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간 2357주년
기원전 335년에 발간된 책을 읽었다. 지금으로부터 2357년 전인 고조선 시대에 작성된 책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책이 한글로 번역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한글은 본인이 책을 쓴 지 1778년 뒤에 지구 반대편에서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고생하던 어린 백성을 어엿비너긴 한 사람과 그 조력자들이 탄생시킨 언어니까.
이 책은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플라톤의 국가론을 읽고 싶어서 서점에 가서 검색했더니 하필 들른 서점에 국가론은 재고가 없었고 대화편만 있었다. 온 김에 이거라도 사자는 마음으로 대화편이 꽂혀 있는 서가를 찾았는데 대화면 옆에 이 책이 꽂혀 있었다. 유명한 철학자가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관한 책을 남겼다는 사실에 문득 호기심이 생겼는데 마침 책도 얇고 가격도 비싸지 않아 대화편을 사면서 같이 집어왔다. 그리고 얇은 두께 덕에 대화편보다 이 책을 먼저 손에 들게 됐다.
철학자가 시에 관심을 갖고 시학이라는 책까지 남긴 배경은 해설을 읽으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본문만큼이나 해설도 재미있었다. 학창 시절에 배웠지만 그 지식을 긴 세월 거의 사용하지 않은 탓에 황룡사 9층 목탑처럼 터만 남아 있었는데 해설을 읽으면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계보와 그들의 사상이 잠시나마 그 터 위에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아래는 해설을 요약한 것이다.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년)와 플라톤(기원전 429~347년),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5~322년)는 순서대로 사제 지간이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제자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였다. … 소크라테스는 철저히 이성적인 추론 중심의 철학 방법론을 주창했고, 그에게 배운 플라톤은 그 위에 ‘이데아'를 중심 개념으로 하는 정교하고 형이상학적인 도덕 철학을 구축했다. 이런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적인 삶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플라톤의 윤리학에 동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적인 삶은 윤리적 미덕만 아니라 지적 미덕도 포함한다고 하면서 플라톤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 이데아론을 중심으로 현실을 비판한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론을 거부하긴 했지만, 보편 개념은 여전히 중시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보편 개념을 개별 현실에서 찾아야 했으므로, (개별 현실을 담아낸) 극과 시에도 고유의 진리와 미덕이 있었다. 여기에서 플라톤이 극을 비판할 때에 그 근거로 제시한 진리 및 감정과 극의 관계를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떻게 이해했는지가 중요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시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 그의 스승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호메로스가 신을 잘못 묘사함으로써, 사람들 사이에서 저속한 감정을 부추겼다고 공격하고, 극은 진리가 아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또는 저속하게 모방함으로써 사람의 저급한 감정을 부추겨 울고 웃게 하기 때문에 저속하고 기만적이라고 비판’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은 가장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고, 시학과 수사학 등은 필연성이나 개연성을 토대로 그러한 진리를 현실 삶에 적용하거나 구체적인 사실에서 그런 진리를 도출해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도덕적인 미덕에서 감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한 사람의 미덕은 성격과 사상으로 표현되고, 성격과 사상은 행위와 감정으로 표현된다. … 플라톤은 감정을 폄하한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행위로 표현되는 감정에 성격과 사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미덕 실천에서 감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둘 다 비극을 비롯한 여러 예술의 본질을 ‘모방(미메시스)’으로 보았다. 플라톤은 이데아만 진리라고 보았기 때문에, 현실의 모방인 비극이나 그 밖의 다른 예술은 진리에서 두 배로 멀리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은 현실에서 보편 진리를 찾아내어 모방하는 것이라고 말했고, 철학보다는 못하지만, 개별적이고 단편적인 사실을 나열하는 역사보다는 더 철학적이라고 주장했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관한 책을 남긴 이유는 시를 통해서 진리를 도출해 낼 수 있고 시가 유발하는 카타르시스가 이성과 미덕에 부합하는 감정을 지닐 수 있게 감정을 적절히 조절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를 미학적 관점보다는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관점에서 바라봤고,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추구했던 시가 무엇인지,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논하는 이 책의 방향이 어떠할지 짐작할 수 있게 만든다. 플라톤과 달리 선한 인격과 미덕을 기르는 데 감정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여긴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정이 그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올바르면서 적절한 강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때 잘 쓴 시가 사람들에게 공포와 연민을 적정한 수준으로 경험하게 하면서 감정을 배출하고 정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시는 문학 속에서 궁극의 자유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덕을 갖춘 인격과 인품을 기르기 위한 수단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가 감정을 적절히 통제해서 안정적인 성품을 갖추고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격하고 불안정한 감정을 정화(카타르시스)하는 역할을 제대로 담당하기를 바랐다. 이 책은 그런 아리스토텔레스의 바람이 담긴 책이다. 시를 쓰는 사람들이 자신이 기대하는 시의 역할을 충실히 담당할 수 있는 시를 쓸 수 있게 자신의 관점에서 시를 정의하고 그런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그 방법을 구체화해 놓은 것이다. ‘시인은 본능에 따라 쓰고 대중은 재미로 즐기던 비극과 서사시’가 하나의 철학이자 학문으로 자리 잡기를 바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바람을 녹여 놓은 것이 시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도답게 책은 보수적인 느낌이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와 같은 예술의 본질은 모방(미메시스)이라고 말했는데 이때 모방해야 할 대상을 ‘훌륭하고 위대한 하나의 완결된 사건'으로 한정 짓는다.
