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1]03:00 PM, 촛불 성의 괴물들
1. 죽은 목소리와 구겨진 예약 명단
“지수야, 오늘은 촛불 켜지 마라. 아니, 딱 하나만 켜. 제일 작은 걸로.”
오후 3시 15분. 평소라면 “성벽을 쌓아라! 파라핀의 요새를 구축해!”라며 호들갑을 떨었을 태풍 사장이 물먹은 솜처럼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입 왁스로 번들거려야 할 그의 손에는 모서리가 너덜너덜하게 구겨진 예약 명단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나는 의아해하며 슬쩍 명단을 훔쳐보았다.
예약자 성함: ‘한연우’.
그 이름을 확인한 순간, 주방에서 담배를 물고 나오던 장팔 아저씨가 서까래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딱 멈췄다.
“연우…? 야, 태풍. 네가 5년 전 파리에서 나 꼬드겨서 도망칠 때, 매일 밤 싸구려 와인 처먹고 이름 부르며 개처럼 질질 짜던 그 한연우 맞냐?”
장팔 아저씨의 직설적인 물음에 태풍 사장은 대답 대신 창밖의 성난 파도만 멍하니 바라봤다.
“지수야, 오늘 요리는… 좀 차갑게 해 줘라. 내 심장처럼.”
“지랄하네. 야, 요리는 식재료가 결정하는 거지 네 감정 찌꺼기가 결정하는 게 아냐. 헛소리 말고 정신 차려.”
장팔 아저씨는 매몰차게 독설을 뱉었지만, 정작 주방으로 들어가는 그의 등 뒤로는 평소보다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2. 비시스와즈, 뜨거웠던 기억을 얼리는 역설
장팔 아저씨는 평소보다 더 정교하게 감자를 깎아내기 시작했다.
“지수야, 오늘 메뉴는 ‘비시스와즈(Vichyssoise)’다. 프랑스식 차가운 감자 수프지. 뜨겁게 끓여낸 뒤 얼음물 위에서 비명을 지를 정도로 급격히 식혀야 하는 요리야.”
아저씨는 대파의 흰 부분을 얇게 썰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사랑도 이 수프랑 같아. 뜨겁게 끓어오를 땐 김 때문에 앞이 아무것도 안 보이지. 하지만 그걸 억지로 차갑게 식혀봐야 비로소 그 맛의 본질이 보여. 태풍 저 바보는 숫자 앞에선 냉철한 척하더니, 사랑 앞에선 식히는 법을 몰라 다 타버린 거지.”
아저씨는 체에 수프를 세 번이나 걸렀다. 미세한 입자 하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매끄러운 액체가 완성되었다.
3. 5년 만의 재회, 닿아버린 진심
오후 7시 정각. 폭풍 전야처럼 바람 소리만 유리창을 때려댔다. 문이 열리고, 우아한 검은 코트를 입은 연우 씨가 들어왔다. 태풍 사장은 멀찌감치 기둥 뒤에 서서 그녀를 바라볼 뿐, 평소처럼 넉살 좋게 다가가지 못했다.
“어서 오세요. 한연우 님 맞으시죠?”
그녀는 고개를 까딱이며 내 안내를 받았지만, 시선은 기둥 뒤의 태풍 사장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첫 번째 코스로 비시스와즈가 서빙되었다. 장팔 아저씨가 직접 나갔다.
“옛정을 생각해서 내가 만든 요리 중 가장 차가운 걸로 준비했소. 이거 먹고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연우 씨가 희미하게 웃으며 수프를 한 입 떠먹더니 기둥 뒤를 향해 서늘하게 입을 열었다.
“여전하네. 장 폴 씨 요리는 완벽하고, 당신은 여전히 비겁한 겁쟁이야. 5년 전 여의도에서 펀드 수익률 박살 나고 아무 말 없이 야반도주하듯 사라졌을 때처럼.”
태풍 사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서울에서 성공해서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어. 여긴 왜 왔어?”
“당신이 잘 사는지 보러 온 게 아냐. 내가 버려진 이유가 고작 이 따위 낡은 건물 때문인지 확인하러 왔어.”
