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nugeun Oct 23. 2022

2022 제45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독서록

글잘쓰는아해가쓴잘쓴글이모였소.(저녁놀은없는것이차라리나앗소)

문학사상에서 출판하는 제45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읽었다.

 화면을 캡처하고 나니 ‘<’와 ‘>’가 눈에 띈다. 귀여운 버그들이 개발자들의 눈을 피해 용케 잘 숨어 있었다.

 서점에 가면 생각보다 많은 문학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동안 문학동네에서 출판하는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만 읽었다. 요즘 문단의 최신 트렌드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젊은 작가'라는 키워드가 좋았고, 단편 소설이기 때문에 틈틈이 짧고 빠르게 읽고 빠지기에도 좋을 것 같았다. 책을 펼치려고 할 때 은근히 찾아오는 부담감을 적당히 덜어주는 트렌디한 표지 디자인도 마음에 들었다.

 말이 나온 김에 두 문학상 작품집 표지 디자인을 비교해 봤다. 먼저 아래는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표지다.

 그리고 아래는 이상 문학상 작품집 표지다. 언뜻 보면 같은 책 네 권을 늘어놓은 것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겠다.

 가뭄에 단비 같은 여가 시간에 쉽게 손이 가기 힘든 표지다. 왠지 심각한 주제를 쉽게 읽히지 않는 문장으로 적어 놓아서 가뜩이나 무거운 심신에 또다시 큰 짐을 얹게 될 것 같은 표지였다.

 그러다 돌연 이 책을 선택한 건 젊은작가상의 최근 수상작 중에 전혀 공감할 수 없었던 작품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궁금했다. 젊은작가상만 그런 소설에 후한 평가를 주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요즘 문학계 전체가 그런 흐름인 것인지.

 그런데 왜 다른 문학상이 아니라 이상문학상을 고르게 됐을까. 이상문학상은 최근에 민감한 이슈가 터졌던 문학상이다. 음. 2019년이면 최근이 아닌가. 어렸을 때는 3년이면 중학교나 고등학교 시기 전체를 아우르는 기간이었고, 당시 전부라고 생각했던 교우 관계가 통째로 물갈이되기도 했던 시간인데 이제 코로나 때문인지 나이 때문인지 육아 때문인지 3년 정도는 엊그제 일같이 느껴진다. 당시 분위기로는 이상문학상은 이제 문학상으로서의 생명이 끝날 것 같았는데 어느새 다시 부활했다. 아래는 한국일보 기사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010415370000933?did=GO


 이상문학상 논란은 지난해 상반기 한국 문학계를 가장 뜨겁게 달군 이슈였다. 우수상 수상자인 김금희 작가가 수상작의 저작권을 3년간 문학사상 측에 양도하고 이후 단편집에 싣더라도 표제작으로 쓸 수 없다는 계약 조항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논란이 촉발됐다. 최은영, 이기호 작가도 연대 의사를 밝히며 수상을 거부했고, 여기에 2019년 수상자인 윤이형 작가가 "상에 대해 항의할 방법이 활동을 영구히 그만두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며 절필을 선언하면서 논란은 더욱 커졌다.

 수상 작가가 절필을 선언하고 그 소식이 여러 메이저 언론에 크게 보도될 정도로 강력한 타격을 입었던 문학상이었는데 역설적으로 그 논란 때문에 이 책으로 손이 갔다. 논란을 접하기 전에는 큰 관심이 없었는데 서점에서 이 책을 보는 순간 그때의 논란이 생각나서 충동적으로 집어 들어 계산하고 가져왔다.

 대상 수상작인 손보미 작가의 ‘불장난’이 가장 먼저 실려있고 그 뒤로 손보미 작가의 ‘임시교사’가 실려 있다. 대상 수상작 작가에 한해 대표작을 한 편 더 실어주는 모양이었다(덕분에 예전에 한 번 읽은 작품이라 내용을 다 알고 읽었음에도 또 한 번 재밌게 읽었다). 이어서 강화길 작가의 ‘복도’, 백수린 작가의 ‘아주 환한 날들’, 서이제 작가의 ‘벽과 선을 넘는 플로우’, 염승숙 작가의 ‘믿음의 도약’, 이장욱 작가의 ‘잠수종과 독’, 최은미 작가의 ‘고별’이 실려있다.

 8개 작품(+ 수상 소감과 작가론) 중에서 내 취향과 잘 맞아 완전히 빠져들어 읽어 내려간 작품에 대한 감상을 남겨보려고 한다.


