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를 아는 것이 곧 앎의 시작이다
현대지성에서 출판한 책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네 작품이 담겨 있으며,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지만 저자는 플라톤이다. 즉, 플라톤의 기억에 남은 혹은 플라톤이 기억하고 싶었던 소크라테스의 모습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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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세 작품인 변명과 크리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선고받은 재판과 관련된 내용이고 작품에서 다루는 사건들의 시간의 흐름대로 수록돼 있다.
변명에는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이 선고된 바로 그 재판에서 소크라테스가 펼쳤던 변론이 담겨 있고, 크리톤에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투옥된 소크라테스가 친구인 크리톤의 탈옥 제안을 거부하며 그 이유를 설명하는 모습이, 파이돈에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파이돈이 소크라테스의 사형이 집행되던 날의 모습을 설명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마지막 작품 향연은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일어난 일을 다룬다. 소크라테스의 사형이 집행된 해로부터 약 17년 전인 기원전 416년에 열렸던 비극 콘테스트에서 아가톤이라는 사람이 우승했는데 그의 저택에서 열렸던 축하연에 참석한 소크라테스가 향연에 함께 있던 사람들과 '에로스'에 관해 나눈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변명은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으며 펼친 세 번의 변론이 담긴 작품이다. 첫 번째 변론은 유무죄를 가르는 재판에서 펼친 변론이고, 두 번째는 유죄를 선고받은 뒤 형량을 정하는 재판에서 펼친 변론, 마지막은 결국 사형을 선고받고 나서 펼친 최후 진술이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운명이 걸린 재판에서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펼친 변론을 통해 그가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온 사람인지 잘 알 수 있다. 재판장에 불려 나와서 사형을 선고받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삶을 포장하거나 비겁하게 부정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무기력하게 선고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변론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 무죄를 주장하며 형량을 산정할 때는 법률에 따라 보석을 요청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상대방을 논파하는 특유의 대화 방법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며 배심원들이 선동에 오도되지 않고 오직 법률에 따라 공정하게 재판에 임하길 바라며 변론을 펼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결국 사형을 선고받는다. 사형을 선고받은 뒤에도 그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꿋꿋하게 삶의 마지막을 향해 나아간다.
이제는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죽기 위해 떠나고, 여러분은 살기 위해 떠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은 곳을 향해 가고 있는지는 오직 신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크리톤은 사형을 선고받은 뒤 형 집행을 기다리며 투옥돼 있던 소크라테스를 찾아간 친구 크리톤과 그와 동행한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와 나눈 대화를 기록한 내용이다. 모든 것이 준비됐다며 탈옥을 권유하는 크리톤에게 왜 자신이 탈옥할 생각이 없는지, 왜 그러면 안 되는지 설명한다. 그 유명한 '악법도 법이다'와 관련된 내용인데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뱉지는 않는다(찾아보니 그 말은 전혀 다른 사람이 뱉은 말이 소크라테스의 말로 와전된 것이었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의도도 '악법도 법이다'와는 조금 다르다. 사형 선고를 납득할 수는 없지만 받아들인다는 결과 측면에서는 비슷할 수 있어도 거기까지 나아가는 논리는 다르다. '단순히 법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가 아니라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사는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명예롭고 정의롭게 살기 위해서, 이성과 원칙을 따르기 위해서 탈옥하지 않고 사형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얼마 전에 읽었던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내용이 오버랩되기도 했다.
당신은 아주 단호하게 우리 법과 이 나라를 선택했고, 모든 일에서 우리의 국정 운영에 복종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삶의 여유가 없어지면서 자꾸 마음의 여유까지 잃어가는 요즘의 내가 꼭 마음에 새겨 놓아야 할 말을 해주기도 했다.
