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폭풍 전야, 촛불이 켜진 날

​시즌1]03:00 PM, 촛불 성의 괴물들

by 산 사람


​1. 죽은 목소리와 구겨진 예약 명단


​“지수야, 오늘은 촛불 켜지 마라. 아니, 딱 하나만 켜. 제일 작은 걸로.”


​오후 3시 15분. 평소라면 “성벽을 쌓아라! 파라핀의 요새를 구축해!”라며 호들갑을 떨었을 태풍 사장이 물먹은 솜처럼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입 왁스로 번들거려야 할 그의 손에는 모서리가 너덜너덜하게 구겨진 예약 명단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나는 의아해하며 슬쩍 명단을 훔쳐보았다.


예약자 성함: ‘한연우’.


​그 이름을 확인한 순간, 주방에서 담배를 물고 나오던 장팔 아저씨가 서까래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딱 멈췄다.


​“연우…? 야, 태풍. 네가 5년 전 파리에서 나 꼬드겨서 도망칠 때, 매일 밤 싸구려 와인 처먹고 이름 부르며 개처럼 질질 짜던 그 한연우 맞냐?”


​장팔 아저씨의 직설적인 물음에 태풍 사장은 대답 대신 창밖의 성난 파도만 멍하니 바라봤다.


​“지수야, 오늘 요리는… 좀 차갑게 해 줘라. 내 심장처럼.”


​“지랄하네. 야, 요리는 식재료가 결정하는 거지 네 감정 찌꺼기가 결정하는 게 아냐. 헛소리 말고 정신 차려.”


​장팔 아저씨는 매몰차게 독설을 뱉었지만, 정작 주방으로 들어가는 그의 등 뒤로는 평소보다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2. 비시스와즈, 뜨거웠던 기억을 얼리는 역설


​장팔 아저씨는 평소보다 더 정교하게 감자를 깎아내기 시작했다.


​“지수야, 오늘 메뉴는 ‘비시스와즈(Vichyssoise)’다. 프랑스식 차가운 감자 수프지. 뜨겁게 끓여낸 뒤 얼음물 위에서 비명을 지를 정도로 급격히 식혀야 하는 요리야.”


​아저씨는 대파의 흰 부분을 얇게 썰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사랑도 이 수프랑 같아. 뜨겁게 끓어오를 땐 김 때문에 앞이 아무것도 안 보이지. 하지만 그걸 억지로 차갑게 식혀봐야 비로소 그 맛의 본질이 보여. 태풍 저 바보는 숫자 앞에선 냉철한 척하더니, 사랑 앞에선 식히는 법을 몰라 다 타버린 거지.”


​아저씨는 체에 수프를 세 번이나 걸렀다. 미세한 입자 하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매끄러운 액체가 완성되었다.


​3. 5년 만의 재회, 닿아버린 진심


​오후 7시 정각. 폭풍 전야처럼 바람 소리만 유리창을 때려댔다. 문이 열리고, 우아한 검은 코트를 입은 연우 씨가 들어왔다. 태풍 사장은 멀찌감치 기둥 뒤에 서서 그녀를 바라볼 뿐, 평소처럼 넉살 좋게 다가가지 못했다.


​“어서 오세요. 한연우 님 맞으시죠?”


​그녀는 고개를 까딱이며 내 안내를 받았지만, 시선은 기둥 뒤의 태풍 사장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첫 번째 코스로 비시스와즈가 서빙되었다. 장팔 아저씨가 직접 나갔다.


​“옛정을 생각해서 내가 만든 요리 중 가장 차가운 걸로 준비했소. 이거 먹고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연우 씨가 희미하게 웃으며 수프를 한 입 떠먹더니 기둥 뒤를 향해 서늘하게 입을 열었다.


​“여전하네. 장 폴 씨 요리는 완벽하고, 당신은 여전히 비겁한 겁쟁이야. 5년 전 여의도에서 펀드 수익률 박살 나고 아무 말 없이 야반도주하듯 사라졌을 때처럼.”


​태풍 사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서울에서 성공해서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어. 여긴 왜 왔어?”


