서도 평등하다지만, 그렇다고 사무실에서나 사교 모임에서 혹은 정부나 민간의 관료주의라는 틈바구니에서 품위 있게 대우를 받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특히 평범한 사람들에게 가장 불친절한 곳이자 광대한 하늘과 끝없는 지평선이 자아내는 이로운 영향으로부터 삶이 단절된 곳인 대도시에서 존중이란 희소하고 야박하게 배급되는 일용품이며, 무관심은 이곳의 규범이다.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묻는 질문에 꽤나 멋들어지고 인상적인 답을 할 수 없다면 맨해튼이나 로스앤젤레스 같은 곳에 발을 들이지 않는 게 상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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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러브리티에게 명성이란 타인의 친절과 존경심을 길어 올리는 장치다. 평범한 그 또는 그녀라면 전인격을 걸고 수년에 걸쳐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을, 셀러브리티는 오로지 지명도만으로 단번에 얻을 수 있다. 이처럼 명성은 시간을 절약해 준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셀러브리티와 그 제반 현상은 존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텐데 저자는 바로 그 차이가 그 사회가 무명의 아무개에도 얼마나 친절하게 대하느냐의 차이를 나타낸다고 해석한다.
명성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이 얼마나 강렬한가 하는 문제는 그들이 속한 사회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다. 극소수에게만 존엄과 호의가 주어진다면, 평범한 존재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은 더욱 거세진다. 따라서 ‘셀러브리티 문화’를 콕 집어 부도덕한 젊은이들 탓이라며 비난하는 사람은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셀러브리티 문화의 진짜 원인은 자기도취적인 얄팍함이 아니다. 진짜 이유는 친절함의 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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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 사회는, 근본적으로 (넓은 의미에서) 여러 정치적 이유로 인해 평범한 삶을 살면서는 품위에 대한 자연스러운 욕구를 충족할 수 없는 사회다.
현대 세계가 셀러브리티에 목을 매는 한, 우리는 부박하기보다는 불친절한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명성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었고,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경로가 되었다. 또한 존경은 친절한 행동 같은, 명성과는 무관한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잡지의 표지 인물이 되어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저자는 과도하게 셀러브리티의 영향력이 커지고 그들을 동경하는 사회를 바꾸고 싶다면 역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만약 명성을 향한 열망들이 사그라지길 바란다면 셀러브리티 뉴스 앞에서 눈살을 찌푸리거나 그 뉴스에 대한 검열을 시도하는 것으로 시작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친절, 인내심, 배려 같은 미덕이 더 널리 퍼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해야 한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말이다.
저자는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지점은 친절과 존중이 일부 셀러브리티만이 아닌 주변 모두를 향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자존감과 품위의 민주화가 실현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나면 자존감은 점점 모두가 다 같이 누리는 것이 되고, 아직까지는 소수만이 받는 칭송이 보다 적절하게 민주적으로 널리 퍼지기를 명예의 무대에서 희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민주주의라는 말이 진정으로 뜻하는 바를 가늠하고 있다. 맨 처음 이 단어는 권력이 소수의 수중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확신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 점을 이해하는 데까지, 그리고 투표권 박탈이 통치자가 국민에게 가하는 진정한 해악 중 하나라는 사실을 엘리트들이 깨닫게 되기까지 수많은 시간과 민감화 과정, 그리고 명확한 정치적 의사 표시가 필요했다.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의 절차를 계속 따라가는 한편, 우리에게 투표의 권리만큼이나 시급하고 어쩌면 더 중요할지 모를 또 다른 요구 사항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요구 사항에 품위와 존중에 대한 권리가 포함돼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남에게 만만히 휘둘리고 굴욕 당하는 경험이 야기하는 헤아릴 수 없는 심리적 타격에 민감해져야 한다. 사회 구성원들이 누려야 할 가장 중요한 욕망을 일상적으로 억누르는 사회는 명성에 대한 강력한 욕망으로 인해 고통받을 것이다. 그 욕망에는 지금껏 명성을 확보해 온 극소수 사람들에 대한 냉소적이고 복수심에 불타는 분열증적 공격성이 분출해 뒤섞여 있다.
