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집어삼키는 파도: 시련을 대하는 태도

​제1부. 심연의 부름: 무너진 삶이 바다 앞에 설 때

by 산 사람

​[부제: 저항할 수 없다면 리듬을 타라]


등대 벽을 때리는 파도 소리는 단순한 소음이 아니었다.

거대한 쇳덩이가 돌을 찍어 누르는 울림, 오래된 세계가 자기 폐부를 쥐어짜며 토해내는 숨 같은 것이었다. 파도는 매번 다른 얼굴로 부서졌지만, 등대는 같은 자리에서 그 모든 얼굴을 받아냈다. 화강암 벽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이 바닥의 돌틈을 지나 사내의 발등을 훑고 올라와, 척추 끝에서 멈칫하고 굳었다.

등대 안은 벽난로의 온기로 채워져 있었지만 사내의 어깨는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젖은 외투는 무겁게 몸에 달라붙어, 마치 바다가 그를 통째로 삼켰다. 뱉어낸 허물 같았다. 그는 구석에 몸을 웅크렸다. 그 자리는 이상하리만치 빛이 덜 닿았다. 등대가 뱉어낸 어둠의 찌꺼기가 모이는 자리 같은 공간에서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 웅덩이가 있었다.

벽난로 앞에는 마른 장작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장작의 단면에는 촘촘한 나이테가 드러나 있었다. 사내는 그 나이테를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에게도 저런 시간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한 겹, 한 겹. 지켜낸 날과 망가진 날이 겹쳐져 지금의 사람이 되는 법인데, 그는 늘 ‘겉’만 새로 칠하려 했다. 속의 결을 들여다볼 틈이 없었다.

노인 해언이 투박한 흙빛 머그잔을 내밀었다. 손잡이 한쪽이 닳아 있었다. 오래 같은 손이 같은 각도로 쥐었을 때 생기는 마모였다. 잔 속에는 짙은 호박색 액체가 담겨 있었고, 표면에는 아주 미세한 기름막이 얇게 떠올라 있었다. 차라기보다 ‘달인 시간’의 맛에 가까웠다. 입술에 닿기 전에 코끝부터 먼저 데웠다.

사내가 잔을 받자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도드라졌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 손은 수십 장의 서류 위에 인장을 찍으며 사람들의 하루를 결정하던 손이었다. 그는 한때 실크 넥타이의 매끄러운 감촉, 먼지 하나 없는 대리석 데스크의 냉기, 유리 상판을 문지르면 나는 미끄러운 소리에 익숙했다. 회의실 문이 닫히는 소리만으로도 권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손바닥을 찌르는 것은 화강암 벽의 거친 숨결과 세월에 부풀어 오른 나무의 옹이, 그리고 젖은 외투가 말라가며 만들어내는 눅진한 냄새뿐이었다. 뜨거운 잔의 열기가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사내는 그 온기조차 자신을 조롱하는 듯 느꼈다. 따뜻해질수록 더 차가운 것이 드러나는 법이었다.


“아직도 밖의 소리가 무서운가?”


해언이 창틀에 맺힌 소금기를 마른 수건으로 닦아내며 물었다. 수건이 유리를 훑는 소리는 규칙적이었다. 소금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등대 안은 고요했다. 바깥은 소란이었으나, 고요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사내는 그 사실이 더 서글펐다. 자신은 한때 숫자와 속도에 능했는데, 이제는 수건 소리로 마음을 진정시키려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내는 대답 대신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쌉싸름한 맛이 혀끝을 스치고 내려가 가슴 안쪽 어딘가에 닿았다. 그러나 그곳에 오래 자리한 얼음덩어리는 녹지 않았다. 차는 길을 알고 있었지만, 마음은 길을 잃은 채였다.


“무섭지 않을 리가 있습니까.”


사내의 목소리는 젖은 종이처럼 눅눅하게 찢어졌다.


“저 파도는… 제 인생을 덮친 파산과 꼭 닮았습니다. 예고도 없이, 자비도 없이. 십수 년 동안 벽돌을 쌓듯 올린 모든 것이… 단 한 번의 썰물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가 ‘썰물’이라는 단어를 뱉는 순간, 입 안에서 소금맛이 났다. 마치 그 단어가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몸속에 들어와 있었던 것처럼.


