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하얀 소스 아래 묻어둔 진심

​시즌1]03:00 PM, 촛불 성의 괴물들

by 산 사람


​1. 요새를 감도는 기이한 긴장의 파동


​그 정체불명의 사내들이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지 며칠이나 지났을까. 바닷가 유리 집 ‘3시의 요새’는 겉으로는 평소와 다름없는 평온을 되찾은 듯 보였지만, 주방 안의 공기는 어딘지 모르게 팽팽하게 당겨진 현악기의 줄처럼 위태로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오후 3시는 인생의 시즈닝을 치는 골든타임!”이라며 능청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을 태풍 사장이 오늘따라 유독 예민하게 날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풍 사장은 평소의 사기꾼 같은 미소 대신, 아주 잔인할 정도로 투명하고 진지한 눈빛을 한 채 홀 안의 테이블 간격과 식기들의 각도를 1mm 단위로 조정하고 있었다. 그는 주방에서 담배를 꺼내 물려던 장팔의 손목을 낚아채며 나직하지만 서슬 퍼런 목소리로 경고를 날렸다.


​“야, 장팔. 오늘만큼은 제발 그 입 좀 다물고 고기 질감에만 집중해라. 오늘 저녁 7시에 예약한 손님은 대한민국에서 입맛이 가장 까다롭다 못해 오만한 분이라고 연락받았으니까. 오늘 메뉴는 ‘블랑켓 드 보(Blanquette de Veau)’로 확정했다. 고기 색깔이 조금이라도 변하거나 소스가 엉기면, 그날로 우리 식당 문 닫는 줄 알아.”


​“블랑켓 드 보? 미쳤냐, 태풍? 요즘같이 자극적인 맛에 미친 세상에 누가 그 심심하고 허연 송아지 찜 요리를 먹는다고 그래. 차라리 화끈하게 스테이크를 굽는 게 가오가 서지 않겠냐?”


​장팔이 투덜거리며 칼을 도마에 쾅 찍었지만, 그의 손은 이미 최고급 송아지 안심의 막을 제거하는 정교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태풍 사장과 장팔, 그리고 곰탱. 이 셋은 서른 중반을 함께 넘어가고 있는 동갑내기 친구라지만, 오늘만큼은 친구 사이의 살가움 대신 요새를 지키는 파수꾼들의 비장미가 주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옆에서 곰탱은 아무 말 없이 거대한 냄비 앞에 서서 루(Roux)를 볶고 있었다. 하얀 밀가루와 버터가 섞여 고소한 향을 내뿜는 동안, 곰탱의 시선은 오직 냄비 안의 소용돌이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평소보다 더 깊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에는 파도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듯한 깊은 정적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대걸레를 밀며 그들의 티키타카를 지켜보았는데, 곰탱의 손등에 솟아오른 굵은 힘줄을 보며 오늘 찾아올 손님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2. 낡은 지팡이가 그어 내린 침묵의 선


​정확히 오후 7시, 식당 문에 달린 종소리가 평소보다 짧고 묵직한 여운을 남기며 울려 퍼졌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한 노신사였다. 어깨에 검은 코트를 무심하게 걸치고 은색 머리가 달린 지팡이를 짚은 그의 모습은, 마치 지나온 세월의 무게를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버티고 선 거대한 고목 같아 보였다.


​그의 머리카락은 겨울 바다에 내린 서리처럼 하얗게 빛났지만, 안경 너머의 눈빛만큼은 사람의 속내를 단번에 꿰뚫어 볼 듯 날카롭고 서늘했다. 노인은 수행원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의 부축을 차갑게 뿌리친 채 창가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지팡이가 바닥에 닿을 때마다 ‘탁, 탁’ 소리가 식당 안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고, 그 소리는 마치 선전포고처럼 우리들의 귓가를 울렸다.


​“준비한 것을 내오게.”


