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렌즈를 닦는 마음: 흐려진 당신의 시야를 선명

​제2부. 등대지기의 일과: 멈춤 속에서 빛을 닦는 시간

by 산 사람


[부제: 밖이 보이지 않을 때는 안을 닦아야 한다]

등대 꼭대기의 밤은 지상의 밤보다 훨씬 길었다. 사내는 그 사실을 시계의 초침 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박동하는 맥박과 서서히 굳어가는 근육의 통증으로 느꼈다. 지상의 밤은 화려한 네온사인과 끊임없는 소음 속에서 망각의 늪으로 사라지지만, 이곳의 밤은 날것 그대로의 어둠이었다. 밤은 쉽게 끝나지 않았고, 어둠은 서두르지 않았다. 바다는 거대한 짐승처럼 숨을 고르듯 잔잔했다가도, 문득 아무 이유 없이 깊은 심연에서부터 파도를 일으켰다. 그 소리는 차가운 돌벽을 타고 올라와 등대 안의 공기 중으로 스며들었다.
해언은 사내를 깨웠다. 아직 서쪽 하늘에 보랏빛 잔광이 남아, 해가 완전히 지지 않은 시간이었다. 노인은 구석에 놓인 낡은 나무 상자를 열었다. 그 상자 안에는 수십 년의 세월을 견뎌온 붓들과 결이 고운 비단 헝겊이 정돈되어 있었다. 붓은 오래 써서 끝이 닳아 있었고, 헝겊에서는 독한 기름 냄새와 차가운 금속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것은 무언가를 관리하고 유지하는 자들이 풍기는 특유의 체취이자,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을 지키는 자의 훈장 같았다.

“오늘은 안을 닦을 차례네.”


해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좁은 등대 안을 꽉 채우는 무게감이 있었다. 사내는 고개를 들었다. 어제 하루 종일 닦았던 렌즈의 거대한 겉면이 떠올랐다. 소금기에 절어 딱딱하게 굳어 있던 유리 표면, 그것을 닦아내느라 손끝이 터지고 어깨가 돌처럼 굳어가던 고통이 생생했다.

“겉은 어느 정도 맑아졌지. 하지만 빛을 가로막는 건 대개 안쪽이라네.”

해언은 사내에게 붓을 건넸다. 이번에는 장갑도 없었다. 오직 맨손이었다. 사내는 붓을 받아 들며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굳은살이 채 박이지 않은 손바닥에는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붉은 상처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렌즈 안쪽으로 들어가는 통로는 기이할 정도로 좁았다. 마치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입구처럼, 그것은 한 사람의 몸조차 온전히 허락하지 않을 듯 보였다. 사내는 숨을 참으며 몸을 최대한 구부려 유리 틈 사이로 상반신을 밀어 넣었다. 공간은 폐쇄공포증을 일으킬 만큼 비좁았고, 조금만 움직여도 차가운 유리 벽과 그의 팔이 스쳤다.
렌즈의 안쪽 표면은 밖에서 보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얇은 먼지와 미세한 기름때, 그리고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그을음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것은 마치 수만 개의 뒤엉킨 기억이 무질서하게 기록된 거대한 저장소와 같았다. 내부의 빛이 아무리 강렬해도 불투명한 층을 통과하지 못하면, 결국 바다로 나가는 빛은 산란되고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사내는 숨을 고르고 첫 붓질을 시작했다. 그것은 어제 겉면을 닦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겉을 닦는 것이 물리적인 노동이었다면, 안을 닦는 것은 정밀한 조율에 가까웠다. 힘을 조금만 과하게 주면 미세한 흠집이 생겨 영구적인 흉터를 남길 것 같았고, 힘을 너무 빼면 수년간 고착된 기름때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복잡한 생의 가장 민감한 균형을 조정하는 과정과 닮아 있었다. 너무 과하면 본질을 잃고 엇나가며, 너무 부족하면 아무런 변화도 끌어내지 못한다. 붓끝이 유리에 닿을 때마다 ‘쓱’ 하는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거친 파도 소리보다 더 예민하게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노인장.” 사내가 낮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구석구석 닦아야 합니까. 밖에서 보면 이런 먼지는 티도 안 날 텐데요. 등대의 빛은 충분히 강하지 않습니까?”

