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침몰하지 않는 법: 짐을 버려야 배가 뜬다

제1부. 심연의 부름: 무너진 삶이 바다 앞에 설 때

by 산 사람

[부제: 비워내야 비로소 가벼이 흐를 수 있다]


등대에서의 아침은 도시의 아침과 달랐다.

알람도, 출근을 재촉하는 소리도 없었지만, 해언은 해가 떠오르기 훨씬 전 사내를 깨웠다. 바다는 아직 밤의 색을 머금고 있었고, 안개는 물처럼 낮게 깔려 있었다. 사내는 잠결에 몸을 일으키며 잠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잊었다가, 등대의 돌벽을 손으로 짚고서야 현실을 받아들였다.


“올라가세.”

해언의 말은 짧았다.


사내는 묻지 않았다. 묻는 것이 점점 의미 없어지고 있었다. 그는 해언의 뒤를 따라 나선형 계단을 올랐다. 계단은 여전히 가팔랐고, 발을 디딜 때마다 철이 낮게 울렸다. 전날 밤보다 몸은 더 무거웠지만, 이상하게도 발걸음은 덜 흔들렸다.

등대 꼭대기 층에는 거대한 수정 렌즈가 자리하고 있었다.

밤새 폭풍을 견딘 흔적처럼, 유리 표면에는 기름 그을음과 소금기, 먼지가 뒤엉켜 있었다. 옆에는 등유통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고, 바닥에는 마른 헝겊과 솔, 양동이가 흩어져 있었다.

해언은 말없이 낡은 광택 천 하나를 사내에게 던졌다.


“자네, 저 렌즈를 닦게나. 한 치의 얼룩도 남기지 말고.”


사내는 잠시 렌즈를 올려다보았다.

어젯밤, 불이 켜졌을 때의 빛이 스쳤다. 그 빛이 바다를 가르고 나가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의 렌즈는 탁했고, 흐렸다. 그는 천을 받아 들며 마음 한편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결재 서류를 넘기던 사람이었다.

사람들의 표정을 읽고, 숫자를 계산하고, 결과를 예측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절벽 끝 등대에서 유리를 닦고 있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평가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렌즈 앞에 섰다.

천을 물에 적셔 유리를 문질렀다. 처음에는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생각보다 얼룩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한 번 닦을 때마다 다른 자국이 드러났다. 힘을 주면 자국이 번졌고, 힘을 빼면 그대로 남았다.

한참을 닦다 사내는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노인장.”

해언은 등유를 옮겨 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이깟 유리를 닦는다고 제 망가진 인생이 복구됩니까? 저는 지금 당장 돈을 벌 방법이나, 사람들의 비난을 피할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게 무슨 소용이 있죠.”


해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등유통의 뚜껑을 닫고,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꾸짖지도, 달래지도 않았다.


“자네는 배가 가라앉을 때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물을 퍼내야죠. 구멍을 막고… 아니면 밖으로 나갈 방법을 찾아야 하고요.”


“아니라네.”

해언은 고개를 저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짐을 바다로 던지는 것이야.”

사내의 손이 멈췄다.


“배가 무거우면 아무리 물을 퍼내고, 구멍을 막아도 결국 가라앉게 되어 있지. 자네가 지금 당장 대책을 세우지 못해 미칠 것 같은 이유는, 여전히 자네 마음속 배에 ‘버리지 못한 짐’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라네.”


사내는 천을 쥔 채 렌즈 앞에 서 있었다.

해언의 말은 위로라기보다 설명에 가까웠다.


“남들에게 보이고 싶었던 화려한 경력, 잃어버린 재산에 대한 집착, 실패했다는 수치심…. 그게 다 자네를 바다 밑으로 끌어내리는 돌덩이들이야. 사람들은 채우는 법만 배우지, 위기의 순간에 무엇을 버려야 사는지는 배우지 못하지.”


해언은 렌즈를 가리켰다.


“자네가 지금 이 유리를 닦는 건, 얼룩을 지우는 게 아니야. 자네 영혼에 매달린 그 무거운 짐들을 하나씩 바다로 던지는 연습이지.”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렌즈를 닦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속도를 늦췄다. 힘을 조절했다. 뽀득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숫자가 떠올랐다.

잔고, 부채, 계약서의 조항들. 그는 그 숫자들을 애써 붙잡으려다, 문득 놓아버렸다. 다음에는 사람들의 얼굴이 스쳤다. 등을 돌린 동료들, 실망한 가족의 표정. 그것들도 천을 움직일 때마다 흐릿해졌다.

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 렌즈 위로 떨어졌다.

햇빛이 점점 강해졌고, 렌즈는 조금씩 맑아졌다. 이상하게도 렌즈가 투명해질수록 머릿속도 조용해졌다. 생각이 사라진 자리에, 손끝의 감각만 남았다.


“짐을 버린다는 건….”

사내가 나직이 말했다.


“포기하는 게 아니었군요.”

해언은 짧게 웃었다.


“그건 선택이라네. 배를 살리기 위해 화물을 포기하는 용기지. 다 버리고 나면 배는 아주 가볍게 수면 위로 떠오를 걸세. 그때 비로소 파도가 자네를 집어삼키는 게 아니라, 자네를 밀어 올린다는 걸 알게 되지.”


정오 무렵, 렌즈는 눈이 부실 만큼 투명해졌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바다는 더 이상 검은 벽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사내는 천을 내려놓고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빈손이었다. 그러나 그 손은 이전보다 훨씬 자유로워 보였다.

그는 깨달았다.

그동안 자신이 움켜쥐고 있던 것들이, 사실은 자신을 가라앉히던 무게였다는 것을.

해언은 사내의 어깨를 툭툭 쳤다.

사내는 고개를 들었다.


“가벼워진 배는 이제 어디로든 갈 수 있지. 하지만 그전에, 자네 안의 등불을 켜는 법을 더 배워야 하네.”


등대 밖 수평선 너머로 윤슬이 반짝였다.

바다는 여전히 넓었고, 사내의 미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그의 마음속 배는 더 이상 가라앉고 있지 않았다.

그는 떠날 준비도, 남을 결심도 하지 않았다.

다만,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채로 수면 위에 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