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등대지기의 일과: 멈춤 속에서 빛을 닦는 시간
[부제: 정적 속에서 길을 찾는 법]
렌즈는 분명 맑아졌다.
사내는 그 사실을 손끝으로 확인했다. 어제 하루 종일 자신의 상반신을 비좁은 유리 틈 사이로 밀어 넣고, 붓과 비단 헝겊으로 닦아냈던 수만 개의 기억들이 사라진 자리는 매끄러웠다. 유리 표면에 손바닥을 대면, 더 이상 거칠게 걸리는 곳이 없었다. 손바닥의 온기가 차가운 유리에 닿아 하얀 입김처럼 서렸다가 이내 투명하게 흩어졌다. 빛은 이제 왜곡되지 않고 곧게 통과했다.
하지만 창밖의 바다는 여전히 지독한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법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안개는 걷힐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는 지워졌고, 수평선이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빈 회색의 층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존재 자체가 소멸해버린 무(無)의 공간 같았다. 사내는 그 막막한 회색 벽을 응시하며 등대 난간에 기대 섰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났다.
사내는 미동도 없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등대 안을 메우는 것은 규칙적인 시계 초침 소리와 자신의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바다 위에는 배 한 척 보이지 않았고, 멀리서 응답하듯 깜박이는 어선의 등불 하나도 없었다. 바다는 마치 인류가 모두 사라진 뒤의 세계처럼 고요했다. 그 정적은 날카로운 비명보다 더 사내의 신경을 긁어댔다.
그 고요가 사내를 미치게 만들었다.
도시에서의 시간은 늘 소리를 냈다. 아니, 소리를 내야만 비로소 시간이 흐른다고 믿었다. 아침을 깨우는 날카로운 알람 소리, 출근길 지하철의 육중한 기계음, 사무실의 전화벨, 쉬지 않고 두드려대는 키보드 소리, 회의실의 웅성거림…. 그 모든 소음은 그가 살아있다는 증거였고, 무언가 결과물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무엇이든 반응이 있었고, 투입한 만큼의 결과가 있었다. 그러나 이곳의 시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을 밝혀도, 닦아도, 죽을 힘을 다해 기다려도 바다는 묵묵부답이었다.
사내는 난간을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로 시간이 흐른다는 것, 그것은 마치 허공으로 자신의 삶을 낭비하고 있는 듯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노인장.”
사내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다시금 억눌린 조급함이 날을 세우고 있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불을 밝히고 닦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보러 오는 사람도 없고, 길을 묻는 배도 없지 않습니까. 세상이 우리를 잊은 건 아닙니까? 아니면 우리가 이 짙은 안개 속에 갇혀 영원히 지워진 겁니까?”
해언은 등대 바닥에 앉아 낡은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물은 거친 바닷바람에 삭고 찢어져 여러 번 수선된 흔적이 역력했다. 매듭마다 노인의 손때가 검게 배어 있었고, 굵은 손마디는 그물코를 꿸 때마다 기계처럼 정확하게 움직였다. 노인은 사내의 비명 섞인 질문에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자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바다가 빈 것은 아니라네.”
해언의 목소리는 파도 소리에 섞여 담담하게 들려왔다.
“안개 너머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자네가 닦아놓은 이 불빛 하나에 의지해 숨을 죽이고 파도를 버티고 있을지도 모르지. 자네는 늘 확인받고 싶어 하는군. 내가 던진 빛이 어디에 닿았는지, 그 빛을 본 사람이 누구인지 눈으로 봐야만 비로소 안심하는 게지.”
사내는 웃지 않았다. 그 말이 도덕적인 훈계나 뻔한 위로라는 생각이 들어 속이 뒤틀렸다.
“하지만 확신이 없지 않습니까. 제 눈에 보이지 않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제가 하는 이 모든 노동이, 이 기다림이 헛수고처럼 느껴집니다. 아무런 증거도, 반응도 없는데 어떻게 계속합니까?”
이번에는 해언이 손을 멈췄다.
노인은 굽은 허리를 천천히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투박한 걸음걸이로 사내 곁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은 나란히 난간에 서서 회색빛 장막을 마주했다. 안개는 여전히 짙었고, 바다는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인내란 말이 있지.”
해언이 해진 겉옷 주머니에서 낡은 담뱃대를 꺼내며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그걸 그저 꾹 참는 것, 고통을 견디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네. 하지만 등대지기에게 인내는 그런 게 아니야. 인내는 단순히 버티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조차 ‘해야 할 일’의 형체를 잃지 않는 힘이지. 자네는 늘 결과가 보장될 때만 움직여 왔어. 투자하면 수익이 나야 했고, 명령하면 즉각 복종이 있어야 했지. 자네가 살아온 세상은 그랬을 거야.”
노인은 안개 속 어딘가를 먼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바다 위에서는 해가 뜨지 않는 밤이 훨씬 더 길다네. 그 밤을 견디지 못하고 지루하다고, 혹은 무의미하다고 해서 등불을 꺼버리는 자는 정작 안개가 걷히고 새벽이 왔을 때, 배를 띄울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게 되지. 그때 비로소 후회하겠지만, 이미 빛을 잃은 자에게 새벽은 아무런 축복이 되지 못해.”
사내는 고개를 숙였다.
