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다 보면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이 단편이라는 게 아쉬운 작품이 한두 작품은 꼭 있었다.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근심 걱정을 잠시 잊고 작가가 창조한 세상에 몰입하게 만드는 작품,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넘어 내 삶에 잔향을 남기는 작품이 꼭 한두 작품은 있었다.
이번 작품집에선 서이제 작가의 ‘두개골의 안과 밖’, 김혜진 작가의 ‘미애’가 그랬다. 서수진 작가의 ‘골드 러시’도 괜찮았다.
현대 설치 미술을 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소설이다. 형식이 파격적이고 전위적이어서 한 번 읽으면 뇌리에 잔상이 오래 남는다. 작가는 글 중간에 내용과 관련된 사진을 넣기도 했고, 한글이나 한자 한 글자를 수십 번 반복하는 방식으로 생각을 표현하기도 했으며, 글자와 빈칸을 이용해 그림과 같은 형상을 만들기도 했고, 마치 랩을 하듯 라임을 넣기도 했고, 한글에 서툰 외국인 근로자의 입말을 그대로 옮겨 놓기도 했다.
해설에서는 이 소설이 ‘독자를 조금 낯선 세계로 끌어들일 가교 역할을 할’ 소설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충격적인 형식의 작품이 있다는 얘기인데 여기서 더 형식을 해체한 작품이라면 과연 내가 이해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전형적인 형태의 소설만 접해왔던 내가 우물 안 개구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용은 동물권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뉴스에서 수시로 접하는 전염병 관련 동물 살처분, 그중에서도 사육 닭 살처분을 중심 사건으로 삼고 그 앞뒤로 까치와 같은 야생 조류와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슬쩍 얹어 놓았다.
배우자와 이혼하고 홀로 딸을 키우고 있는 여성 미애가 자신과 딸의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내용이다.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나 맡길 곳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가진 돈도 없고 직업마저 없어 구직 활동에 나서야 하는 엄마가 당장의 생존을 위해 자신을 바닥까지 내려놓는 모습을 처절하게 그려냈다. 앞에서는 선의와 동정을 섞어 물리적으로 도움을 베푸는 사람이 사실 뒤에서는 자신을 욕하고 깔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에도, 본인의 실수로 벌어진 사건임에도 오히려 본인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한 순간에 등을 돌려버린 그 순간에도 미애는 그 사람을 저버리지 못한다. 이웃들이 미애에 대한 그의 태도를 비난할 때마저 자신과 딸의 생존을 위해 그 사람을 나서서 변호하며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미애의 인생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머나먼 타국 호주에서 부푼 꿈을 안고 만나 함께 꿈을 현실로 만들어보려고 했던 어느 남녀의 사랑이 질척거리며 시들어 가는 모습을 그린 소설이다. 짧은 개화를 뒤로하고 떨어진 유리잔처럼 깨지고 만 사랑을 애써 다시 붙여 보려다 결국 손만 잔뜩 베이고 마는 그들의 이야기가 캥거루로 대표되는 이국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펼쳐진다. 이미 사랑이 끝났음에도 대안이 없어 깨진 사랑을 놓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에 가슴이 아려왔다.
자기 책상을 가지고 싶었지만 식기세척기를 권유받았던 여성, 일하면서 그 돈 버느니 집에서 애 돌보는 게 낫지 않냐는 말을 주기적으로 들었던 한 여성이 어느 날 한 대학교에서 여러 가지 실험에 사용하는 초파리 돌보는 일을 하게 된다. 하얀 가운을 입고 실험 물질이 주입된 초파리를 건강 상태에 따라 분류하는 일은 그전에 했던 전화 상담 같은 일보다 훨씬 전문적인 느낌이 들었고, 점심시간에는 깨끗한 학내 식당에서 밥을 먹고 교정을 산책하는 자신의 모습이 여성은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그러다 사정상 일을 그만둔 여성은 곧 탈모에 시달리고 입맛을 잃었으며 시름시름 앓게 된다. 소설가였던 여성의 딸은 그런 엄마의 상태가 초파리 실험실에서 어떤 물질에 노출됐기 때문이라는 것을 직감하지만 초파리 돌보는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여성은 왜 자꾸 딸이 자신의 자랑스러운 과거를 문제로 삼으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딸은 여성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시작하고 여성은 그 소설이 해피엔드로 끝나기를 바란다. 소설은 소설 속 딸의 소설과의 경계가 허물어진 상태에서 여성이 건강을 회복하며 해피엔드로 끝난다.