악랄한 험담과 명성에 대한 지나친 갈망, 이 둘을 모두 해결하려면 현 사회 제도 안에서는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는 묘책이 필요하다. 그것은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품격 있는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 해결책이 좀 더 널리 받아들여진다면 극소수 사람들에게 모욕을 안기거나 혹은 다수 속에서 눈에 띄고자 애쓸 필요가 줄어들면서 모두의 번영으로 나아갈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셀러브리티가 아예 없어질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 성당, 불교, 이슬람 등 인간이 수천 년에 걸쳐 최선을 다해 창조한 세속을 초월한 상상 속 사회에도 예수나 성모 마리아, 부처, 마호메트를 비롯한 최상위 셀러브리티와 그들을 수호하거나 보좌하는 하위 셀러브리티들이 존재한다. 스스로 창조한 사후 세계에서조차 우리는 완전히 평등하게 살지 못하고 지도자 혹은 믿고 따를 셀러브리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모두의 완전한 평등을 꿈꾸는 것보다는 적어도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만들려고 애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하루는 일상에서 마주친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어제보다는 조금 더 친절하게 대하는 것. 이를 통해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누군가에게 내 아내, 내 아이들 혹은 나 자신이 조금 더 친절한 대접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는 것. 고된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나에게 불친절했던 몰지각한 몇몇이 아니라 나에게 친절했던 수십수백 수천 명의 이름 모를 군중을 기억하는 것. 내가 실제로 현실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은 뉴스에 나오는 셀러브리티들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었다는 것을 매일 잊지 않고 상기해야 한다.
비극적인 사고나 재난 소식을 사회에 전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방과 위로라고 생각한다. 왜 이런 비극이 발생했는지 그 원인을 파악하고 널리 공유해 같은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만들거나 같은 재난 상황이 또 닥쳤을 때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알리는 것이 사고나 재난 뉴스를 전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뜻하지 않은 사고나 재난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사회 구성원의 소식을 널리 전해 운 좋게 그 불행을 피할 수 있었던 다른 구성원이 애도와 위로를 전달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 두 가지 이유 외에 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일상의 작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주는 것을 꼽는다. 메멘토 모리. 나와 별 차이 없는 어떤 구성원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감당해야 했던 어마어마한 고통을 알게 되면 나를 지배하고 있던 몇 가지 문제들이 실은 내 인생에서 그렇게까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허우적대던 물이 사실은 무릎 높이도 되지 않는 얕은 물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사소한 문제에 필요 이상으로 좌절하거나 분노하는 것을 막아주며, 덕분에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관대해지면서 보복 운전과 같은 위험천만한 행위를 실행에 옮기는 것을 막아준다.
물론 그렇다고 매일같이 비극적 뉴스를 찾아 읽으며 내 현실을 경시하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앞서 말했듯 뉴스는 태생적으로 소비자가 늘 필요 이상으로 깊은 감정에 휩싸여 끊임없이 뉴스를 소비하도록 만들려는 본성이 있다. 이와 같은 뉴스의 본성을 상기하며 스스로 균형을 맞춰야 한다.
균형 잡힌 삶을 위해서는 내면과 외부의 관심사를 절묘하게 혼합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타인이 겪은 사고를 통해 드러나는 일반적인 메시지(우리가 정말로 취약하고 일시적인 존재라는 것)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겪은 구체적인 경험에 너무 깊이 몰입한 나머지 낯선 이에게 닥친 재앙을 우리 스스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변명 거리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뉴스가 늘 우리 앞에 갖다 놓고자 애쓰는 슬픔과 고통을 명확히 인식하는 한편, 거기에 고착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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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단순히 감정대로 행동하는 것을 인간다운 것이라 생각하는 데 워낙 익숙해서, 가끔은 무덤덤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 또한 인간이 필수적으로 획득해야 하는 능력이라는 통찰을 간과하기 십상이다. 우리의 집중력과 공감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과 우리가 깊이 의지하는 몇몇에게 진지하면서도 적절한 관심을 갖기 위해서는 종종 타인에 대한 공감과 흥미를 의도적으로 제한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뉴스가 어떤 주장을 펴든 간에, 그리고 뉴스 속 이야기가 얼마나 급작스럽고 놀랍고 감동적이든 간에, 뉴스가 제기하는 문제가 언제나 우리 자신의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십분 인정하는 것이 곧 우리가 사이코패스 같은 본성을 지녔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저자는 우리가 어떤 물건이나 서비스를 구입할 때 단순히 그것을 갖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물건이나 서비스가 ‘되고’ 싶어서 구입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정돈된 분위기에서 정갈한 한식을 제공하는 레스토랑에 갈 때에는 ‘정돈되고’, ‘정갈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고, 이제 막 출시된 최신 휴대폰을 구입할 때에는 ‘새로운 기능이 탑재된 새로운 디자인’이라는 이미지를 자신에게도 부여하고 싶은 것이며, 참가비를 지불하고 새로운 러닝화를 구입해 신고 나선 주말 마라톤 대회는 소심하고 연약하고 무엇하나 제대로 끝마쳐 본 적이 없는 현재의 자신에서 벗어나 활기 넘치는 자세로 끝내 결승선을 통과하는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내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어떤 물건을 소유하거나 서비스를 받으면서 이를 통해 스스로가 변화하기를 바란다. 이와 같은 오브제들은 우리 스스로가 도달하고 싶은 어떤 이상적인 지점의 한 측면을 미리 보여준다.