손보미 작가, ‘불장난’

 ‘불장난’은 한 소녀가 불장난을 계기로 만나게 된 착각과 기만, 허상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때, 나는 그녀의 어떤 부분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저 자신의 경험을 관통해야만 세상을 명료하게 인지할 수 있는, 그리고 한 번 결론을 도출하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절대 수정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사람. 그녀는 자신이 경험한 것 (이면이 아니라)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는 기꺼이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세상의 비밀 하나를 알게 되었다고 느꼈다. 누구도 가닿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도달했다고. 그 세계는 터무니없으면서 치명적이고 느긋하면서도 통렬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내 마음속에 꼭꼭 새겨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그런 생각은 시간이 흐른 후에 착각, 기만, 허상에 불과하다고 판명이 날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때때로 삶에서 가장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건, 바로 그런 착각과 기만, 허상에 기꺼이 내 몸을 내주는 일이라고. 그런 기만과 착각, 허상을 디뎌야지만 도약할 수 있는, 그런 삶이 존재한다고. 언젠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돌이켜 보는 눈 속에서 어떤 사실들은 재배열되고 새롭게 의미를 획득한다. 불가피하게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며, 허구가 사실이 되고 사실이 허구가 되는 그런 순간들! 그러므로 이 여정 자체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돌이켜 보는 눈의 진짜 용도가 될 것이다.


 불장난을 읽은 뒤 어느 날 TV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우리나라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원작인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을 보게 됐다. 영화에서는 이런 대사가 흘러나왔다.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aver?code=129459

도시 사람들은 말하는 것도 다르더라고. 사투리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들은 해 본 건 하나도 없으면서 다 경험해 본 것처럼 얘기해. 다들 말만 거창하고 남는 게 없어. 다른 사람을 조종하려고만 해. 난 경험이 많은 사람들을 존경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명백하게 다른 두 작품을 나는 모두 재밌게 즐겼다. 잘 쓰기만 했다면, 잘 만들기만 했다면 착각과 기만, 허상에 기꺼이 내 몸을 내준 직후 언제 그랬냐는 듯 그것들을 경멸하고 진실과 사실과 경험만을 좇다가 다시 착각과 기만에 젖어 살 수 있다. 무상(無常). 요즘 피부로 체험하고 있는 단어가 무상이다. 변하지 않는 게 없다는 사실만 변하지 않는다. 내 취향도, 내 성격도, 내 생각도, 내 기분만큼이나 수시로 변한다.

 대상 수상작에 한해 작품 뒤에 수상 소감과 작가론 등을 실어줬는데 이게 소설만큼이나 재밌었다.

어떤 식의 마음가짐으로 소설을 쓰는 것이 옳은 일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떤 방식으로 소설을 쓰는 것이 좋은 것인지도 나는 알지 못한다. 알게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찾아온 적도 있고 또 앞으로도 그럴 수 있겠지만, 결국은 수정되고야 말 사항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왕좌왕하면서 계속 써나가는 과정을 통해, 어쩌면 더 비열하고 이기적인 손보미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고, 고개를 돌려 버리고 싶을 때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돌리지 않는 것, 용기를 가지고 계속 써나가야 한다는 것, 그래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덧붙이고 싶은 게 있다. 지금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 갑자기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 도입부의 마지막 부분을 이렇게 수정하고 싶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쓰는가. 손보미 작가의 마음도 무상이었다. 대상을 수상한 작품의 작가의 말에서 고치고 싶은 부분이 있다고 말할 정도로. 그 마음을 너무 잘 알겠다. 글에는 꼭 내 손을 떠나고 나서야 눈에 들어오는 못난 부분들이 있다.  

거기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너무 열심히 일을 해서, 딴짓을 할 때마다 무언가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어쨌든 나는 두 달 동안 그곳에 출근 도장을 찍듯이 나가서 소설을 썼다. 매일, 하루에 이천 자를 쓰는 게 목표였지만, 지키는 날보다 지키지 못하는 날이 훨씬 더 많았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어서 가방을 챙길 때는 울적해졌지만, 희한하게도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면서, 내일은 꼭 이천 자를 써야지! 하고 다짐할 때는 언제나 희망에 차곤 했다.