“저는… 모래성 위에 서 있던 어린아이처럼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게 가장 끔찍합니다.”


해언은 닦던 창틀에 손을 멈추고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 웃음은 조롱이 아니었다. 오래전에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도 던졌던 사람의 웃음이었다. 그는 고개를 까딱이며 사내를 창가로 불러들였다.

사내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창 너머를 응시했다. 달빛조차 투과하지 못하는 검은 심연이 물벽을 세우더니, 이내 하얀 거품을 광기 어린 침처럼 내뿜으며 절벽 아래로 산산이 부서졌다. 그 광경은 유령의 비명보다 현실적이었다. 유령은 상상이라도 가능하지만, 파도는 상상 밖에서 당장 몸을 후려쳤다.

등대 내부는 그때 비로소 더 또렷해졌다.

벽은 두껍고, 오래된 균열이 미세하게 뻗어 있었다. 균열 사이로 바닷바람이 아주 얇게 스며들어왔다. 불쾌하지 않았다. 등대가 살아 있다는 표시 같았다. 완벽히 밀폐된 곳이 아니라, 바다와 연결된 채 버티는 공간.

나선형 계단은 위로 말려 올라가며 어둠 속으로 이어졌다. 계단의 중앙에는 굵은 축이 있었고, 그 축을 타고 등대의 리듬이 위아래로 전달되는 듯했다. 사내는 잠시 그 축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도 저런 축이 있었던가. 있었다면, 어디서 부러졌을까.


“저 파도가 자네를 죽이러 온 것 같나?”


해언이 물었다.

사내는 웃음인지 이를 악문 것인지 모를 표정으로 답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걸 집어삼키고 파괴하려는 광기만 느껴집니다.”


해언의 시선은 사내가 아니라 창밖의 물결을 아주 부드럽게 따라가고 있었다. 그는 파도를 미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파도는 그의 언어였고, 그는 오래 그 언어를 배운 사람처럼 보였다.


“자네는 저 물벼락이 자네의 회사가 무너진 날처럼 특별한 악의를 품고 있다고 믿는 모양이군.”


해언은 잠시 말을 끊었다. 그 사이, 벽난로에서 장작이 “탁” 하고 터졌다. 사내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해언은 그 움짤을 꾸짖지 않았다. 그냥 보았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하지만 보게나. 저 파도는 자네를 미워해서 때리는 게 아니야. 그저 바다가 제 가슴속에 고인 숨을 크게 한 번 내뱉는 것뿐이지. 바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상적인 호흡일세. 자네의 성공과 실패에 바다는 관심이 없다네.”


“그게 더 잔인한 거 아닙니까!”


사내의 목소리가 등대 안의 공기를 갈랐다. 벽난로 불꽃이 잠시 크게 흔들렸다. 바람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관심이 없어서… 제 인생을 이토록 무참히 짓밟았다는 겁니까? 차라리 벌이라면 억울하지라도 않겠습니다. 이유도 없이 모든 걸 잃고 수장되어야 한다면… 인간의 의지는 대체 무슨 소용입니까?”


말할수록 목이 잠겼다. 분노는 뜨거웠지만, 그 뜨거움은 자신을 살리는 불이 아니라 자신을 태우는 불 같았다. 그는 잔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뜨거운 잔이 피부를 데웠지만, 그 통증조차 살아 있음의 증거가 되지 못했다. 그는 무언가를 증명하고 싶었다. 자신이 무가치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자신이 한때 ‘쓸모’가 있었고, 지금도 ‘쓸모’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것. 그런데 그 증명이 어디에서 가능한지, 그는 알지 못했다.

해언은 말없이 등대 한구석, 먼지 쌓인 선반 위에 놓인 낡은 목선 모형을 가리켰다. 돛은 누렇게 바랬고, 선체의 목재는 물을 오래 먹은 나무처럼 짙은 결을 드러냈다. 여기저기 옹이와 균열이 있었고, 어떤 곳은 얇은 나무로 덧댄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수선의 흔적이 오히려 배를 더 단단하게 보이게 했다.


“저 배를 보게나.”


해언이 말했다.


“자네는 폭풍 속에서 배가 침몰하는 이유가 바닷물이 주위를 사납게 휘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당연한 거 아닙니까? 물이 넘쳐서 들어오니까 가라앉는 거죠.”