저자는 종교는 그 시작부터 이와 같은 인간의 심리적 동기를 깊이 이해하고 특정한 음식이나 의복, 여행(순례), 실내 장식 용품 등이 담당하는 역할을 높이 평가하며 신자들에게 종교 생활을 안내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선불교는 신자들에게 읽고 염불만 할 것이 아니라 집에 청자를 들여놓으라고도 권유했고, 도자기를 바라보면서 ‘단순함’과 ‘무아’에 대한 깨달음을 얻으라고 가르쳤다.
저자는 위와 같은 소비 동인과 함께 현대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인력과 자원이 이와 같은 물건을 만들거나 서비스를 창출하기 위해 투입되고 있는지를 고려하면, ‘뉴스의 결코 적지 않은 부분이 맛집, 여행, 첨단기술, 패션, 자동차, 가구 등의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정보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을 단순히 헛되고, 탐욕스럽고, 물질주의적인 행동으로 지구 자원을 낭비하고 파괴하는 행위를 부추기는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물론 저자 역시 그저 물건을 구입하는 것만으로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며 마무리한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전쟁이 발발하고, 전염병이 창궐하고, 신기술이 탄생한다. 뉴스는 이와 같은 소식을 24시간 쉬지 않고 우리 면전에 전달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속보를 배출하면서 이 모든 소식이 당신이 그동안의 경험을 기반으로 신중히 설정했던 삶의 방향이나 각고의 노력 끝에 쌓아 올린 삶의 공든 탑을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다고, 당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퀀텀 점프하며 순식간에 당신이 ‘벼락 거지’가 될 수 있다고 은연중에 경고한다.
실제로 그러한가? 물론 우리는 분명 새로운 소식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여러 소식 중 일부는 분명히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뉴스가 전하는 모든 소식이 내 삶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의 흔들림이, 혹은 소식을 들은 다른 이들의 흔들림이 실제로는 우리와는 상관없었을 그 뉴스를 우리네 삶 깊숙한 곳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앞서도 인용한 것처럼 뉴스는 자기 결정적 효과가 있기 때문에 실제로 통계나 수치를 살펴보면 큰 변화가 없었음에도 뉴스에서 특정 사안을 계속 다루고 보도하면 해당 분야에 점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듣고, 믿기 시작하면서 뉴스에서 의도한 방향으로 변화가 발생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뉴스에서 연일 주식 시장이나 가상 자산 시장 소식을 보도하면 사람들의 관심이 그곳으로 쏠리면서 다름 아닌 우리 자신들 때문에 주가가 요동칠 수도 있고, 혹은 어떤 지역의 강력 범죄 사실을 계속 보도하면 실제 통계는 예년과 다를 바 없음에도 지역 민심이 움직이며 해당 지역의 거리 풍경과 문화가 바뀔 수도 있다.
저자는 이 책에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말을 인용해 놓았다.
플로베르는 신문을 증오했다. 신문이 독자로 하여금 정직한 사람이라면 결코 타인에게 떠넘기는 데 동의하면 안 되는 어떤 임무를 그렇게 떠넘기도록 교묘하게 부추긴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 임무란 바로 생각하기이다. 언론은 이제 중요한 문제에 대한 복잡하면서도 지적인 논평을 생산해 내는 일을 자기네 직원들에게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고, 독자들의 정신은 각자의 특별한 여정, 탐구, 성찰을 멈추고 그 일들을 <르피가로>의 논설위원과 그 동류의 인간들이 솜씨 좋게 포장한 결론을 그저 따르면 된다고 은근히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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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가 암시한 바에 따르면, 과거 얼간이들은 다이아몬드가 어떤 탄소 결정 구조를 띠고 있는지 아무런 단서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얄팍함은 전적으로, 그리고 확실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언론은 한 인간을 상상력도 없고 창조적이지도 않고 마음도 교활한데 그와 동시에 얻어들은 것은 무척이나 많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의 헛똑똑이는 과거에는 오직 천재들만이 알 수 있었던 것들을 일상적으로 알 수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얼간이다. 그는 이전 세대가 결코 걱정해 본 적 없던 특성을 지닌 절망적인 결합체다. 플로베르가 보기에 뉴스는 우둔한 자를 무장시키고 바보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플로베르라는 작가가 어떤 작품을 남긴 어떤 작가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인용된 말에는 공감할 수 있었다. 플로베르가 말하는 ‘(뉴스가 탄생하기) 이전 세대가 결코 걱정해 본 적 없는 권위 있는 바보’가 되고 싶지 않다면, 뉴스가 부추기는 대로 우르르 몰려다니며 시끄럽게 아무 말이나 떠들어대는 멍청한 거수기가 되고 싶지 않다면, 자신을 망가뜨리는 일인 줄도 모르고 뉴스가 전하는 소식에 부화뇌동하며 이리저리 말을 옮겨 그 소식을 구현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면, 진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하고 어떤 소식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 무엇이 실제로 내 삶에 영향을 끼칠 소식인지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걱정, 분노, 슬픔, 질투, 좌절을 먹고사는 뉴스에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방황하며 내 감정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며 될 것이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철학자 헤겔을 말을 인용한다.
