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토랑 03:00 PM

번외 1장.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by 산 사람


2025년 12월 31일. 달력의 마지막 장이 단 한장의 숨만 남겨두고 있던 날이었다. 우리 식당 ‘3시의 요새’는 이름처럼 오후 3시가 되면 가장 뜨겁게 달아오른다. 저녁 7시, 단 한 번의 완벽한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모든 재료와 에너지를 쏟아붓는 '준비'가 시작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평소 같으면 “오후 3시는 인생의 간을 맞추는 골든타임!”이라며 장팔 아저씨의 칼질 소리와 태풍 사장의 잔소리가 파도 소리를 집어삼켰을 텐데, 오늘따라 식당은 기이할 정도로 정막에 휩싸여 있었다. 태풍 사장이 어쩐 일인지 오늘만큼은 저녁 7시 영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장사가 싫어서가 아니라, 오늘만큼은 식구들끼리 온전하게 해를 넘기겠다는 선포였다.

“지수야, 오늘은 휴업이다. 일 년 내내 저녁 7시 그 한 타임을 위해서 달려왔는데, 마지막 날 정도는 사람도 쉬어야 간이 맞지 않겠니? 대신 오늘 아르바이트비는… 음, 일단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자. 거기 가면 네가 생각지도 못한 인생의 팁을 얻을 수 있을 거야.”

태풍 사장의 말에 나는 내심 불안해졌다. 일 년 중 가장 비싼 대목인 연말 저녁 영업을 포기하고 나를 어디로 데려가겠다니. 장사꾼 전적이 화려한 이 사장님이 나를 어디 다른 식당에 팔아넘기려는 건 아닐까, 아니면 연말 맞이 강제 봉사 활동이라도 시키려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식당 안의 풍경은 내 의심보다 더 생경했다. 주방에서는 장팔 아저씨가 그 지긋지긋한 조리복을 벗어 던지고, 어디 장롱 깊숙한 곳에서 꺼낸 듯한 빳빳한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있었다.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운 그의 모습은 흡사 은퇴한 대학교수 같아 보였지만, 입가에선 여전히 습관적인 욕설이 맴돌고 있었다.

“아, 이 단추 새… 아니, 단추가 왜 이렇게 안 채워져! 지수야, 너 일루 와서 이것 좀 봐라. 내 손가락바닥이 굳은살 때문에 감각이 없어서 말이야.”


아저씨는 ‘새끼’라는 말을 내뱉으려다 멈칫하며 혀를 깨물었다. 평소라면 벌써 주방 기구 대여섯 개는 날아다녔을 텐데, 오늘따라 장팔 아저씨는 억지로 성인(聖人)의 미소를 지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호랑이가 나비넥타이를 맨 것처럼 어색해 나는 웃음을 참느라 혼이 났다.
곰탱 아저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평소 입던 헐렁한 티셔츠 대신, 제 몸집에 겨우 맞는 짙은 감색 정장을 차려입었다. 어깨가 너무 끼어 숨쉬기도 힘들어 보였지만, 그는 특유의 과묵함으로 그 불편함을 견디고 있었다. 곰탱 아저씨는 아무 말 없이 베르나르의 귀를 살짝 접어주었다. 그게 "나도 불편해 죽겠다"는 그만의 대답인 듯했다.
우리 집 서열 1위이자 푸른 눈이 매력적인 고양이 ‘베르나르’는 평소보다 더 도도하게 꼬리를 흔들며 사장님의 구두 위에 앉아 있었다.

“베르나르, 너도 오늘 밤엔 얌전히 있어야 한다. 거긴 생선 냄새나는 곳이 아니니까.”

태풍 사장이 베르나르를 품에 안고 부드러운 털을 정리해 주었다. 베르나르는 마치 모든 상황을 이해한다는 듯 ‘야옹’ 하고 나직하게 대답하더니 사장의 품에 얌전히 안겼다.
밤 11시. 차가운 겨울 공기를 뚫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뜻밖에도 마을 입구의 작은 교회였다. 낡은 종탑 위로 은은한 조명이 비치고, 사람들의 찬송가 소리가 들려오는 곳. 송구영신예배. 내 인생의 사전에는 없던 단어가 ‘3시의 요새’ 세 남자와 함께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자정이 넘어가면 새해가 될 밤이었다.
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따뜻한 온기가 우리를 감쌌다. 태풍 사장은 익숙한 듯 맨 앞줄에 자리를 잡았다. 평소 돈 냄새라면 귀신같이 맡던 그 눈빛이, 십자가를 향해 경건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그가 내 귓가에 속삭인 말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지수야, 잘 봐라. 일 년 중 기도의 밀도가 가장 높은 날이 바로 오늘이다. 이때 하나님한테 내년 매출 목표액을 정확하게 보고 드려야 결재가 빨리 나거든. 이게 바로 하늘의 비즈니스다.”