다수의 사람은 자신이 불의를 당하면 그대로 되갚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일 수밖에 없네. 어떤 상황에서도 불의를 행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네. ... 다수의 사람은 자신이 해악을 입었다면 되갚아주는 것이 옳다고 믿는데, 과연 그것이 옳은 것인가, 옳지 않은 것인가? ... 사람들에게 해악을 입히는 것은 불의를 행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해악을 입히려고 해서도 안 되고, 다른 사람에게서 해악을 입었다고 해서 그것을 되갚아주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 되는군. 하지만 크리톤, 이런 자네의 생각과는 다른 것들에 동의하는 일은 없어야 하네. 이런 것은 오직 소수의 사람에게만 옳아 보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내가 알기 때문이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옳다고 보는 사람들과 그렇게 보지 않는 사람들은 생각을 공유하는 부분이 전혀 없어서, 서로의 견해를 들을 때마다 서로를 경멸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네.
파이돈은 사형이 집행된 날의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그의 제자였던 파이돈이 설명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해설에 따르면 아테네에는 풍습에 따라 사형을 집행할 수 없는 기간이 있어서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선고받은 뒤에도 꽤 오랜 기간 살아 있었다. 파이돈에는 그 기간이 지나고 결국 사형이 집행되기 전날 감옥을 방문한 이들이 사형이 집행되기까지 소크라테스와 나눈 대화가 기록돼 있다(아주 짧지만 그의 아내 크산티페와 자녀도 등장한다). 대화의 주제는 죽음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죽음을 꺼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그 이유를 밝힌다.
이제 곧 여행을 떠날 사람에게, 그 여행에 대해 살펴보고 여행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울리는 일이 아닐까 싶네. 해 지기 전까지 남은 시간 동안 그런 사람이 그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가 죽음을 꺼리지 않았던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그가 지혜를 탐구하는 일에 있어서 식욕과 성욕을 비롯한 온갖 욕구로 가득 차 있고 완전하지 않은 감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몸'을 장애물로 여겼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영혼은 존재하며 육신이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며, 세 번째는 신과 사후 세계가 존재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죽어서 도착할 저승에서 몸의 방해를 받지 않고 완전하고 순수한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파이돈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건 소크라테스의 생각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 사상과 굉장히 유사했다는 점과, 그 유명한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소크라테스가 묘사하는 저승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지금과 같이 천문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저승이 저 하늘 높은 곳에 있다고 가정한 뒤 묘사해 나가는 데 마치 판타지 소설의 도입부를 보는 느낌이었다.
삶의 마지막 순간과 어울리는 주제로 대화를 마친 소크라테스는 독약이 도착하자 크리톤이 맛있는 식사를 하거나 가족과 조금 더 시간을 보내도 된다고 말하자 '독약을 조금 늦게 마신다고 해서 내게 이득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네. 도리어 더 이상 살아 있음으로 할 일이 없는데도, 삶에 연연해서 목숨을 잠시라도 더 부지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나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지.'라고 말한 뒤 완전하고 순수한 지혜를 얻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파이돈에서도 크리톤과 같이 지금의 내가 꼭 새겨 들어야 할 말들이 있었다. 자꾸 양 극단만 강조하며 혐오를 부추기는 요즘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꼭 가슴에 품어야 할 말인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사람이 인간을 혐오하는 자가 되듯이, 우리는 변증(직관이나 경험에 의거하지 않고 추론을 통해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방식으로 대상을 연구하는 것)을 혐오하는 자가 될 수 있다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지.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재앙 중에서 변증을 혐오하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은 없기 때문이라네. 하지만 변증을 혐오하는 것과 인간을 혐오하는 것은 동일한 원인으로 생겨나는 것이지. 인간을 혐오하게 되는 것은 누군가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믿어버리는 것이 그 원인이라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을 정말 진실하고 제대로 된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가, 나중에 보니 약하고 전혀 믿을 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인간을 혐오하는 마음이 시작되는 것이지. 