등대 바닥의 차가운 돌 질감이 발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노인의 말은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찔렀다. 자신이 실패라고 명명했던 그 수많은 순간, 어쩌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단지 '안개가 짙은 구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그는 그 구간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키를 놓아버렸고, 보이지 않는 육지를 원망하며 배를 침몰시켰던 것은 아니었을까.
“수평선을 보게나.”
해언이 다시 말했다. 사내는 고개를 들었지만 여전히 보이는 것은 회색빛 장막뿐이었다.
“지금은 하늘과 바다의 경계조차 모호하지. 하지만 태양은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기고 늦게 뜬 적이 없네. 자네가 안개에 눈이 멀어 보지 못할 뿐, 태양은 이미 저 안개 너머에서 자신의 궤도를 돌고 있지. 믿음이란, 안개 너머에 분명히 육지가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고, 인내란 그 육지에 닿을 때까지 등불의 기름을 묵묵히 채우는 것이라네.”
사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늘 ‘도착지’만을 갈구해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1위, 성공, 부의 축적. 그는 과정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정체와 기다림의 시간을 쓸모없는 손실로만 여겼다. 그래서 아무런 성과가 없는 오늘의 이 시간을 ‘실패한 하루’로 치부하고 싶어 했다.
바람이 잠시 방향을 바꾸어 거세게 불어왔다.
안개가 요동치며 잠시 흐트러지는 듯 보였으나, 곧 다시 제자리를 찾아 더 두껍게 벽을 쌓았다. 사내의 마음도 그랬다. 노인의 말을 들을 때면 잠시 희망이 생겼다가도, 다시 눈앞의 막막함을 보면 절망의 고요 속으로 가라앉았다.
“지금 자네가 겪는 이 고요는 멈춘 게 아니라네.”
해언의 목소리가 한층 깊어졌다.
“이것은 축적이라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시간에, 자네의 내면은 가장 깊게 차오르고 있지. 안개를 걷게 하는 건 자네의 능력이 아니야. 그것은 바람과 태양의 일이지. 하지만 안개가 걷혔을 때, 누구보다 선명하고 밝은 빛을 저 안개 걷힌 세상으로 내보내는 건 오직 자네의 몫이라네. 준비되지 않은 자는 기회가 와도 빛을 투과시키지 못해.”
사내는 난간을 잡은 손에 다시 힘을 주었다.
여전히 가슴 속에는 불안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 불안을 억지로 눌러 없애려 하지 않았다. 불안 또한 이 긴 기다림의 일부임을, 이 고요한 축적의 과정에서 지불해야 할 통행료 같은 것임을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해언은 다시 바닥으로 내려가 털썩 주저앉더니 그물질을 시작했다.
굵은 바늘이 그물코 사이를 통과하며 내는 규칙적인 마찰음이 등대 안을 메웠다. 사내는 잠시 망설이다가, 노인 곁에 다가와 앉았다. 그는 말없이 그물의 한 끝을 잡았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노동.
매듭을 풀고, 엉킨 실을 고르고, 다시 단단하게 묶는 일. 도시의 그 어떤 고부가가치 업무보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이었지만, 사내는 그것에 몰입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손이 서툴렀다. 거친 실이 손등을 긁었고, 매듭은 자꾸만 엉뚱한 방향으로 어긋났다.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사내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시작했다.
해언은 사내의 서툰 짓을 고쳐주거나 타박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서 같은 속도로, 같은 리듬으로 손을 움직이며 사내의 존재를 묵묵히 긍정해주었다. 한 시간, 두 시간…. 사내는 서서히 그물의 리듬에 동화되어 갔다.
그물질을 하며 사내는 생각했다.
이 지루한 시간이 지난 뒤, 자신에게 무엇이 남을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등대를 내려가면 다시 빚쟁이들이 기다릴 것이고, 조롱 섞인 시선들이 그를 괴롭힐 것이다. 그러나 이 안개 속에서 매듭 하나를 정성껏 묶지 못한다면, 그 어떤 화려한 기회가 와도 자신은 다시 무너질 것임을 직감했다. 기다림은 고통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자격을 얻는 훈련이었다.
등대의 거대한 렌즈 뒤에서 불꽃은 계속 타올랐다.
바다 건너 보는 이가 있든 없든, 그를 칭찬하는 관객이 있든 없든, 불은 그 본연의 의무를 다하며 타오르고 있었다. 사내는 그 불빛의 그림자가 바닥에서 일렁이는 것을 보며, 처음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해야 할 시간’이 삶에서 가장 고귀한 시간일 수 있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사내는 이제 더 이상 수평선을 재촉하지 않았다.
시계를 보지도 않았고, 안개가 언제 걷힐지 묻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지금 자신의 손에 들린 낡은 그물의 매듭 하나에 온 신경을 쏟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회색빛 안개 속에서,
등대 안의 두 남자는 말없이 매듭을 묶어 나갔다.
바깥의 수평선은 여전히 침묵 중이었지만, 사내의 내면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단단한 등불이 켜지고 있었다. 그것은 결과에 기댄 일시적인 환희가 아니라, 어둠과 안개 속에서도 결코 꺼지지 않는 '인내'라는 이름의 불꽃이었다.
안개 너머에서 태양은 이미 뜨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내는 이제, 기다리는 법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