​노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위가 담겨 있었다. 태풍 사장은 평소의 현란한 말솜씨를 쏙 뺀 채, 마치 일류 비서처럼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주방으로 신호를 보냈다. 이윽고 장팔이 직접 접시를 들고 나왔는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블랑켓 드 보'는 우윳빛 소스에 잠긴 송아지 고기와 정갈하게 썰린 하얀 버섯들이 마치 예술 작품처럼 접시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노인은 음식을 바로 입에 대지 않았다. 그는 한참 동안 그 하얀 요리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소스 아래 숨겨진 조리사의 진심이나, 혹은 숨기고 싶은 비밀이라도 읽으려는 사람 같아 보였다. 주방 입구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팔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고, 태풍 사장 역시 손바닥의 땀을 바지에 문지르며 초조하게 노인의 손놀림을 쫓았다.


​마침내 노인이 스푼을 들어 소스를 살짝 맛본 뒤, 고기 한 점을 천천히 씹어 넘겼다. 그의 표정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맛있다는 찬사도, 맛없다는 불평도 없이 그는 아주 느린 속도로, 그러나 단 한 조각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정성스럽게 식사를 이어갔다. 그가 수저를 움직일 때마다 식당 안에는 오직 거친 파도 소리와 노인의 느린 호흡 소리만이 기묘하게 뒤섞였다.


​3. 와인 한 잔, 그리고 60cm의 망설임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노인이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태풍 사장을 불렀다.


​“주인장. 저기 주방에서 묵묵히 냄비를 젓던 그 젊은이… 저 친구에게 와인 한 잔 따라달라고 할 수 있겠나? 내 오늘 이 음식의 값을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지불하고 싶군.”


​태풍 사장은 당황한 듯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곰탱을 불렀다. 주방 커튼이 걷히고 조리복 차림의 곰탱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노인을 마주하는 순간, 아주 찰나의 시간 동안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평소의 무표정을 장착하고 노인의 테이블 옆으로 다가갔다.


​태풍 사장은 묘하게 흐르는 정적을 깨보려 곰탱의 어깨를 툭툭 치며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친구가 우리 식당의 보배입니다. 저 덩치로 양파 하나를 까도 결을 살려서 까는 아주 섬세한 놈이죠. 말수는 적어도 손끝 하나는 기가 막혀서, 우리 요새에서 이 친구 없으면 장사가 안 될 정도입니다.”


​태풍 사장은 너스레를 떨었지만 곰탱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와인병을 들어 노인의 잔을 채웠다. 붉은 와인이 잔을 채우는 ‘쫄쫄’ 소리가 적막한 식당 안을 가득 메웠고, 곰탱의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하얗게 피가 안 통할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노인은 잔을 들어 향을 맡더니 나직하게 읊조렸다.


​“곰탱이라… 참으로 어울리는 이름이군. 둔해 보이지만 속은 깊고, 제 자리를 지킬 줄 아는 짐승이지.”


​노인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비웃음이라기보다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찾지 못했던 잃어버린 조각을 마침내 발견한 사람의 안도감 같아 보였다. 노인은 음식을 남김없이 비운 뒤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문으로 향하던 순간이었다. 노인의 발걸음이 한순간 비틀거렸고, 지팡이가 바닥에서 미끄러질 뻔한 아찔한 찰나가 발생했다. 그 순간, 주방 쪽에 서 있던 곰탱의 상체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며 노인을 향해 쏠렸다. 그의 손은 이미 허공을 가르며 노인의 팔을 붙잡으려 뻗어져 있었다. 약 60cm의 거리. 하지만 곰탱은 노인이 스스로 중심을 잡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뻗었던 손을 주먹 쥐어 뒤로 숨겼다.


​노인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문 앞의 차가운 유리에 비친 곰탱의 그림자를 한참 동안 응시하는 듯하더니, 이내 문밖으로 나가 대기하던 수행원의 부축을 받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4. 파도 소리에 섞인 단 한 마디의 고해


​노인이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빈 와인잔과, 그가 남긴 기묘한 여운뿐이었다. 태풍 사장과 장팔은 넋이 나간 듯 문밖만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와, 진짜 대단한 노인네네. 태풍, 너 저 어르신 정체 진짜 모르는 거 맞아? 카리스마가 무슨 제왕급이던데.”