“아니네.”


해언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그는 배의 작은 균열을 손끝으로 짚었다. 그 손끝이 나무 결을 따라 움직이는 속도는 느렸지만 정확했다. 말보다 손이 먼저 확신을 보여주었다.


“배가 가라앉는 것은 주위의 물 때문이 아니라, 그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라네.”


사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라는 말이 너무 정확해서, 자신이 숨겨 온 것들이 들켜버린 듯했다.


“시련이라는 외부의 파도가 자네를 무너뜨리는 게 아니야. 그 시련을 바라보며 자네가 만들어낸 공포와 저항이라는 균열… 자네 스스로가 ‘나는 이제 끝장이다’라고 믿으며 열어버린 그 틈을 타고 들어온 절망이 자네의 내면을 잠식할 때, 사람은 비로소 침몰하는 것이지.”


해언은 찻잔을 쥔 사내의 손을 툭 쳤다. 놀랄 만큼 가벼운 손길이었다.


“지금 자네를 가라앉히는 건 창밖의 파도가 아니라… 자네가 이 잔을 쥐고 흘리는 그 마음속의 짠물이네.”


사내는 숨을 들이켰다가 끝까지 들이켜지지 못해 목젖 근처에서 막혔다. 그의 안에 물이 들어찬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무너진 이유를 시장의 흐름, 배신한 동료, 불운한 시기 탓으로 돌리려 애써왔다. 바깥을 탓하면 안쪽은 잠시 숨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해언은 그 숨는 자리까지 정확히 찾아냈다.

해언은 창문에 비친 파도의 궤적을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따라 그렸다. 파도는 형체가 없는데도, 그의 손끝은 마치 보이는 선을 더듬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바다에 사는 자들은 파도를 멈추려 들지 않아. 파도가 높게 치면 배는 마땅히 그 높이만큼 솟구쳐 올라가야 하네. 파도가 낮아지면… 다시 아찔한 골짜기로 내려가야 하지. 그게 항해의 리듬이라네.”


사내는 그 말이 싫었다. ‘리듬’이라는 단어는 너무 아름다워서 자신이 겪은 추함을 덮어버릴 것 같았다. 그는 진짜로 원했다. 멈추게 하고 싶었다. 파도를. 시장을. 사람들의 시선을. 빚을. 밤을. 그 모든 것을 한 번만 멈추면, 자신은 다시 제대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움켜쥐려 애쓰지 말고, 그 흐름 위에 자네라는 배를 띄우는 법을 배우게나.”


해언이 난로 옆 작은 탁자에서 장작을 하나 집어 들었다. 장작 표면에는 소금기 섞인 습기가 얇게 붙어 있었다. 그는 그 장작을 불 속에 넣기 전에 잠시 손바닥으로 쓸었다. 불이 아니라, 나무를 먼저 느끼는 듯했다.


“저항을 멈추고 파도의 리듬에 자네의 호흡을 맞추기 시작할 때, 파도는 자네를 집어삼키는 괴물이 아니라… 다음 항구로 실어다 줄 유일한 동력이 될 걸세.”


사내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저항을 멈춘다는 것은 패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육체는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해 뻑뻑해진 눈, 속이 텅 빈 것처럼 울렁거리는 위장, 돌덩이처럼 굳은 어깨가 소리치고 있었다. 그는 강한 사람의 습관대로 버티려 했지만, 지금은 버틸 힘이 없었다.

그는 해언의 말대로 잠시 눈을 감았다.

여전히 등대 벽 너머로는 세계가 멸망할 듯한 파도 소리가 진동하고 있었지만, 그 날카로움은 조금 전보다 뭉툭해진 기분이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등대 안에는 파도와 다른 리듬이 있었다.

어딘가에서 낮은 기계음이 일정하게 울렸다. 램프실의 회전축이 도는 소리였다. 웅— 하고 바닥을 타고 올라왔다가, 잠시 숨을 고르는 듯 멎고, 다시 웅— 하고 이어졌다. 그 소리 사이로 벽난로 불꽃이 장작을 씹는 소리, 장작이 터지는 소리, 해언이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맞물렸다. 등대는 하나의 악기처럼 자기 리듬을 연주하고 있었다. 폭풍 속에서도 음정을 잃지 않는 악기.