에이섹슈얼에게 상처를 준 게이 이야기다. 무성애자(에이섹슈얼), 디나이얼 등 성소수자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면 알아듣기 힘든 용어가 몇 개 등장해서 중간중간 용어를 검색해 봐야 했고, 내용 역시 성소수자가 아니라면 크게 공감할 수는 없는 이야기였다.
딜도를 의인화한 화자 모모의 목소리로 듣는 레즈비언 커플의 이야기다. 직접 내용을 요약하기 귀찮아서 해설을 옮겨왔다.
모모에게 이 여자들은 섹스의 상징이자 육체의 중심인 페니스를 무시하고 신성한 “자연의 법칙”인 이성애를 거스르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족속으로서 증오와 분노의 대상이 되지만, 정작 이들은 모모에게 하등 관심이 없다. 자기들끼리 사랑하고 먹고살기에도 이미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추락한 자존심을 비대한 자의식으로 벌충해갈수록 도리어 하찮고 우스워지는 것은 바로 모모 그 자신이다. 한국문학의 ‘남자 없는 여자들’ 이야기는 저녁놀을 통해 모조 페니스의 과장된 발화로 남성성의 허울을 유쾌하게 풍자하는 시도와 결합한다.
김멜라의 소설 속 ‘남자 없는 여자들’의 세계는 남자 없는 안전지대로 상상된 적이 없고, 그 자체로 언제나 욕망과 쾌락과 권력과 상처가 뒤엉켜 있었다. ‘저녁놀’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두 여자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애정 표현을 하기 녹록지 않은 세상에서 지현과 민영은 서로에게 ‘눈점’과 ‘먹점’이란 애칭을 지으며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면서 서로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일종의 보호 수단을 마련한다. 동성애에 대한 차별이 횡행하는 한국사회에서 이 ‘K-레즈’들은 이성애 커플들과 달리 DVD 방이나 모텔에서도 사랑을 나누는 소리를 내지 못하고, 애인이 아파도 일터에 솔직히 얘기할 수 있다.
동성 간의 사랑을 비가시화하거나 음지로 내모는 사회적 억압 속에서도 눈점과 먹점이 사랑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속박을 유희로 바꾸’며 “둘만의 비밀 언어”를 늘리는 창조와 위장의 기술을 익혀왔기 때문이다. “말의 뉘앙스와 심미적 특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눈점은 서로의 애칭 외에도 모텔이나 콘돔, 섹스와 같이 “못생긴” 단어들을 도서관, 책, 독서와 같은 단어로 바꾸어 부르자고 제안하며 자신들만의 은어를 만든다.
대충 이런 이야기다. 소설을 읽는 내내 굳이 그들의 사랑과 관계없는 성별을 모모라는 가상의 화자를 앞세워 비하하는 행위로 자신들의 사랑을 완성하고 피해의식을 덮어보려는 그들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들이 서로를 뭐라 부르며 사랑하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을 텐데 지레 겁을 먹고 숨어들면서 ‘레즈비언에 대한 차별’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애초에 이성애자들 역시 DVD 방에서 성관계를 가지면 관계 중 흘러나오는 소리를 다른 사람이 들을까봐 조심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모텔 역시 마찬가지다. 관계 중 흘러나오는 신음을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이성애자들은 ‘나는 이성애자니깐 마음껏 신음 소리를 내겠어’라는 마음가짐으로 성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설사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건 이성애자와 성소수자의 차이가 아니라 그냥 사람과 사람 간의 취향 차이다.
또한 아무리 이성애자라고 해도 회사 다니면서 연차 사용 이유에 ‘애인이 아파서’라고 쓰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연차 사용 이유에 ‘가족(배우자나 부모님, 아이 등)이 아파서’라고 쓰는 사람은 있어도 ‘애인이 아파서’라고 쓰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가족의 경조사에는 휴가나 경조금이 나오지만 애인의 경조사에는 그런 게 지원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성애자와 성소수자의 차이가 아니다.
