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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nugeun Aug 30. 2022

메이커스 앤드 테이커스, 독서록

진짜로 거저먹고 있는 쪽은 누구인가

 이 책의 저자 라나 포루하는 미국의 경제 칼럼니스트이자 CNN의 세계 경제 분석가다. 책 번역이 워낙 잘 돼서 술술 읽힌다. 칼럼니스트가 자기 전공을 주제로 쓴 글이니 원문도 술술 잘 읽히는 글이었을 것 같아서 원문으로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지만 그동안 살아오면서 이런 행동은 돈만 날리는 결과로 돌아온다는 것을 너무나도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원서를 구매하는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저자가 책의 제목을 왜 이렇게 지었는지 알면 책의 분위기를 한 번에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 수익을 노동 소득보다 더 높게 대접해야 한다는 주장은 좀처럼 힘을 잃지 않고 있다. 이런 불공정한 차별 대우를 합리화하는 논거는 오도된 전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부유층이야말로 미국 경제에서 가치를 창출하는 핵심 계층이고, 기업가적 열정으로 모든 성장을 견인함으로써 ‘거저먹는 자’들을 부양하는 ‘만드는 자’들이라는 관념이다. 여기서 ‘거저먹는 자’는 2012년 대통령 후보 밋 롬니가 비공개 연설에서 언급한 47퍼센트의 미국인들을 가리킨다. 이 연설 내용은 녹음된 뒤 밖으로 알려져 큰 논란을 낳았다. (롬니는 이 사람들이 “소득세를 전혀 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한 보건의료, 주택, 음식을 “정부에 의존하기” 때문에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꾸리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만드는 자 대 거저먹는 자’라는 표현 자체는 롬니의 러닝메이트 폴 라이언의 작품이었다. 2010년 6월 라이언은 하원의원 월터 존스가 진행하는 케이블 TV 쇼 ‘워싱턴 워치’에 출연해 이런 말을 했다. “이제 미국인의 60퍼센트가량은 현금 가치로 따졌을 때 납부하는 세금보다 더 많은 혜택을 연방정부로부터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은 과반수의 거저먹는 자들과 나머지 만드는 자들로 나뉜 사회로 이행하고 있습니다.”
 라이언의 주장이 하도 터무니없고 막돼먹어서 아예 이 책의 제목으로 차용했다. 이 책을 통해 미국 사회에서 누가 진짜 만드는 자이고 누가 거저먹는 자인지 제대로 정의되기를 희망한다. … 미국 사회의 거저먹기 대부분은 바로 라이언이 ‘만드는 자’라고 여기는 이들이 저지른다. 이들은 소득에 비해 세율이 가장 낮고, 과도하게 큰 몫을 가져가며, 경제 성장에 역행하기 일쑤인 사업 모델을 조장한다. 반면 라이언의 ‘거저먹는 자’들은 유례없이 작은 몫을 받는 실정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투자 은행과 헤지 펀드 등 금융 업계로 대변되는 거대한 자본 세력과 이에 영향을 받은 여러 기업의 금융화가 미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쳐왔는지를 다룬다. 수많은 사람을 고통에 빠뜨렸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의 원흉인 미국의 금융 업계가 전혀 변하지 않고 반성의 낌새도 없이 여전히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자세로 미국 경제를 갉아먹으며 자신의 잇속만 채우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에 영향을 받아 금융화된 많은 기업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망침으로써 미국 경제를 망치고 있는지 다양한 자료를 곁들여 논리적으로 밝힌다.

 월가 대 메인가의 구도에서 철저히 메인가의 입장에 선 저자는 경제 칼럼니스트로 쌓아온 해박한 지식과 방대한 자료에 근거해 금융 업계와 금융화된 기업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만약 저자와 같이 메인가의 입장에 선 사람이라면 읽는 내내 통쾌하면서도 가슴 한쪽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책에는 그들이 어떻게 처벌을 피하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는지도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금융 업계도 이 책에 나오는 미국의 금융 업계처럼 거대한 자본과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정치권에 로비를 해 법률을 바꿔가며 실물 경제를 뒤흔드는 횡포를 부리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날이 갈수록 메이커스의 가치는 폄하되고 있는 반면 테이커스의 가치는 과대평가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대표적인 증거로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고 마이클 샌델도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지적한 세율을 들 수 있다. 저자는 근로 소득의 세율이 주식 투자 등 자본 소득에 붙는 세율보다 높다는 것은 나라에서 세금을 통해 ‘근로 소득보다는 자본 소득을 장려한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역시 그런 메시지를 던지는 것과 같은 세율을 설정하고 있고, 윤석열 정부 들어 부동산 관련 세금도 인하하면서 그 메시지는 더욱 강력해졌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평균 수명은 날로 길어지는데 평생직장의 개념은 사라지면서 발생하는 불안감에 주식이나 가상 자산, 부동산 등으로 큰돈을 번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이 한탕주의로 빠져들고 있다. 언론이나 SNS를 통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 인플루언서들의 나 혼자 잘 사는 모습과, 그런 이들이 빌딩이나 아파트와 같은 부동산을 사고팔며 자신이 평생 벌어도 만지지 못할 돈을 한 번에 남겨 먹었다는 기사를 접하고 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며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투자하고 있는 자신의 노동의 가치가 초라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노동에 자부심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설사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은 그들의 화려한 생활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물가는 끊임없이 오르고 집값은 그야말로 천정부지로 치솟는 현실에서 지금과 같은 벌이의 노동에만 의지한다면 노후의 내 삶이 그나마 지금 수준도 유지하지 못하고 갈수록 궁핍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결국 많은 사람들은 노동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린 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분야로 미끄러지듯 빨려 들어갈 것이다.