사람이 그런 일을 자주 겪고, 특히 자기가 친하다고 생각한 사람들로부터 그런 일을 겪으면서 분노하는 일이 잦아지면, 마침내 모든 사람을 혐오하게 되고, 세상에는 제대로 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네. …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인간을 혐오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런 사람은 인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 채로 무턱대고 사람들을 상대하려 한 사실도 분명하지 않은가? 사람을 상대할 때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충분히 알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고, 만일 그가 인간을 안다면, 아주 선한 사람이나 아주 나쁜 사람은 드물고, 대부분은 그 중간 지점에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고려했을 것이네. 그랬다면 그는 인간을 혐오하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것은 아주 큰 것과 아주 작은 것의 차이와 마찬가지라네. 자네는 아주 큰 사람이나 아주 작은 사람, 또는 아주 큰 개나 아주 작은 개같이, 그 어떤 것에서나 아주 큰 것 혹은 아주 작은 것은 드물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리고 빠른 것이나 느린 것, 아름다운 것이나 추한 것, 흰 것이나 검은 것은 또 어떠한가? 그 모든 것을 봐도 양 극단은 드물고 소수인 반면에, 중간에 속한 것들은 많고 다수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누가 더 악한지를 시합한다면, 거기에서도 선두에서 뛰는 자들은 아주 드물어서 극소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마지막에 배치된 향연은 소크라테스가 어느 향연에 참석해 다른 사람들과 '에로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을 기록한 것이다. '에로스'라고 해서 굉장히 기대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그 기대와는 방향이 많이 다른 내용이었다. 물론 원래 기대한 것보다 훨씬 깊이 있는 내용을 얻을 수 있었으니 그 기대는 다른 곳에서 찾기로 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7명 정도가 에로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이, 정확히 말해 에로스라는 신을 자신의 방식대로 찬미하는 것이 향연의 주요 내용이다. 소크라테스는 가장 마지막에 발언한다. 주의해야 할 점은 당시 아테네의 연애 혹은 사랑 풍습이 지금과는 상당히 달랐다는 것을 이해하고 향연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아테네에서는 남녀 간의 사랑보다 남자와 남자 간의 사랑을 더 고귀한 사랑으로 여겼다. 아래는 같은 출판사에서 출판한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에 나온 해설 문구를 발췌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용감함(용기)'과 ‘고결함(품위)'을 최고의 덕목으로 쳤는데, ‘용감함'은 남자의 특성으로 여겼고, ‘고결함'은 자유민의 특성으로 여겼다. 이런 면에서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였고, 노예는 자유민과 비교해서 비천한 존재였다. 따라서 사랑과 관련해서도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성적인 욕망을 좇는 것이어서 천박하지만,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용감함'이라는 미덕을 사랑하는 것이어서 고귀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것을 동성애라고 부르지만, 오늘날의 동성애와는 의미가 다르다.
이런 풍습에 더해 당시 아테네에는 성인 남성이 어린 소년과 연애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성인 남성은 가르침을, 어린 소년은 매력적인 육체를 제공하는 관계였던 것 같다. 요즘 기준에서는 해괴망측한 풍습이라고 할 수 있다. 동성애와 소아성애자를 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요즘 시대에 메신저 같은 것으로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는 게 밝혀졌다면(거기다 대화방 이름이 향연이었다면) 모든 언론에 대서특필된 뒤 바로 구속돼 소아성범죄자로 수사를 받았을 사람들이다.
아무튼 이런 풍습 때문에 소크라테스 이전에 발언하는 거의 모든 사람이 에로스를 찬미하면서 성인 남성과 어린 소년의 연애를 다룬다. 읽으면서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내용을 가져와 봤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랑하는 어린 연인이 있는 사람은 추하고 부끄러운 일을 했거나, 누군가에게 추하고 부끄러운 일을 당하면서도 겁이 나서 뿌리치지 못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경우에, 아버지나 지인들이나 다른 사람이 그것을 알았을 때보다 자기가 사랑하는 어린 연인이 그것을 알았을 때에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이네.
또한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는 소년에게서도 우리는 동일한 것을 보게 되지. 그러니까 그런 소년은 어떤 추하고 부끄러운 일을 했다가,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에게 그 일이 드러났을 때 특히 더 심하게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이네.
그러니 국가나 군대를 그런 식으로 사랑에 빠진 성인 남자들과 소년들로 구성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들은 서로를 의식해서 온갖 추하고 부끄러운 일들을 멀리하고 명예로운 일을 하는 데 열심을 낼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속한 국가는 가장 잘 다스려지게 될 것이네.