또한 시에서 다루는 내용과 관련해서는 고귀한 사람이 행복했다가 불행해지거나 악인이 불행을 겪다가 행복해지는 것은 연민이나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 없으니 보여줘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하고 주인공이 선하지 않으면 역시 비극의 효과인 연민을 불러일으킬 수 없기 때문에 안된다고 말한다.
단순히 보수적인 측면을 넘어선 부분도 있다. 각종 차별이 횡행했던 시대이다 보니 등장인물의 성격과 관련해서 ‘여자는 열등하고, 노예는 비천하기 짝이 없지만, 여자와 노예도 선할 수 있다’거나 ‘용감하거나 똑똑한 성격은 여자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아래는 위와 관련된 해설인데 차별이 선을 넘으니 참신하기까지 하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용감함(용기)'과 ‘고결함(품위)'을 최고의 덕목으로 쳤는데, ‘용감함'은 남자의 특성으로 여겼고, ‘고결함'은 자유민의 특성으로 여겼다. 이런 면에서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였고, 노예는 자유민과 비교해서 비천한 존재였다. 따라서 사랑과 관련해서도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성적인 욕망을 좇는 것이어서 천박하지만,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용감함'이라는 미덕을 사랑하는 것이어서 고귀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것을 동성애라고 부르지만, 오늘날의 동성애와는 의미가 다르다.
물론 이런 부분은 몇 천년 전의 책이니만큼 시대의 흐름에 맞춰 독자가 잘 걸러 들어야 할 부분이다. 이런 부분을 제외하면 스토리 창작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내용이 많다.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을 두서없이 발췌해 왔다. 이미 여기저기서 많이 들어봤던 내용이 많겠지만 이 책이야말로 원조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시인은 자기 작품에 나오는 사건을 직접 연기해보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묘사한 인물의 감정을 직접 느껴보아야 작품의 설득력이 가장 커진다. 실제로 분노를 경험해보아야 분노한 사람을 가장 실감 나게 표현해낼 수 있다.
먼저 전체 개요를 작성하고, 그런 후에 거기에 에피소드를 채워 넣어 상세하게 발전시켜야 한다.
언어로 만들어내려는 모든 것이 사상을 보여준다. 증명하고 반박하고, 감정(연민이나 공포나 분노 등등)을 불러일으키고, 강조하고, 축소하려는 시도가 그것이다. 따라서 행위나 사건으로 연민이나 공포를 불러일으키려 하거나, 중요한 느낌과 개연성을 만들어내고자 한다면, 언어에 적용하는 것과 동일한 원리를 행위나 사건에도 적용해야 한다.
은유를 잘 사용할 줄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이것만은 다른 사람이 가르쳐줄 수 없으며 천재의 징표다. 은유를 잘 사용한다는 것은 유사성을 찾아내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호메로스는 이 점에서도 다른 시인보다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트로이아 전쟁은 시작과 끝이 있었던 전쟁이었는데도, 호메로스는 전쟁 전체를 다루려고 하지 않았다. 분량이 너무 방대해서 한눈에 쉽게 파악할 수 없고, 설령 분량을 적당하게 줄인다고 해도 많은 사건이 얽히고설켜 그 결과는 비슷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메로스는 한 부분만 선택해서 다루고, 함선 목록을 비롯한 나머지 많은 일은 시에 다양성을 부여하는 에피소드로 사용했다.
즉, 첫째 일이 존재하거나 일어나면, 둘째 일도 존재하거나 일어난다고 전제해보자. 둘째 일이 존재하거나 일어나면 사람들은 첫째 일도 존재하거나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추론이다. … 따라서 첫째 일은 거짓이지만, 첫째 일이 존재하거나 일어나면 둘째 일도 존재하거나 일어난다는 것이 참이라면, 그 첫째 일이 참이라고 사람들이 믿게 하려면 둘째 일이 존재하거나 일어났다고 하면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둘째 일이 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잘못된 추론을 통해서 첫째 일도 참이라고 믿는다.
믿을 수 없는 일은 단 하나도 플롯에 넣지 않는 편이 가장 좋다. 넣지 않을 수 없다면, 그런 믿을 수 없는 일은 ‘오이디푸스 왕'에서 주인공이 라이오스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설정처럼 작품밖에 두어야 한다.
행위나 사건이 전혀 없어서 성격이나 사상이 드러나지 않는 부분에서는 시어에 특히 공을 들여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어가 지나치게 화려하면 성격과 사상이 가려진다.
이러한 것 외에도 옳고 그름의 기준은 정치학과 시학이 서로 다르고, 다른 예술과 시학도 서로 다르다. ‘정치학'에서 옳고 그름의 기준이 사회적으로 정의롭고 선한 것, 즉 공동체적인 선이라면, 시학에서 옳고 그름의 기준은 시의 목적과 효과 달성에 있다. 비극의 목적은 사람에게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통해 비극 고유의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무언가를 모방하려고 했지만 능력 부족으로 할 수 없었다면, 그것은 본질적인 잘못이다. 반면에 달리는 말을 올바르게 묘사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말이 두 오른발을 동시에 내딛는 것으로 묘사했다면, 그것은 의술이나 그 밖의 기술에서 본다면 기술적인 오류이거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잘못이겠지만, 시학에서 볼 때는 본질적인 잘못은 아니다. … 암사슴에게 뿔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암사슴을 시적으로 모방해서 묘사하지 못한 것보다는 낫다.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보다 더 오래전 사람, 기원전 800년 ~ 750년에 살았다고 알려진 호메로스와 그의 작품인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극찬한다. 덕분에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커졌다. 언젠가 이 호기심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책의 두께를 넘어서면 결국 손에 들게 되겠지. 도대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어떤 작품이기에 그 긴 시간 동안 수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