 이런 세태에 대한 우리나라 정부의 인식 수준이 어떠한지는 최근 말을 꺼냈다 호되게 비판을 받았던 이른바 ‘영끌족 구제, 빚투 구제' 정책을 통해 알 수 있겠다. ‘이익의 사유화와 리스크의 사회화’. 서브 프라임 사태를 일으켰던 미국 금융 업계가 이익이 날 때는 온전히 자신들이 가져갔으면서 극심한 손해가 발생했을 때는 이를 전체 사회에 분담시켰던 몹쓸 행태를 우리나라는 정부에서 직접 주도하려고 했다. 세율을 통해 간접적으로 메시지를 던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정부에서 전면에 나서서 노동의 가치를 제 손으로 잡아 끌어내리는 한편, 적극적으로 책임감 없는 한탕주의를 권장하며 도덕적 해이를 조장하고 있는 게 지금 우리나라 윤석열 정부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시장이 아니라 정부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라 자원 분배의 비효율성도 엄청나게 심해졌다. 이는 저성장의 증상이 아니라 오히려 원인일지도 모른다. … 그런 경고를 했던 위대한 진보적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시장 자본주의가 사실상 대규모 고용을 유지하지 않고서도 그럭저럭 돌아갈 수도 있다고 우려한 바 있다. 특히 자금이 생산적 투자가 아니라 투기 행각에 쏠릴 경우 그럴 수 있다고 보았다. (케인스는 정부에 특수한 인센티브를 통해 장기 투자를 진작시킬 것을 촉구했다.) 케인스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하이먼 민스키, 해리 매그도프, 폴 스위지 같은 경제 사상가들은 금융 산업 자체가 버블을 만들어 내며 실물 경제로부터 자금을 빨아들인다고 주장했다. 민스키는 “자본주의는 결함이 있는 체제이기에 그 발달을 통제하지 않으면 주기적인 경기 불황과 영속적인 빈곤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시장 자본주의가 대규모 고용을 유지하지 않고도 그럭저럭 돌아갈 수 있다는 케인스의 주장은 최근 등장해 급속도로 보급되고 있는 키오스크와 서빙 로봇, 무인 상점 등을 보면 차츰 현실화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 따라 ‘그 발달을 제대로 통제하지 않으면 주기적인 경기 불황과 영속적인 빈곤으로 이어진다’는 말도 설득력을 얻는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주체가 시장이 아니라 정부여야 하는 또 하나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20년 넘게 저널리스트 생활을 하며 수많은 탐욕스러운 자본가들을 인터뷰해 왔지만, 사실 은행가, 기업인, 경제 정책 입안자 가운데 대다수는 부패한 이들이 아니었다. 부패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그저 거대하고 복잡한 데다 (특히 자기들에게) 돈을 많이 안겨 주는 시스템의 일부일 뿐이다. 다만 안타깝게도 그 시스템이 알고 보니 고장 나 있었고, 미국이 보유한 자원을 가장 효과적이고 공정하게 활용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당면한 과제는 그 고장을 고치는 것이다.


 저자와 같이 내가 가정과 직장 등 주변에서 만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부패한 이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바르게 살려고 애쓰면서 그 속에서 더 나은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건전한 사람들이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의 빈부격차가 날로 커지며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건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 고장 났기 때문이고, 그 시스템을 유지 보수해야 할 책임은 그 시스템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정부에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여러 해결책을 말하는데 그중 ‘단순화해서 투명성을 확보하자'는 게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금융업이 다시 본연의 임무인 실물 경제에 이바지하는 본래의 위치로 돌아오려면 시스템을 단순화해서 누구나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도록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복잡성이 공익의 적임을 이해해야 한다. 우선 복잡성은 차익거래의 기회를 제공하는데, 금융업계는 그 누구보다 이 일을 잘한다. 금융업을 실물 경제에 이바지하는 본래의 위치로 되돌려놓으려거든 시스템을 단순화하고 단순화하고 또 단순화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도록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


 단순화하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가 그게 무엇이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논의하는 것이다. 


 소수의 내부자들이 만들고 통제하면서 오직 자기들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논의하는 이해 불가능한 규정들이 바로 금융을 비롯한 여러 영역에서 엘리트들이 권력을 유지하는 핵심 수단이다. 
 금융인과 금융에 포획된 관료들은 누군가 일상적인 말로 중요한 질문을 던지면, 그런 질문은 지나치게 단순하거나 포퓰리즘적이라며 통박하거나, 질문자가 ‘알아먹을’ 만한 지식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핀잔을 주기 일쑤다.