반면에, 원래 남자였던 사람에게서 쪼개져 나온 자들은 남자를 쫓아다니지. 그런 자들은 원래 남자였던 사람에게서 쪼개져 나온 토막이기 때문에 소년일 때에는 남자를 좋아해서 남자와 함께 눕고 함께 뒤엉키는 것을 기뻐하는데, 그들이야말로 무척 용감한 기질을 지니고 태어난 자들이어서 청소년 중에서 최고에 속한 자들이네. … 그런 자들은 성인이 되어서는 소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에는 본성적으로 마음이 없어서, 결혼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어울리며 평생을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음에도 단지 관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하는 것일 뿐이라네. 그런 자들은 언제나 자기와 같은 부류의 사람을 반기고 좋아해서, 커서는 소년을 어린 연인으로 두고 연애하는 사람이 되고 어려서는 자기를 연애하는 성인 남자의 어린 연인이 된다네.
다행히도 소크라테스의 발언 내용은 앞서 말한 사람들과 그 결과 방향이 완전히 다르다. 아테네의 당시 생활 풍습을 조사하는 데 뜻이 있는 게 아니라면 향연을 읽을 때는 앞부분을 생략하고 소크라테스의 발언만 읽어도 무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는 먼저 에로스 신이 메티스(계책)의 아들 포로스(방도)와 페니아(궁핍)의 자녀라고 설명하는 것으로 에로스의 성격을 정의한다.
그런데 에로스는 포로스와 페니아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의 운명은 이러했습니다. 먼저 그는 늘 가난했죠. 그리고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부드러운 피부와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기는커녕, 딱딱하고 거친 피부에 맨발로 다녔고, 거처도 없어서 대문 밖이나 길 위에서 이불도 없이 언제나 맨땅에 누워서 오직 하늘을 지붕 삼아 잠이 들곤 했어요. ... 그에게는 항상 궁핍이 붙어 다녔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을 손에 넣을 계책을 꾸미는 수완이 대단한데다, 용감하고 대담하며 열정적이었죠. 노련한 사냥꾼이어서 늘 무슨 수를 짜내며, 궁리하는 것을 좋아해서 지략이 풍부하고, 일생 동안 지혜를 사랑하며, 노련한 마법사에다가 약초를 다루는 일과 말솜씨에 뛰어났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탄생 설화를 이용해 앞서 에로스를 찬미한 사람들이 어떤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대가 말한 것에서 추측했을 때, 그대는 에로스는 연애하는 주체가 아니라 연애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 때문에 에로스는 그대에게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존재로 보였던 것이지요. 연애의 대상은 언제나 실로 아름답고 부드러우며 완벽하고 축복받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연애하는 주체는 그런 것과는 다른 모습, 즉 내가 앞에서 설명한 그런 모습을 하고 있지요.
연애하는 주체가 되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크라테스가 설명한 에로스의 모습에 공감할 것이다. 연애의 대상은 항상 눈부시게 빛나고 아름답게 보이고, 그 대상을 사랑하는 나는 항상 초라하고 부족하고 갈구하는 모습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앞서 발언한 사람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평소의 자신답게 밝혀낸 소크라테스는 연애의 뜻을 무한히 확장시켜 나가기 시작한다.
모든 사람이 좋은 것을 연애하고, 게다가 늘 그것을 욕망한다면, 왜 우리는 모든 사람이 연애한다고 말하지 않고, 어떤 사람은 연애하고 어떤 사람은 연애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일까요?
이상할 것 없어요.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연애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할 온갖 종류의 연애 중에서 어느 한 종류의 연애만을 따로 떼내어 거기에만 에로스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밖의 다른 종류의 연애에는 다른 이름을 사용하기 때문이니까요.
소크라테스는 연애를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모든 일'로 확장시킨다. 아름다운 사람을 쫓는 게 연애의 원래 의미였다면 아름다움 그 자체를 쫓는 것으로 연애의 의미를, 연애의 대상을 확장시킨 것이다. 즉, 연애를 '사람이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일'로 바꾸고, '사람은 연애를 한다'를 '사람은 좋은 것이 자기에게 항상 있기를 사랑한다'는 뜻으로 바꾸어 놓는다.
