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1]03:00 PM, 촛불 성의 괴물들
1. 파리의 에스프레소와 동해의 짠내
오후 3시 40분. 바다는 오늘따라 유난히 푸르다 못해 시퍼런 빛을 띠고 있었다. 수평선 너머로 뭉게구름이 성벽처럼 쌓여 있고, 그 사이를 뚫고 내려온 햇살이 유리창에 반사되어 식당 홀을 은빛으로 채우고 있었다. 풍경만 보면 지상 낙원이 따로 없건만, 주방의 분위기는 흡사 유배지 수용소 같았다.
“태풍아, 나는 가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파리 세느강 변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예술을 논해야 할 내가, 왜 이 짠내 나는 여기 바다 구석에서 홍합 껍데기나 까고 있는지 근원적인 의문이 들어서 말이야.”
장팔 아저씨가 주방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첫 담배를 피우며 깊은 한탄을 내뱉었다. 아저씨의 하얀 조리복엔 아침에 손질한 홍합의 물기가 튄 자국이 선명했다. 그의 앞에는 태풍 사장이 비스듬히 앉아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명품 선글라스를 닦고 있었다. 나는 베르나르의 털을 빗겨주며 귀를 쫑긋 세웠다. 드디어 이 식당의 최대 미스터리인 ‘장팔 납치 사건’의 전말이 공개될 참이었다.
“야, 인마. 네가 파리에 계속 있었으면 그냥 흔하디 흔한 미슐랭 요리사-1 이었겠지만, 여기선 대한민국에서 유일무이한 ‘장팔’이잖아. 내 덕에 네 평범한 인생이 블록버스터급으로 버라이어티 해진 줄 알아. 고마워해야지.”
태풍 사장의 뻔뻔한 대꾸에 장팔 아저씨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프라이팬이 날아가지 않는 게 기적이었다.
2. 굴(Huître)과 영혼의 잘못된 만남
사건의 시작은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태풍 사장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전 재산을 털어 프랑스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반면 장팔 아저씨는 파리의 한 미슐랭 2 스타 레스토랑에서 ‘수셰프(Sous-chef)’로 일하며 조리법 하나로 주방을 호령하던 촉망받는 엘리트 요리사였다.
“지수야, 저 인간이 나한테 처음 와서 뭐라고 한 줄 아니? 불어로 ‘신선한 영혼을 팔고 있느냐’고 묻더라고. 눈은 초롱초롱해가지고 말이야.”
장팔 아저씨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알고 보니 태풍 사장은 ‘신선한 굴(Huître)’을 주문하고 싶었는데, 발음이 꼬여서 ‘영혼(Âme)’ 비슷한 소리를 낸 것이었다.
“그게 내 인생 최대의 실수였지. 저 한심한 발음을 고쳐주겠다고 대화를 시작한 게 바로 지옥의 입구였어. 저놈은 굴을 먹으러 온 게 아니라 내 영혼을 낚으러 온 낚시꾼이었던 거야.”
태풍 사장은 그날 이후 파리 노천카페에 앉아 있는 장팔을 매일같이 찾아갔다. 그리고 특유의 사기꾼 기질을 발휘해 존재하지도 않는 ‘한국의 나폴리’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었다.
“내가 그랬지. 한국에 가면 바다가 통째로 보이는 통유리 주방을 주겠다고. 아침마다 해녀들이 갓 잡은 전복을 네 발등 위에 축복처럼 떨어뜨려 줄 거고, 너는 그저 신의 요리만 하면 된다고. 근데 막상 와보니까 여긴 그냥 귀신 나오게 생겼던 낡은 폐가였고, 전복은커녕 곰탱이랑 같이 삽질해서 막힌 하수구 뚫는 것부터 시작했잖아! 내 미슐랭 손가락에 똥물이 다 튀었다고!”
장팔 아저씨가 울분을 토하며 담배 연기를 뿜었다. 태풍 사장은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허허 웃었다.
“그래도 오늘 장사 준비는 해야지? 과거는 흘러갔고 홍합은 네 앞에 산더미처럼 있잖아. 셰프님, 힘내세요.”
3. 클라푸티, 버려진 씨앗에서 피어난 달콤함
장팔 아저씨는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앞치마를 질끈 묶었다. 그는 오늘 자신의 ‘고해성사’와 어울리는 요리를 선택했다. 화려한 기교 대신 소박한 재료로 진한 달콤함을 만들어내는 프랑스 시골 디저트, ‘클라푸티(Clafoutis)’였다.
“지수야, 클라푸티는 말 그대로 ‘채우다’는 뜻이야. 체리 씨를 빼지 않고 그대로 반죽에 넣어 오븐에 굽는 디저트지. 화려한 미슐랭 요리에 지쳐있던 내가 사실 가장 그리워했던 건 이런 투박함이었어. 이건 ‘불완전함의 과학’이다. 달걀, 우유, 밀가루를 섞은 반죽에 과일을 듬뿍 넣고 굽는데, 체리 씨를 제거하지 않는 게 핵심이야.”
아저씨는 냉장고에서 체리를 꺼내며 설명을 이어갔다.
“오븐 속 뜨거운 열기가 씨앗의 단단한 껍질을 뚫고 들어가 체리 과육의 향을 극대화시키거든. 버려진 씨앗 하나도 제 역할을 하는 거지. 태풍 저 녀석이 나를 납치한 방식도 이 클라푸티랑 비슷해. 겉으로는 사기꾼 같은 달콤한 말로 내 마음을 채우는 척했지만, 사실은 내 안에 숨겨져 있던 ‘진짜 원하는 것’들을 끄집어냈어. 어쩌면 그 씨앗 같은 투박한 진심에 내가 낚인 거지. 지수야, 너도 조심해라. 겉만 보고 혹하면 나처럼 평생 이 버터 냄새에 찌들어서 살아야 하니까.”