나는 멍하니 사장을 바라보다가 툭 한마디를 던졌다.

“사장님, 그럼 세금계산서는 천국으로 발행해야 하나요? 부가세 별도인지도 여쭤보시고요.”

사장은 당황한 듯 헛기침을 했고, 그 순간 품 안에 있던 베르나르가 사장의 실크 넥타이에 하얀 털을 한 움큼 묻히며 꾹꾹이를 시작했다. 하늘의 비즈니스 운운하던 사장의 카리스마가 털 뭉치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그 옆에 앉은 장팔 아저씨는 더 가관이었다. 그는 두 손을 꼭 모으고 눈을 질끈 감고 있었는데,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회개 기도라도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조용히 들어보니 기도의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주여… 그 일본인 관광객 유미 있잖습니까. 그 여자가 내년 봄에 다시 우리 식당에 오게 해 주십시오. 제발 그 사기꾼 같은 사장 놈이랑 엮이지 않게 지켜주시고… 아, 욕하면 안 되지. 죄송합니다.”

아저씨는 기도를 하다 중간중간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삼키느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사랑을 갈구하는 욕쟁이 셰프의 기도는 절실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했다.
곰탱 아저씨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무릎 위에 베르나르를 앉힌 채 가만히 있었다. 무엇을 기도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베르나르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커다란 손길에는 깊은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문득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아르바이트비를 받는 대신 끌려온 이곳. 내 옆에는 매출을 위해 기도하는 사장과, 사랑을 위해 욕을 참는 셰프, 그리고 고양이와 대화하는 보조 요리사가 앉아 있다. 이 말도 안 되는 조합의 사람들이 한 해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목사님의 축도가 시작되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 순간, 내 품 안으로 베르나르가 쏙 파고들었다. 보들보들한 털의 감촉과 고양이 특유의 따뜻한 체온이 내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베르나르는 신비로운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지수야, 너도 고생 많았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땡, 땡, 땡.

2026년의 첫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예배당을 빠져나오는 길, 태풍 사장이 내 어깨를 툭 쳤다.

“자, 이제 아르바이트비 받으러 가자. 신년 특별 보너스 포함이다!”

식당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장팔 아저씨는 참았던 욕을 폭발시키듯 쏟아냈다.

“야, 태풍! 너 아까 기도할 때 매출 이야기만 했지? 이 나쁜… 아니, 이 사악한 인간아! 어떻게 거기서 돈 이야기를 하냐? 나는 우리 식당 식구들 건강하게 해달라고 얼마나 빌었는데!”

“거짓말하지 마, 장팔! 내가 다 들었어. 유미 이야기만 주야장천 하더구먼! 주님도 어이없어서 웃으셨을걸?”

다시 시작된 티키타카. 하지만 어제의 날카로운 신경전과는 달랐다. 서로의 속내를 신 앞에서 들켜버린 사람들의 멋쩍은 화해 같은 느낌이었다.
식당에 도착하자 곰탱 아저씨가 주방으로 들어가 묵직한 가마솥을 꺼내왔다. 그 안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국이 들어 있었다.

“자, 한 살 더 먹자.”

우리는 3시의 요새 테라스에 앉아 새해 첫 떡국을 나누어 먹었다. 베르나르도 제 몫의 특식을 즐겼다. 짠맛 가득한 장팔 아저씨의 잔소리도, 쓴맛 나는 태풍 사장의 허세도, 오늘은 떡국 국물처럼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나는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번외 일지: 2025년 12월 31일 밤에서 2026년 1월 1일로 넘어가며. 우리 식당에는 고해성사 칸막이는 없지만, 뜨거운 냄비 앞에서 나누는 국물 한 국자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욕쟁이 셰프가 욕을 참고, 장사꾼 사장이 진심을 비추고, 베르나르가 인간을 위로하는 곳. 3시의 요새는 그렇게 또 한 살을 맛있게 먹었다. 아, 그리고 태풍 사장이 준 보너스 봉투 안에는 돈 대신 '내년 휴가권'이 들어있었다. 역시 이 인간은 끝까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싫지만은 않은, 참으로 간이 잘 맞는 새해의 시작이다.]

밤하늘엔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베르나르가 내 무릎 위에서 가르릉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이 지독하게 인간적인 사람들의 ‘인생의 간’에 내 몫의 소금 한 꼬집을 더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고.

“야! 지수야! 떡국 국물 남기지 마! 저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거야!”

장팔 아저씨의 호통이 새해의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그래, 이게 바로 '3시의 요새'식 축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