여기에 죽을 수밖에 없는 필멸의 존재로서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을 추구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인 출산을 결부시켜 '아름다움의 대양으로 눈을 돌려 그것을 관조하면서, 지혜에 대한 무한한 에로스 속에서 아름답고 장엄한 이야기와 사상들을 수없이 출산'하고, 더 나아가 '아름다움에 관한 어떤 단일한 지식을 직관하는 것'이 연애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정의한다.
향연은 자신의 말을 남김으로써 불멸의 철학자가 된 소크라테스의 에로스 찬양가이자 연애 정의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소크라테스가 남긴 말을 플라톤이 정리한 책이다. 소크라테스는 생전에 책을 한 권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말, 그의 사상, 그의 죽음(이건 당연하겠지만)에 이르기까지 소크라테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건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남긴 글을 통해서 전해진 것이다. 따라서 아직 소크라테스에 대한 다른 책을 읽지 않은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건 플라톤의 눈에 비친 소크라테스, 플라톤이 책으로 남기고 싶었던 소크라테스가 전부일 것이다. 그렇다는 가정 하에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은 제외하고 내가 새로 알게 된 소크라테스의 면모를 정리해봤다.
책을 한 권도 남기지 않았다는 소크라테스와 관련해서 예전에 회사에서 열린 이슬아 작가 특별 강연에서 특히 가슴에 와닿았던 말이 떠올랐다.
나의 쓰기는 말하지 않는 것이다.
이슬아 작가는 마음속에 떠오른 어떤 화두를 말로 한 번 풀어내 버리면 다시 그 화두를 글로 정리하는 게 쉽지 않다고 했다. 말을 하고 싶거나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 전달하고자 하는 응어리가 마음속에서 뭉치며 발생하는데 이 응어리를 말을 하면서 한 번 풀어버리면 이를 다시 글로 쓰려고 할 때 처음 화두를 품었을 때의 생생한 느낌과 강렬한 에너지가 잘 표현되지 않는 것이다.
이 책을 읽어보면 소크라테스는 일상에서 마음의 응어리를 남기는 유형의 사람이 아니었다. 마음속에 응어리 같은 게 뭉칠 틈이 없던 사람이었다. 비상한 머리에 대담한 성품과 광대한 오지랖이 더해져 누구와 어디서 만나든 대화(라기보다는 변증)를 시작해서 자신의 생각과 다른 부분이 있으면 꼬치꼬치 캐물어 논리적으로 어디가 어떻게 틀렸는지 명백히 드러내 끝끝내 자백을 받아내는 사람이었다. 상대의 말에서 논리적으로 허점이 보일 때 그 부분을 바로 지적하지 않고 마치 사방으로 포위를 하듯이 질문으로 상대의 논리를 에워싸서 빠져나갈 구멍을 모조리 막은 다음 스스로 자신의 말이 논리적으로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게 만든다. 상대방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그 동기를 순식간에 파악해 발현된 꽃이 아니라 발현시킨 뿌리를 파내버리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가슴에 응어리 같은 게 남을 것 같지 않다. 또한 그의 삶은 자신의 내면 깊숙이 빠져들어 사색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거나 탐구한 진리를 주위에 전파하는 것으로 점철돼 있다. 그런 그에게는 글을 쓸 동기도,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책을 읽어보면 흔히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가 악처라고 말하는 게 아주 잘못된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변론'에서 본인 입으로 밝히기도 하는데 소크라테스는 가족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 아버지였다.
나는 아주 오랜 세월 나 자신의 일은 물론이고 가족을 돌보는 일조차 다 내팽개친 채로, 늘 끊임없이 여러분의 일에만 마음을 써왔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붙잡고서 미덕에 관심을 가지라고 마치 친아버지나 친형처럼 설득하는 일에 매달려왔는데,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파이돈'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대성통곡하는 크산티페를 귀찮게 여기는 장면도 나오고, '향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그는 그런 식으로 아름다운 사람과 접촉해 함께 어울리고 사귀면서, 자신이 오랜 세월 잉태해온 것을 출산하고 낳는 것입니다. 그는 그 사람이 함께 있든 떨어져 있든, 그 사람을 기억하면서 둘 사이에서 낳은 것을 함께 양육하지요. 그래서 부부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 덕분에 생겨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유대감과 변치 않는 사람이 생겨납니다. 이 둘은 부부가 낳은 자식보다 더 아름답고 영원히 죽지 않는 자식을 공유하기 때문이지요. 누구라도 사람의 자식보다는 그런 자식을 낳길 바랄 것입니다. … 어떤 사람이 육신의 자식을 낳았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사당을 지어주고 제사를 지내는 경우는 전혀 없었습니다.