해언은 대답 대신 등대 바닥에 정좌하고 앉았다. 그는 낡은 파이프를 꺼내 입에 물고 느릿하게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가 천천히 올라와 렌즈실의 돔 천장으로 퍼져나갔다. 그는 한참을 침묵하며 연기가 흩어지는 모양을 관찰하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는 배가 항로를 이탈하는 이유가 언제나 거대한 폭풍이나 암초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붓질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네. 대부분의 조난은 나침반에 낀 아주 작은 먼지 조각에서 시작되지. 그 작은 먼지가 바늘의 움직임을 아주 미세하게, 정말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틀어놓는다네. 하지만 그 아주 작은 오차가 수백 마일 밖에서는 배를 전혀 다른 엉뚱한 곳으로 데려가지. 인생도, 그리고 세상을 밝히는 이 렌즈도 마찬가지야.”

해언은 연기를 깊게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 인생이 무너진 건, 자네가 믿고 싶어 하는 것처럼 단 한 번의 거대한 불운 때문이 아닐 수도 있네. 매번 무시했던 작은 경고들, 불편해서 외면했던 타인의 표정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작은 욕심들이 렌즈 안쪽에 그을음처럼 쌓여 자네의 시야를 왜곡시킨 결과일 뿐이지. 잘못된 것이 쌓이면, 반드시 잘못된 길로 흘러가게 되어 있네.”

사내의 손이 일순간 굳었다. 붓끝에는 검은 그을음이 묻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의 영혼 깊은 곳에서 뽑아낸 오점처럼 느껴졌다.

“세상이 자네를 속인 게 아니야.”

해언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분명했다.


“자네 안의 먼지가 세상을 왜곡해서 보여준 것이라네.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짜인 세상의 공식에 갇혀, 자네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어왔지. 그 편향된 시야가 결국 자네를 이 고립된 등대까지 몰아넣은 거야.”

사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침묵 속에서 그는 다시 붓을 움직였다. 렌즈 안쪽의 곡선을 따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려갔다. 한 곳을 닦아낼 때마다, 억눌러왔던 기억 조각들이 눈앞의 투명한 화면 위에 자막처럼 하나씩 떠올랐다.
회의실에서 자신의 공격적인 기획안에 모두가 침묵할 때, 그는 그것을 압도적인 동의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제 와 닦인 렌즈로 투영해 보니 그것은 지독한 체념이었고, 마지막까지 그의 소매를 붙잡으려던 후배의 망설임은 시기가 아니라 진심 어린 걱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가슴을 찌른 것은 3년 전 아이의 생일날이었다. 케이크에 불을 붙이려던 순간에도 그는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베란다로 나갔다. 아이가 조그만 손으로 그의 셔츠를 당기며 했던 말.

“아빠, 오늘은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돼?”

그때 그는 아이의 눈을 보지 않았다. 그저 “이게 다 너를 위한 거야”라는 낡은 정답을 내뱉으며 아이의 손을 뿌리쳤다. 그날 밤, 아이가 침대 밑으로 숨겨두었던 삐뚤삐뚤한 편지를 그는 읽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던졌다. 렌즈를 닦아낼수록, 그 쓰레기통 속에서 빛바랜 채 썩어가던 아이의 진심이 비명을 지르며 튀어 올랐다.
그 기억들은 렌즈의 먼지처럼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붓질을 멈추면 다시 선명하게 되살아났고, 유리의 결마다 더 깊이 눌어붙어 있었다. 사내는 이를 악물고 다시 닦았다. 팔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고 허리는 감각이 사라질 정도로 굳어갔다. 그러나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이 먼지를 닦아내지 못하면, 그는 영원히 왜곡된 세상의 환영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공포가 그를 엄습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내는 형언할 수 없는 자괴감에 휩싸였다.
이것은 단순한 청소가 아니었다. 형벌이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그는 스스로를 이 좁은 틈에 가두고 자신의 치부를 대면하며 스스로를 처벌하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실패한 자가 보여줘야 하는 처절한 연극, 혹은 자기 위안을 위한 고행처럼 느껴졌다. 그는 속으로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었다. 자신을 배신한 동료, 자신을 외면한 사회, 혹은 이 지독한 운명. 하지만 모든 원망이 되돌아오는 지점은 결국 끝내 도망칠 수 없는 자신의 심장 한가운데였다.
사내는 그 절망적인 생각을 밀어내지 않았다. 부끄러움 또한 피하지 않았다. 다만 붓을 더 세게, 더 깊게 눌렀다. 붓끝이 유리 위에서 한 번 삐끗하며 날카로운 마찰음을 냈다. 마치 가슴속의 팽팽하던 줄 하나가 끊어지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는 움찔하며 해언의 눈치를 보았으나,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인은 그저 파이프를 한 모금 더 빨아들였을 뿐이다. 그 깊은 침묵 속에서 사내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어떤 더러움은 완전히 지워버려야 할 악이 아니라, 자신의 일부로 수용하고 제어하며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삶의 변수라는 것을.