또한 작중 커플은 ‘누군가는 연차 사용 이유에 ‘고양이가 아파서’라고 쓰기도 하는데 자신들은 (사람이 아픔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불평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연차 사유를 올려보기나 했는지 그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본인들이 지레 겁을 먹고 올리지 못했으면서 뒤에서 ‘이것은 차별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피해의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레짐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성차별주의자로 매도하고 자발적으로 차별의 피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비단 성소수자들의 문제뿐 아니라 그게 무엇이든 최초는 쉽지 않은 길이다. 생각지 못한 난관에 부딪칠 수도 있고 뜻하지 않은 반대의 목소리를 듣게 될 수도 있다. 이는 처음 ‘고양이가 아파서’라는 사유를 연차 사유에 적어낸 사람도 아마 겪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목소리를 내야 다른 사람들이 그들이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 어떤 불편을 겪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무릅쓰고 행동으로 옮겨야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문제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본인이 소설에 썼기 때문에 작가 본인도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자기들끼리 사랑하고 먹고살기에도 이미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자기 인생을 살면서 자기 문제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바쁘게 지내고 있다. 그들이 당신들의 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은 당신들이 성소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성소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소수자의 문제에 관심이 없고 잘 알지 못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나 유럽에서 생활하는 어떤 누군가나 집단의 문제에 별 관심이 없고 잘 알지 못하는 이유와 일치한다. 자꾸 감정을 쌓아두다가 어느 순간 급발진하듯 비하나 분노로 쏟아내지 말고 정당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제때 목소리를 내고 행동으로 옮기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고 보니 이 소설에서도 순간 알아듣지 못한 단어가 있었다. ‘흡입’이라는 단어였다. 섹스와 관련해 ‘삽입’이 남자의 관점만 고려한 용어라고 생각하고 그 대신 ‘흡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같았다. 정말 그러한가? 삽입은 남자의 관점만 고려한 용어인가? 그렇다면 의료 기술 중 기관지나 식도에 ‘관을 삽입하는 기술’은 환자의 관점을 고려하지 않은 이름이니 ‘기관지로 관을 흡입했다’와 같이 써야 하는 것인가? 설사 '삽입'이 진정 어느 한 쪽을 고려하고 배려하지 않은 용어라고 한들 기관지나 여성의 성기는 청소기처럼 무언가를 ‘빨아들이는’ 기능은 없으므로 ‘흡입’은 그다지 적합한 용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성차별적 용어를 바꾼다면서 역차별적 용어를 선택한 것은 무슨 경우란 말인가. 차라리 ‘성기 결합’ 혹은 줄여서 ‘결합’이라고 하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을까.
소위 말하는 ‘여성적’인 모습으로 하지 않고 다닌다고 말도 안 되는 피해를 입었던 불륜녀가 공원에서 예상치 못한 잔인한 폭력을 당한 뒤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불륜남에게까지 상처를 받지만, 폭력이 발생했던 공원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 아이와 개에게 위로받는 내용이다.
해설에서는 이 작품에 나온 사건을 ‘여성 혐오 범죄’라고 부르는데 난 이를 ‘사회적 약자 혐오 범죄’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폭력 범죄(상해, 폭행, 협박 등)의 피해자는 265,768명인데 이중 남자가 148,051명, 여자가 89,007명이다. 굳이 성별로 따지자면 남자가 훨씬 많다. 성별로 나눌 필요가 있을까 싶다. 남성과 여성을 나누지 말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형태로 가야 옳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위험한 부분은 남성에게 폭력을 당한 주인공이 다른 모든 남자들을 모두 (잠재적) 가해자로 인식하면서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웃으며 아이와 공을 주고받는 남자가 그날 밤 나를 폭행하고 사라진 남자인 것도 같았다. 아이가 쪼르르 달려가 안길 때의 웃는 얼굴을 보자 저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싶었는데, 돌아서며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눈썹이 슬쩍 움직이는 것이 어쩌면 저 사람인지도 모른다 싶었다. 모든 남자들이 그날 밤의 남자였다가 아니었다가 했다.
개를 쓰다듬으면서 나는 죽이고 싶은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개를 쓰다듬으면서, 개의 활력과 온기를 느끼면서, 어떻게 하면 그 인간들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짓이겨버릴 수 있을까. 목을 졸라버릴 수 있을까. 찍소리도 못하게 아주 박살을 내버리고 싶다. 숨통을 끊어놓고 싶다. 그냥 쳐 죽이고 싶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다고 아이에게는 말하지 않고 다만 개를 쓰다듬었다.
만약 이 소설이 동남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에게 폭행을 당한 뒤 모든 동남아 사람을 가해자로 인식하며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소설이었거나 무슬림에게 폭행을 당한 뒤 모든 무슬림을 가해자로 인식하며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소설이었거나 성소수자에게 폭행을 당한 뒤 모든 성소수자를 가해자로 인식하며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소설이었다면 수상작에 오를 수 있었을까.
또한 대부분의 여자와 다르게 ‘남자’처럼 하고 다닌다는 이유로 많은 불편을 겪었던 소설 속의 여성 주인공은 공원에서 우연히 잠깐 본 그 사람이 어떻게 ‘남자’라고 확신할 수 있었을까. 외모가 남자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남자로 단정 짓고 위험인물로 낙인찍는 주인공의 행위는 본인을 그토록 괴롭혔던 외모로 판단하고 차별하는 행위와 무엇이 다른 것일까.
읽는 내내 이 소설은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