​장팔의 물음에도 태풍 사장은 대답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단지 예약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그 거역할 수 없는 압박감만을 기억할 뿐이었다. 한편, 곰탱은 노인이 앉았던 자리를 묵묵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가 빈 접시를 들고 주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거대하고도 쓸쓸해 보였다.


​나는 주방 너머를 훔쳐보았다. 곰탱은 설거지통 앞에 서서 뜨거운 물을 틀어놓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물소리에 묻혀 아무도 듣지 못했겠지만, 나는 그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고개가 꺾인 각도가 평소보다 훨씬 더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아주 나지막이, 마치 수만 번을 연습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던 말을 고해성사하듯 읊조렸다.


​“감사합니다….”


​그 목소리는 너무나 가냘파서 파도 소리에 금세 휩쓸려 갔지만, 그의 눈가에 맺혔던 뜨거운 물기가 그릇 위로 툭 하고 떨어지는 순간, 나는 그가 오늘 무엇을 얻었는지 깨달았다. 그것은 재벌가의 이름도, 화려한 지위도 아닌, 십 년 만에 처음으로 허락받은 ‘자신이 만든 요리의 온도’였다. 베르나르는 어느새 곰탱의 다리 사이를 쓱 지나가며 꼬리로 그의 종아리를 툭 쳤고, 그 무심한 위로가 식당 안을 가득 메운 침묵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지수의 주방 관찰 일지]

​오늘 요새를 찾아온 그 노신사는 아마도 곰탱 아저씨의 가장 큰 벽이자, 동시에 그 벽을 허물어줄 유일한 열쇠였던 모양이다. 하얀 소스 요리가 심심해서 싫다던 장팔 아저씨의 말과는 달리, 노인은 그 접시를 마치 보물이라도 다루듯 싹 비워냈다. 아마 그 접시 바닥에는 우리가 읽을 수 없는 누군가의 화해의 문장이 적혀 있었을지도 모른다.


​태풍 사장은 다시 촐싹거리며 매출 장부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장팔 아저씨는 내일 쓸 고기를 다듬으며 곰탱 아저씨의 옆을 지켰다. 그들은 여전히 거친 농담을 주고받는 동갑내기 친구들이었고, 이 거친 바닷가 앞을 지키는 단단한 전우들이었다. 곰탱 아저씨의 눈물은 어느새 말라 있었지만, 그가 냄비를 젓는 손길은 아까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확신에 차 보였다.


​나의 2026년은 그렇게 시끄럽고, 짭조름하고, 무엇보다 아주 뜨겁게 시작되고 있었다. 파도는 여전히 해안선을 닦아내며, 3시의 요새는 다시 평소의 소란스러운 평온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오늘의 요리: 블랑켓 드 보 (Blanquette de Veau)]

​블랑켓 드 보는 송아지 고기를 볶거나 태우지 않고, 신선한 채소 육수와 함께 하얗게 익혀낸 프랑스의 정통 가정식 요리입니다. 자극적인 양념이나 화려한 색깔을 입히지 않기에, 재료 본연의 순수한 맛과 조리사가 불 앞에서 견뎌낸 ‘인내의 시간’이 그대로 드러나는 정직한 음식입니다.

​이 요리는 마치 '부모가 자식을 세상이라는 거친 풍파에 내놓기 전, 행여 다치거나 상처 입을까 봐 부드럽고 따뜻한 크림 소스로 온몸을 감싸 안는 마음' 과 닮아 있습니다. 가장 약한 불에서 오랫동안 정성을 다해야만 완성되는 이 요리, 화려한 성공보다는 묵묵한 '지킴'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에게 내미는 따뜻한 구원의 국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