연우 씨는 수프를 반도 비우지 않은 채 일어섰다. 하지만 문으로 향하던 그녀의 발걸음이 한순간 크게 비틀거렸다. 그 순간, 기둥 뒤에 숨어있던 태풍 사장이 튀어나와 그녀의 어깨와 팔을 단단하게 붙잡았다. 연우 씨의 몸이 태풍 사장의 가슴팍에 닿았고,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차가운 공기가 한순간에 멈췄다. 사장은 뒤로 숨기려던 손을 거두고 그녀를 놓지 않았다. 연우 씨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사장의 조리복 자락을 꽉 쥐었다. 5년 동안 얼어붙어 있던 시간이 비로소 녹아내리는 순간이었다.
“수프는 잘 먹었어.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갑더라. 덕분에 나도 이제 좀 시원해졌어.”
그녀는 사장의 손길을 천천히 떼어내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어깨너머로 툭 던졌다.
“서울 오면… 꼭 연락해. 이번엔 숨지 말고, 내가 먼저 기다릴 테니까.”
4. 눈물 섞인 수프의 온기
밤 11시. 식당에는 무거운 어둠만이 가득했다. 장팔 아저씨는 홀의 불을 켜는 대신 바닥에 주저앉은 태풍 사장 옆에 앉아 수프 접시를 하나 더 내놓았다.
“야, 사기꾼. 이거 먹어라. 아까 연우가 남기고 간 게 아니라, 내가 너 주려고 새로 끓인 거다.”
태풍 사장은 대답 없이 차가운 수프를 들이켰다.
“장팔아, 나 진짜 한심하지? 수천억 굴리던 놈이 여자 하나 마음 못 돌려서 이 구석탱이까지 도망 오고….”
“한심한 거 이제 알았냐? 그래도 다행인 줄 알아라. 너 아까 연우 붙잡을 때, 네 손이 떨리는 게 아니라 뜨겁더라. 연우가 서울 오면 연락하라고 했으면, 그건 수프 간이 딱 맞았다는 뜻이야.”
어느새 곰탱 아저씨가 구운 고기를 들고 나와 둘 사이에 놓았다. 나는 구석에서 설거지를 하며 생각했다. 태풍 사장이 쌓아온 화려한 가짜 성벽은 오늘 무너졌지만, 그 무너진 자리에는 차가운 비시스와즈와 투박한 사람의 온기가 남았다고.
“아저씨, 내일 3시에는 제대로 일어나요. 촛불 성 다시 쌓아야 하니까. 이번엔 서울까지 보일 정도로 아주 높고 따뜻하게요.”
태풍 사장이 코를 훌쩍이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바다의 폭풍은 유리창을 뒤흔들고 있었지만, 요새 안에서는 세 남자의 낮은 웃음소리가 파도 소리를 이겨내고 있었다.
[지수의 주방 관찰 일지: 오늘의 요리]
메뉴: 차가운 기억의 역설, '비시스와즈(Vichyssoise)'
1. 뜨거움을 품은 차가움
비시스와즈는 감자와 대파를 버터에 볶아 정성껏 끓여낸 뒤, 얼음물에서 급격하게 식히는 요리다. 장팔 아저씨는 이걸 "열역학의 역설"이라고 불렀다. 뜨겁게 끓어오르던 감정도, 한 번은 차갑게 식어봐야 그 본질이 보인다. 사장이 연우 씨를 붙잡았을 때, 그녀의 붉어진 눈시울은 그 차가웠던 수프 아래 숨겨진 뜨거운 진심을 알아챘다는 신호가 아니었을까.
2. 60cm를 넘어선 온도
닿지 못한 60cm가 아니라, 마침내 닿아버린 사장의 두 손. 수프는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지만, 그 손의 온도는 62도 수비드 기계보다 뜨거웠을 것이다. "서울 오면 연락하라"는 그녀의 말은, 이제 이 차가운 요새의 성벽을 허물고 밖으로 나오라는 가장 따뜻한 초대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