 거의 모든 분야가 고도로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현대 사회에서 사회의 각 구성원은 자신이 맡은 분야 외의 정보엔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고 무지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느 분야든 전문가와 문외한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정보의 격차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때 이 정보의 불균형을 사회에서 어떻게 다루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자꾸 말을 이리저리 꼬아가면서 쓸데없는 말들을 덧붙여 자신이 다루는 개념이나 상황을 실제보다 복잡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어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한 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양껏 포장해 가치를 부풀려 과도한 보상을 챙겨 먹을 것인가, 아니면 솔직 담백하고 투명하게 공개한 뒤 그 안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정당한 보수를 받아갈 것인가.   

 한 사회의 전문가 집단이 둘 중 어느 선택을 선호하게 될 것인지는 그 사회의 제도와 문화가 결정할 것이고, 이와 같은 제도를 수립하고 문화를 형성해 나가는 게 바로 정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내가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만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법의 허점을 끊임없이 파고들어 꺼림칙한 무죄를 받아내거나 혹은 유죄를 받고도 정치적 탄압이나 사법부의 편향적 판단이라는 헛소리를 늘어놓다가 사면이나 복권을 받는 유력 정치인이나 대기업 총수의 소식 등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는 시그널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와중에, 부의 편중화가 심해지면서 발생하는 상대적 박탈감과 무력감이 더해지고, 거기에 자신의 근시안적인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사람들을 이리저리 갈라쳐대는 선동가들의 선동이 얹어지면서 우리 사회에 불안과 불만이 날이 갈수록, 더욱 빠른 속도로 쌓여가고 있는 이 현실이 나는 못내 불안하다. 책을 읽다 보니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저널리스트 로버트 프랭크 같은 비평가들도 지적한 것처럼, 금융시장에서 쌓아 올린 부는 ‘실제 세계로부터 멀리 유리되어’ 있어서 변동성이 큰 탓에 호황과 불황의 경기 순환을 야기한다(그렇게 만들어진 불황은 당연히 그 누구보다 가난한 이들에게 치명적이다). 피케티의 저작이 명징하게 보여 주듯, 급격한 변화, 이를테면 금융 자산의 가치를 파괴하는 전쟁이나 극심한 불황이 발생하지 않을 때, 금융화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공고히 한다. 이는 빈곤층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좋지 않다. 여러 연구들이 불평등 심화가 건강 악화라든가 신뢰 수준의 저하, 폭력 범죄의 증가, 사회적 이동성의 하락으로 이어짐을 증명했다. 이 모두는 한 사회의 안정성을 해칠 수 있는 것들이다. 피케티는 2014년 나와 가진 인터뷰에서, 혁명 발발 시점을 예측할 수 있는 “알고리듬은 없지만”, 지금 추세가 지속된다면 사회적 불안과 경제적 폭등 등의 측면에서 볼 때 사회가 겪을 수 있는 후폭풍은 “끔찍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여담으로, 이 문단을 읽고 나니 몇 년 전에 줄기차게 이름이 들려왔지만 그때는 관심이 없었기에 그냥 한 귀로 흘려보냈던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읽고 싶어져서 구매했다(며칠 전 우연히 들른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비닐조차 뜯지 않아 사은품으로 보이는 CD까지 그대로 동봉돼 있는 새 책을 중고 가격으로 건질 수 있었다). 


 나는 비관론자인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내다보는 미국의 경제적 미래에 좀 더 공감한다. “현재는 미국의 최상위 1퍼센트의 몫이 혁명 전 프랑스의 1퍼센트에 조금 미치지 못하지만 점차 그 차이는 줄어들고 있다.” 오늘날 미국은 18세기 말의 프랑스와 동일한 경제적 궤적을 따라가는 셈이다. 당시 프랑스의 1퍼센트 가운데 상당수는 결국 목이 잘렸다. 피케티는 이를 두고 “공포스럽다”고까지 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런 이행이 만물의 자연적 질서라고 생각한다. “불평등은 앞으로도 수년 동안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자신의 저서에서 피케티는 역사적으로 불평등이 실제로 감소하는 경우는 전시에 부유층이 많은 재산을 잃을 때, 또는 정부가 시장에 직접 개입해서 성장의 엔진을 돌릴 때뿐임을 보여 준다. 1930년대 미국의 뉴딜 정책과 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 초 사이의 마셜 플랜이 대표적인 예다. 
 피케티에 따르면, 자본 수익률은 이런 세계적 차원의 재분배 사건이 발생하지 않을 경우 자연스럽게 경제 전반의 성장률보다 커진다. 따라서 투자를 통해 부를 얻는 사람들은 봉급으로 소득을 얻는 이들에 비해 필연적으로 훨씬 부유해진다. 그 결과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된다.


 바꾸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프랑스혁명 시대처럼 단두대로 향할 수도 있다. 나는 단두대에 끌려가는 것만큼이나 누군가를 단두대에 끌고 가는 것도 싫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아낌없이 쏟아붓고 있다는 것이고, 그 와중에 아쉬운 것은 내게 아직 그들을 적극적으로 거들만큼의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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