“밖이 어둡다고 한탄하지 말게.”
해언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등대지기의 진짜 임무는 밖을 밝히는 게 아니야. 안에서 나가는 빛의 통로를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이지. 통로만 맑으면, 빛은 스스로의 본성에 따라 알아서 멀리까지 나아간다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빛이 지나갈 길을 가로막지 않는 것뿐이야.”

사내는 그 말을 뇌리에 새겼다. 그러나 그것을 즉시 논리적인 문장으로 분석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지금 손끝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마찰의 감각에만 집중했다. 붓이 지나간 투명한 자리와, 아직 먼지가 덮인 불투명한 자리 사이의 경계. 그것은 아주 미세했지만, 동시에 세계의 전부를 가르는 분명한 차이였다.
시간의 개념이 마비될 무렵, 사내는 마침내 렌즈의 좁은 틈에서 몸을 빼냈다. 등대 안의 공기는 밤기운에 차갑게 식어 있었고, 바다의 포효는 한층 깊어져 있었다. 사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는 붓을 쥐었던 자국이 깊게 패어 있었고, 손끝은 감각이 마비되어 무감각했다.

“이제 보게나.”

해언이 짧게 말했다.

사내는 고개를 들어 렌즈를 바라보았다. 그곳을 통해 보이는 밤바다는 어제의 그것이 아니었다. 수평선은 마치 면도날로 그은 듯 날카롭게 수면을 가르고 있었고,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 하나하나가 정밀한 기하학처럼 또렷하게 보였다. 안과 밖이 모두 닦인 거대한 렌즈는, 그 자리에 물질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공간에 뚫린 투명한 창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세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력한 불빛이나 자극적인 정보가 아니었다. 자신 안의 오염된 필터를 닦아내는 투명함 그 자체였다. 지혜는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정제된 마음을 통해 투과되는 것이었다.
사내는 렌즈 앞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앞으로 어디로 향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무너진 사업을 어떻게 재건할지, 깨어진 관계를 어떻게 수복할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이제 더 이상 세상이 안개에 가린 것처럼 흐릿하게 보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제 자신의 오류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게 되었다.
해언은 다 탄 파이프를 재떨이에 털어내며 말했다.

“이제 자네는 판단하기 전에 관찰하기 시작했군.”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해답을 얻지 못해도, 제대로 볼 수만 있다면 결국 길은 찾아질 것임을 믿게 되었다. 등대의 거대한 불빛이 회전을 시작하며 켜졌다. 그 빛은 이전보다 훨씬 더 예리하고 멀리, 칠흑 같은 바다의 심장부를 찔렀다. 바다는 그 강력한 빛의 줄기를 거부하지 않고 순응하며 길을 내주었다.
사내는 그 장엄한 광경을 지켜보며, 처음으로 삶에 대한 조급함을 내려놓았다.
아직 이 외딴 등대를 떠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는 지금,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시야를 닦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완전한 투명함에 도달할 때까지, 그의 붓질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가 빛을 통과시킬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