사내는 그 리듬 위에 자신의 호흡을 얹어보았다.


숨을 들이마시고—

파도가 부서지는 순간에 내뱉는다.

다시 들이마시고—

등대가 웅— 하고 울리는 순간에 내뱉는다.


처음에는 억지였다. 숨이 들쭉날쭉했고, 가슴이 자꾸 막혔다. 그런데 몇 번 반복하자 아주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 파도 소리가 줄어든 것이 아니었다. 파도는 여전했다. 다만 사내의 내부에서 파도 소리를 받는 방식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파도가 목을 조르는 소리였다면, 지금은 어깨를 흔드는 소리처럼 바뀌었다.

그리고 그때, 등대의 불빛이 창을 스치며 지나갔다.

사내는 눈을 감은 채로도 그 빛을 느꼈다. 어둠을 훑는 속도, 사라지는 순간의 공백, 그것이 호흡의 길이와 맞물렸다.

들이마시는 숨에 등대 램프가 어둠을 훑고,

내뱉는 숨에 빛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그의 폐가 등대의 램프실과 연결된 거대한 풀무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사내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태풍이 사라져야 고요해지는 것이 아니라,

고요를 찾아내는 순간 태풍은 ‘전부’가 아니게 된다는 것을.

해언은 그런 사내를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오래 바라보는 건 위로의 모양이고, 해언은 위로의 모양보다 삶의 기능을 더 믿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벽난로 옆 작은 선반에서 유리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라벨에는 ‘소금’이라고 적혀 있었다. 병 안의 소금은 굳어 있었다. 작은 덩어리들이 서로 달라붙어 흩어지지 않았다.


“보게.”

해언이 말했다.


“소금은 물을 만나면 녹을 것 같지? 그런데 바람이 오래 불고 시간이 오래 지나면… 다시 굳어버린다네. 자네 마음속 짠물도 같아. 흘러나오게 두지 않으면 굳어서 돌이 되지.”


사내는 그 말을 듣고,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아주 작게 부서지는 느낌을 받았다.

부서질 수 있는 돌.

그는 그 부서짐이 무너짐이 아니라, 통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이 빠져나갈 길. 숨이 나갈 길.


“지금 자네가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뿐이라네.”


해언이 장작을 하나 더 던져 넣었다. 불꽃이 잠시 크게 솟았다가 이내 제 크기로 가라앉았다. 오르내림 자체가 리듬이었다.


“밖의 폭풍이 잦아들기를 기도하는 게 아니라… 자네 안의 폭풍을 먼저 잠재우는 것. 저 끔찍한 파도 소리가 위협적인 소음이 아니라, 삶이라는 거대한 교향곡의 한 악장으로 들릴 때까지… 그저 듣고, 느끼고, 받아들이게나.”


사내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여전히 창밖은 전장이었지만, 사내의 손등 위로 솟았던 핏줄은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잔을 쥐던 손에 힘이 풀리자 손가락 끝이 처음으로 따뜻해졌다. 단순한 차의 열기가 아니었다. 자신이 ‘지금’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쌓아 올렸던 방파제가 무너진 것은 그를 가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넓은 바다로 떠밀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방파제는 안전을 주지만, 바다를 좁게 만들기도 한다. 그는 안전을 얻는 대신 자신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등대의 불빛이 다시 한번 어둠을 가르며 바다 위를 쓸고 지나갔다.

빛은 물결 위에 잠시 길을 만들었다가 곧 지워졌다.

사내는 ‘잠시’라는 단어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길은 영원히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계속 만들어졌다. 계속 지워지고, 계속 다시 그어졌다. 삶도 그럴 것이다. 영원한 안정은 없고, 대신 반복되는 리듬이 있을 뿐이다.

사내는 이제 파도가 잦아들기만을 기다리는 도망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배 안으로 스며든 절망을 퍼내고, 다시 돛을 올릴 준비를 하는 항해사의 눈빛을 아주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었다.

해언은 그런 사내의 얼굴을 보고도 칭찬하지 않았다. 대신 툭 던지듯 말했다.


“이제야, 배를 띄울 준비가 되었군.”


그 말은 축복 같지도, 명령 같지도 않았다.