​“당신이 잘 사는지 보러 온 게 아냐. 내가 버려진 이유가 고작 이 따위 낡은 건물 때문인지 확인하러 왔어.”


​연우 씨는 수프를 반도 비우지 않은 채 일어섰다. 하지만 문으로 향하던 그녀의 발걸음이 한순간 크게 비틀거렸다. 그 순간, 기둥 뒤에 숨어있던 태풍 사장이 튀어나와 그녀의 어깨와 팔을 단단하게 붙잡았다. 연우 씨의 몸이 태풍 사장의 가슴팍에 닿았고,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차가운 공기가 한순간에 멈췄다. 사장은 뒤로 숨기려던 손을 거두고 그녀를 놓지 않았다. 연우 씨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사장의 조리복 자락을 꽉 쥐었다. 5년 동안 얼어붙어 있던 시간이 비로소 녹아내리는 순간이었다.


​“수프는 잘 먹었어.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갑더라. 덕분에 나도 이제 좀 시원해졌어.”


​그녀는 사장의 손길을 천천히 떼어내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어깨너머로 툭 던졌다.


“서울 오면… 꼭 연락해. 이번엔 숨지 말고, 내가 먼저 기다릴 테니까.”


​4. 눈물 섞인 수프의 온기


​밤 11시. 식당에는 무거운 어둠만이 가득했다. 장팔 아저씨는 홀의 불을 켜는 대신 바닥에 주저앉은 태풍 사장 옆에 앉아 수프 접시를 하나 더 내놓았다.


​“야, 사기꾼. 이거 먹어라. 아까 연우가 남기고 간 게 아니라, 내가 너 주려고 새로 끓인 거다.”


​태풍 사장은 대답 없이 차가운 수프를 들이켰다.


​“장팔아, 나 진짜 한심하지? 수천억 굴리던 놈이 여자 하나 마음 못 돌려서 이 구석탱이까지 도망 오고….”


​“한심한 거 이제 알았냐? 그래도 다행인 줄 알아라. 너 아까 연우 붙잡을 때, 네 손이 떨리는 게 아니라 뜨겁더라. 연우가 서울 오면 연락하라고 했으면, 그건 수프 간이 딱 맞았다는 뜻이야.”


​어느새 곰탱 아저씨가 구운 고기를 들고 나와 둘 사이에 놓았다. 나는 구석에서 설거지를 하며 생각했다. 태풍 사장이 쌓아온 화려한 가짜 성벽은 오늘 무너졌지만, 그 무너진 자리에는 차가운 비시스와즈와 투박한 사람의 온기가 남았다고.


​“아저씨, 내일 3시에는 제대로 일어나요. 촛불 성 다시 쌓아야 하니까. 이번엔 서울까지 보일 정도로 아주 높고 따뜻하게요.”


​태풍 사장이 코를 훌쩍이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바다의 폭풍은 유리창을 뒤흔들고 있었지만, 요새 안에서는 세 남자의 낮은 웃음소리가 파도 소리를 이겨내고 있었다.


​[지수의 주방 관찰 일지: 오늘의 요리]


​메뉴: 차가운 기억의 역설, '비시스와즈(Vichyssoise)'



​1. 뜨거움을 품은 차가움

비시스와즈는 감자와 대파를 버터에 볶아 정성껏 끓여낸 뒤, 얼음물에서 급격하게 식히는 요리다. 장팔 아저씨는 이걸 "열역학의 역설"이라고 불렀다. 뜨겁게 끓어오르던 감정도, 한 번은 차갑게 식어봐야 그 본질이 보인다. 사장이 연우 씨를 붙잡았을 때, 그녀의 붉어진 눈시울은 그 차가웠던 수프 아래 숨겨진 뜨거운 진심을 알아챘다는 신호가 아니었을까.


​2. 60cm를 넘어선 온도

닿지 못한 60cm가 아니라, 마침내 닿아버린 사장의 두 손. 수프는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지만, 그 손의 온도는 62도 수비드 기계보다 뜨거웠을 것이다. "서울 오면 연락하라"는 그녀의 말은, 이제 이 차가운 요새의 성벽을 허물고 밖으로 나오라는 가장 따뜻한 초대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