장팔 아저씨는 입술로 성호를 긋고 반죽이 든 팬을 오븐에 넣었다. 주방 안은 금세 체리와 바닐라 향이 어우러진 구수하고 달콤한 향기로 가득 찼다. 화려한 버터 향과는 또 다른, 마음의 허기를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향이었다.
4. 불을 줄이고 진해지는 시간
오후 7시 정각. 오늘 예약 손님 중에는 유독 지친 기색의 중년 남성이 있었다. 그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 멍하니 밤바다의 파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풍 사장이 그에게 다가가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네며 평소와 다른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선생님, 오늘 바다가 참 깊죠? 저희 셰프가 오늘은 선생님처럼 속이 깊은 요리를 준비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몸과 마음이 힘들 때 먹는 영혼의 음식이죠.”
드디어 클라푸티가 서빙되었다. 노릇하게 구워진 황금빛 디저트 위로 체리가 콕콕 박혀 있고,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중년 남성은 포크로 한 조각을 떠먹더니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달콤하네요. 요 몇 달간 속이 늘 차가웠는데, 이제야 좀 살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업 실패와 믿었던 동업자의 배신에 대해 태풍 사장에게 담담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태풍 사장은 평소의 가벼운 농담 대신,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촛불 성에 초를 하나 더 보탰다.
“클라푸티의 체리 씨가 향을 더하듯, 선생님의 어려움도 언젠가 더 깊은 달콤함으로 돌아올 겁니다. 지금은 잠시 오븐 속에 있는 시간일 뿐입니다.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주방 문틈으로 그 광경을 보던 장팔 아저씨는 다시 담배를 물려다 멈췄다. 그는 대신 곰탱 아저씨에게 갓 구운 바게트 한 바구니를 건넸다.
“야, 곰탱아. 나 아까 태풍이한테 납치됐다고 욕한 거 취소다. 저 사기꾼 놈, 손님들 마음 고치는 실력 하나는 인정해야겠어. 프랑스 미슐랭 주방에선 죽었다 깨어나도 볼 수 없는 풍경이긴 하네.”
5. 납치가 아닌 선택
밤 11시. 손님이 모두 떠난 뒤, 세 남자와 나는 남은 클라푸티 주위에 둘러앉았다. 장팔 아저씨가 커다란 대접에 노릇하게 구워진 클라푸티를 가득 떠서 태풍 사장에게 건넸다.
“자, 먹어라. 나를 납치해 준 보답이다. 덕분에 나도 거창한 미슐랭 타이틀 버리고 진짜 요리가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으니까.”
태풍 사장은 클라푸티를 한입 먹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음미했다.
“캬, 역시 장팔이야! 근데 인마, 체리 씨는 좀 빼고 줘라. 이빨 나가겠다.”
“이게 진짜! 감동을 줘도 지랄이야! 씨를 빼면 클라푸티 본연의 맛이 사라진다고! 네가 사다 놓은 체리가 이것뿐이었잖아!”
장팔 아저씨가 다시 프라이팬을 잡으려 하자, 곰탱 아저씨가 허허 웃으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지수야, 저 둘은 전생에 부부였을 거야. 아니면 원수 거나. 근데 신기하지? 저렇게 매일 싸우면서도 디저트 맛은 기가 막히게 맞춘단 말이야.”
나는 설거지를 하며 생각했다. 파리의 화려한 조명과 찬사 대신 바닷가의 낡은 촛불과 파도 소리를 선택한 장팔 아저씨. 어쩌면 그는 납치당한 게 아니라, 자신의 요리가 가장 필요한 곳을 스스로 찾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사기꾼 같은 친구의 진심을 알아본 것 자체가 이미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예술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지수의 주방 관찰 일지: 오늘의 요리]
메뉴: 버려진 씨앗에서 피어난 달콤함, '클라푸티(Clafoutis)'
1. 불완전함의 미학
클라푸티는 체리 씨를 빼지 않고 굽는 게 특징이라고 한다. 장팔 아저씨는 이걸 '불완전함의 과학'이라고 했다. 겉으로 보기엔 씨앗이 거슬릴 것 같지만, 오히려 그 씨앗이 체리 향을 더 진하게 만든다고. 어쩌면 우리 인생의 흠결이나 불완전한 부분들도 결국엔 더 깊은 향과 맛을 내는 재료가 되는 게 아닐까 싶다. 파리 미슐랭 셰프가 이 낡은 식당에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완벽하지 못한 태풍 사장의 '낚시' 덕분이었으니.
2. 겉만 보고 혹하지 마라
태풍 사장이 장팔 아저씨를 '납치'할 때 썼다는 '한국의 나폴리' 환상. 겉만 번지르르한 말에 속아 넘어간 아저씨의 모습이 꼭 클라푸티의 달콤한 반죽에 감춰진 씨앗 같았다. 하지만 그 씨앗이 결국 아저씨 내면의 '진짜 요리'를 일깨운 것처럼, 태풍 사장의 허세도 사실은 아저씨를 위한 큰 그림이었을지도 모른다. 역시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 사람도, 디저트도.
3. 지독한 우정의 맛
클라푸티를 먹으며 티격태격하는 두 아저씨를 보았다. 서로를 욕하면서도 굳이 남은 클라푸티를 나눠 먹는 모습이 정말 지독한 우정 같았다. 어쩌면 장팔 아저씨는 그저 화려한 타이틀이 아니라, 이런 투박한 우정이 곁들여진 달콤한 맛을 그리워했던 게 아닐까. 나도 나중에 저런 바보 같은 친구들이랑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