 수상 소감에 가슴 깊이 공감하며 책장을 넘기니 서효인 작가가 손보미 작가에 대해 쓴 작가론이 나왔다. 책이 업인 그의 이야기에서 ‘소설 읽기’를 자신의 ‘업무’로 바꾼다면 아마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다 내심 가책이 들어 더는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지 안 되고말고, 하며 겨우겨우 책을 펼쳤다. 책에는 무언가 긴 것들이 있는데, 긴 그것들을 마주할 용기와 시간이 도대체 생기지 않았다. 왜 이걸 읽어야 하지? 소설이 읽는 이에게 남기는 생채기를 이제 더 감당하기 싫었다. 괜스레 상기되는 상실감과 죄의식 같은 게 예전처럼 반갑지 않았다. 쉽사리 결론 낼 수 없는 삶의 아이러니 같은 것도 깊이 생각하기 싫었다. 곱씹어야 이해되는 문장과 그 문장들로 구성하고 상상해야 하는 장면들도 이제 버거웠다. 그렇게 내 속에서는 우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울음이 계속되었다. 이렇게 소설을 읽지 않게 되다니, 나는 안 될 거야. 내 삶은 실패로 귀결될 거야. 사람들이 읽지 않는 책을 만들며 조롱과 멸시를 받을 거야.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게 점점 더 힘들 거야. 상처 입을 거야. 이미 상처 입었어. 치유할 수 없어. 그러면서 울었다. 그러니까 그해 겨울에, 나는 매일매일 울었다. 나의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나 역시 종종 내가 우는 소리를 듣는다. 지겹고 짜증 나는 그 울음소리와 함께 스스로 글러먹은 인생이라고 생각하면서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는다. 그러다 다음 날 아무 이유 없이 자신감으로 가득 차서 희망찬 미래를 그리며 솟아오르기도 하고.


백수린 작가, ‘아주 환한 날들’

 종종 2019년에 읽었던 백수린 작가의 ‘시간의 궤적’이 떠오른다. 사랑에 관해서, 조금씩 쌓이다 결국 분출되는 인물들의 감정을 불안한 시선과 차분한 문체로 그려낸 작품이었다. 이번 작품 역시 사랑에 관한 내용이었다. 모든 게 지나간 뒤 모든 걸 내려놓고 그저 나만 돌보면서 무심하게 지내고 싶었던 노년의 삶에 갑자기 앵무새가 찾아오면서 벌어진 일을 그린 소설인데 이토록 섬세하게 감정의 변화를 표현하다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빈 페이지를 펼쳤다. 무언가가 쓰고 싶었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마음을 들여다보세요.” 강사는 수업 시간에 그렇게 말하곤 했다. 글을 쓰기 위해선 마음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하지만 마음을 들여다보는 건 너무 무서운 일이지, 너무 무서워.
 그녀는 식탁에 앉아 ‘앵무새'라고 써봤다. ‘앵무새가 갔다'라고 쓰려다 ‘가버렸다’라고 썼다. ‘앵무새가 가버렸다'라는 문장을 보자 너무 고통스러워 그녀는 눈을 감아야 했다. …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 그녀의 늙고 지친 몸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번져 나갔다.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 온 그녀에게 그런 일이 또 일어났다니.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후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고 마는 데 나이를 먹는 일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백수린 작가는 사랑을 깊이 통찰해서 일상에 녹여내는 솜씨가 정말 뛰어나다.


서이제 작가, ‘벽과 선을 넘는 플로우’

 2022년 제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 ‘두개골의 안과 밖’이라는 충격적인 작품을 선물해 줬던 서이제 작가를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또 만났다. ‘두개골의 안과 밖’은 파격적인 형식에 눈은 즐거웠지만 소설의 주제에는 조금 공감하기 어려웠는데 이번 소설은 주제까지 취항 저격이었다.

서이제 작가는 내가 생각한 소설의 경계를 가볍게 무너뜨리고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그대로 현실화시켰다. 이번에는 힙합과 소설의 콜라보를 소설의 형식으로 완벽하게 완성해 냈다. 글 속에서 서이제 작가는 그 누구보다도 자유롭게 날아오른다. 학창 시절 이상의 오감도를 읽으며 느꼈던 독특하고 창의적인 괴이함을 서이제 작가의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탄탄한 실력을 기반으로 한없이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작가가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부럽다.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기분은 별로 유쾌하지 않다. 그런데 부럽다. 너무 부럽다.


또다시 하늘에 드리워진 불길한 ‘저녁놀’

 젊은작가상에서 가장 최악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던 김멜라 작가의 ‘저녁놀’을 수상작에서는 피할 수 있었지만 선정 경위와 심사평에서 결국 마주치고 말았다. 후보에는 올라왔던 모양이었다. 내가 젊은작가상이 아니라 다른 문학상은 어떤지 궁금하게 만든 바로 그 소설.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구매하게 만든 바로 그 소설을 결국 피해 가지 못했다. 빌어먹을. 저들의 방향이 틀린 것인가. 아님 내 생각이 뒤처지고 있는 것인가.

매거진의 이전글 소크라테스 변명, 크리톤, 파이돈, 향연, 독서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