그저 사실을 말하는 어조였다.

사내는 그 어조가 이상하게 좋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사이 파도는 한 번 더 등대 벽을 후려쳤고, 등대는 그 충격을 받아내며 낮게 울었다. 사내는 놀라지 않았다. 완전히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두려움이 전부가 아니게 되었다.

해언이 몸을 돌려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오래된 등대가 가진 습관처럼 천천히, 그러나 망설임 없이 올라갔다. 사내는 그 뒤를 따르려다 멈칫했다. 위로 올라간다는 것은 다시 무언가를 배운다는 뜻이었고, 배우는 일에는 늘 대가가 따랐다.


“뭘 그렇게 서 있나.”

해언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네가 배를 띄우려면, 먼저 ‘불빛’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아야지.”


사내는 계단에 발을 올렸다. 돌계단은 차가웠고 약간 젖어 있었다. 손바닥으로 난간을 잡자, 녹슨 금속의 서늘한 결이 피부에 닿았다. 그는 한 계단, 또 한 계단 올라갔다. 등대의 높이는 곧 사람의 결심 같았다. 오르기 전에는 끝이 없어 보이고, 오르는 동안에는 되돌아갈 수 없어 보이는 것.

램프실 문 앞에서 해언은 작은 열쇠를 꺼냈다. 열쇠는 손바닥에 닿자마자 차가웠고, 오래된 쇠의 무게가 있었다. 문을 여는 순간, 사내는 숨을 멈췄다.

거대한 프리즘 렌즈가 그곳에 있었다.

유리는 투명했지만, 투명함은 가벼움이 아니었다. 렌즈는 바다의 밤만큼 무거웠다. 빛은 그 렌즈를 통과하며 방향을 얻고, 세상은 그 방향 덕분에 살아남는다. 그런 물건이 너무 조용히, 너무 묵직하게 서 있었다.

해언이 천을 하나 내밀었다.

천은 깨끗했지만, 가까이서 보면 미세한 가루가 조금 붙어 있었다. 바람이 데려온 먼지였다. 세상은 늘 먼지를 보낸다. 빛이 맑을수록 더 잘 보이게.


“닦게.”

해언이 말했다.


“먼지는 눈에 잘 안 보이지. 그렇지만 저걸 그대로 두면, 빛은 틀어져. 아주 조금씩. 그러다가 언젠가 누군가가 길을 잃지.”


사내는 천을 받았다. 손가락에 천의 섬유감이 걸렸다. 그의 손끝은 아직도 떨리고 있었지만, 떨림은 이전과 달랐다. 공포의 떨림이 아니라 처음 만지는 책임의 떨림이었다.

그는 렌즈에 손을 댔다.

차가웠다.

그리고 단단했다.

그 단단함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세상에는 이렇게 단단한 것이 남아 있구나. 단단함은 누군가의 욕망이 아니라 누군가의 노동으로 남는구나.

사내는 천을 움직였다. 천은 원을 그리며 렌즈 표면을 훑었다. 원을 그리는 손의 움직임이, 조금 전 그가 배운 호흡의 리듬과 닮아 있었다. 들이마시고, 닦고. 내뱉고, 닦고.

밖에서 파도가 다시 울부짖었다.

그러나 렌즈 위에 생긴 아주 작은 맑은 자리에서, 빛이 한 번 더 또렷해졌다.

해언이 낮게 말했다.


“이제 알겠나.

리듬은 말로 배우는 게 아니야.

손으로 배우는 거지.”


사내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천을 더 조심히 움직였다.

닦는 동안,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무엇을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파도는 통제하지 못해도, 렌즈는 닦을 수 있었다. 세상은 통제하지 못해도, 자신의 손은 움직일 수 있었다. 그것이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삶이란 처음부터 그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렌즈는 다시 한번 빛을 밀어냈다.

그 빛이 바다 위를 훑고 지나가는 동안, 사내는 자신 안쪽에서도 무엇인가가 조용히 정렬되는 느낌을 받았다. 무너졌던 방향이, 아주 조금, 다시 세워지는 느낌.

등대는 폭풍 속에서도 같은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사내는 그 리듬이, 이제부터는 자신의 리듬이 될 수 있음을, 손끝에서 먼저 배워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