철학자 헤겔이 주장했듯, 삶을 인도하는 원천이자 권위의 시금석으로서의 종교를 뉴스가 대체할 때 사회는 근대화된다. 선진 경제에서 이제 뉴스는 최소한 예전에 신앙이 누리던 것과 동등한 권력의 지위를 차지한다. … 우리 역시 뉴스에서 계시를 얻기 바란다. 누가 착하고 누가 악인인지 알기를 바라고, 고통을 헤아려볼 수 있기를 바라며, 존재의 이치가 펼쳐지는 광경을 이해하길 희망한다. 그리고 이 의식에 참여하길 거부하는 경우 이단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는 종교(특히 기독교)에 심취해 있는 독실한 신자들을 아둔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많아졌다.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은,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뉴스 혹은 더 나아가 유튜버나 인플루언서의 말은 철석같이 믿고 따르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런 이들은 신앙의 대상과 호칭만 다를 뿐 그들이 비난하는 맹목적인 신자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사람들이다.
균형 잡기가 어렵다면 균형 잡을 능력을 키울 때까지는 조금 멀리할 필요가 있겠지만 사실 속세에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학업이나 생업을 유지하며 그렇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전염병, 전쟁, 계엄, 탄핵 같은 굵직한 소식이 쉴 새 없이 몰아치면서, 그 사이사이로 온갖 사고나 부정부패, 인간 지능을 거의 따라잡은 듯 보이는 인공 지능, 그런 인공 지능을 탑재하고 백덤블링하는 로봇, 코스피 5000 달성 같은 소식이 밀려온다. 눈앞에서 수많은 생명이 속절없이 떠나가고 벼락부자와 벼락 거지가 번갈아 탄생하고 당장 내 생계를 위협하는 듯한 AI나 로봇이 얼굴을 들이미는데 어떻게 뉴스나 관련 방송에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아수라장에서 내가 품었던 꿈, 내 적성에 맞는 목표, 내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것을 놓치거나 빼앗기지 않으려면 적당한 선에서 TV와 라디오를 끄고, 휴대폰과 책을 내려놓고,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 잡음을 걷어내고 진짜 내가 들어야 할 신호를 잡아내 거기에 내 시간과 에너지와 감정을 투자할 수 있다. 다 잡으려다가 다 놓치고 많다. 어렵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면서도 신속하게 결정해 선택과 집중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자신을 성찰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우리 안에는 내면 탐사라도 시작한다면 당장 밖으로 나가라고 협박해야 할 난감한 진실들이 수없이 많이 숨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길 정말 간절히 피하고자 하는 그때가 바로 불편하지만 잠재력 있는 생생한 생각들을 배양하는 순간이다. 뉴스가 우리를 붙잡아 매는 순간도 바로 이때다. … 우리가 먼저 자신만의 생각을 잉태시킬 만한 인내심 많은 산파의 기술을 터득하지 못하는 이상,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 있는 단단한 무엇을 하나도 갖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무선 신호를 끊고 읽을거리도 손에 쥐지 않은 채 멀리 기차 여행을 떠날 필요가 있다. … 우리는 전쟁, 부채, 폭동, 실종된 아이들, 시사회 뒤풀이, 신규 상장, 대전차포 등이 전례 없는 중요성을 갖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뉴스가 부추긴 생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 가장 해결하기 힘든 문제들조차 다른 은하의 풍경이 입증하는 영겁의 시간에 부딪혀 소멸하는 곳으로.
그래야 하는데, 그래야 할 것 같은데 난 늘 소심하게 우왕좌왕 갈팡질팡 부화뇌동하다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기를 다 빨리고는 자기 연민과 자기혐오에 번갈아 빠져 허우적 댄다. 언제 아래와 같은 경지에 이르러 여유롭고 풍요로운 내면을 가꿀 수 있을까.
뉴스가 더 이상 우리에게 가르쳐 줄 독창적이거나 중요한 무언가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챌 때 삶은 풍요로워진다. 그때 우리는 타자와 상상 속에서만 연결되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타자를 정복하고 망가뜨리고 만들거나 없애는 일을 그만둘 것이다. 아직 우리에게는 할당된 짧은 시간 속에서도 끝까지 지켜야 할 자신만의 목적이 있음을 자각하면서 말이다.
언제가 나도 편안함에 이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