물론 앞서 말했듯 이는 '플라톤을 통해 전해 들은 소크라테스'의 모습이기 때문에 진짜로 소크라테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저 '플라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악처 크산티페가 아니라 악부 소크라테스가 맞는 표현이다'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그는 굉장히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파하고 다닌 사람이었다. '너 자신을 알라'가 종교였다면 아마도 불세출의 일등 전도사였으리라.
어느 종교든 간에 열정적인 전도사는 그 종교의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성가신 존재이며, 때에 따라서는 증오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다음 일화를 보면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미움을 받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한 번은 델포이 신전으로 가서는 신탁을 구했답니다. 이미 앞에서도 말했듯이, 오 아테네 사람들이여,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야유하지 말아주십시오. 그가 신탁을 얻기 위해 물은 것은,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여사제는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고 대답했답니다. …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여러분이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나에 대한 비방과 모함이 어디로부터 생겨났는지를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 그때부터 한동안 나는 그 신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라서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다가 많이 주저하고 망설인 끝에 신이 무슨 의미로 그런 신탁을 내렸는지를 알아보고자 한 가지 방법을 시도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지혜롭다고 소문이 자자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서 얘기해보면, ‘신께서는 내가 가장 지혜로운 자라고 단언하셨지만, 당신이 나보다 더 지혜로운 것이 분명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함으로써 그 신탁을 반박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그 사람을 시험하려고 함께 만나 깊이 대화를 해보았습니다. 여기에서 굳이 그 사람의 이름을 밝힐 필요는 없겠지만, 그는 정치가였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여, 내가 그와 대화하며 그를 시험하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많은 사람이 그를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특히 자기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자신을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나의 그런 행동은 그와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많은 사람에게 미움을 샀습니다.
나는 그 자리를 떠나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 두 사람 모두 대단하고 고상한 무엇에 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은 동일하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자기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착각하는 반면에, 나는 그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모르지만 내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착각하지는 않는 것을 보니, 내가 그 사람보다 더 지혜롭기는 하구나.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적어도 이 작은 것 한 가지에서는 내가 그 사람보다 더 지혜로운 것 같아 보이는군.’
그런 일이 있은 후에, 나는 앞서 만난 사람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되는 또 다른 사람을 찾아가서 만났지만, 똑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나는 그 사람을 비롯해서 거기에 있던 다른 많은 사람에게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나는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슬프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신께서 주신 신탁의 의미를 푸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의미를 찾아내려면 지식으로 명성이 자자한 모든 사람을 찾아가서 만나는 것이 꼭 필요해 보였습니다. … 최고의 명성을 지닌 사람들은 대체로 결함이 아주 많아 보였고, 그들보다 못나고 부족하다고 여긴 사람들이 더 나은 분별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해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가 재판장에 불려 간 배경에는 정치적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말년에 정치적 문제에 휘말려서, 결국 불경죄와 청년들에게 궤변을 가르쳤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당하게 된다. 당시 아테네는 기존의 민주정 세력과, 스파르타의 법을 새롭게 차용하고자 한 귀족정인 과두정 세력 간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 민주정 세력은 과두정 세력에 경고하는 의미로 소크라테스를 처형했다. 그는 현실 정치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가르침들은 민주정을 비난하고 과두정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의 제자와 친구들 상당수가 과두정 세력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를 마주한 정치인들에게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은 좋은 먹잇감이었을 것이다. 오직 '너 자신을 알라'교의 일등 전도사는 그렇게 모두가 스스로를 잘 알고 있는, 완전하고 순수한 지혜로 가득 찬 세상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