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Dialog] “이제 다시 바다로"

제4부. 파도의 리듬: 시련을 리듬으로 바꾸는 기술

by 산 사람

[ 등대를 떠나는 자가 챙겨야 할 단 하나의 나침반]


저녁노을이 등대의 난간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해는 수평선 아래로 천천히 기울고 있었고, 돌벽에 남은 오래된 균열들까지도 불길처럼 달아올랐다. 사내는 그 빛이 곧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한동안 난간에 기대 서 있었다. 빛은 늘 가장 아름다울 때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등대에서의 생활도 어느덧 계절을 하나 건너왔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그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고, 파도 소리만 들려도 몸을 움츠렸다. 이제는 등유 냄새가 자신의 체취처럼 익숙했고, 새벽마다 렌즈를 닦는 일이 숨을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워졌다.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박였고, 손목은 쓸데없는 힘을 쓰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해결되지 않은 돌덩이 하나가 남아 있었다.

가라앉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불안.

등대 안에서는 조용했지만, 바다를 바라보는 순간마다 다시 무게를 되찾는 감정이었다.


해언은 평상 위에 앉아 말린 생선을 손질하고 있었다. 칼이 도마에 닿을 때마다 짧고 둔탁한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그 소리는 이곳에서 흘러가는 시간의 박동처럼 느껴졌다. 해언은 등대 입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내를 힐끗 보더니 턱으로 바다 쪽을 가리켰다.


“무엇을 그리 골똘히 생각하나.

저녁 바다는 자네를 잡아먹지 않네.”


사내는 노인 곁으로 다가왔다. 입을 열기 전, 그는 한 번 침을 삼켰다. 생각보다 목이 말라 있었다.


“노인장… 요즘 부쩍 겁이 납니다.”


해언의 칼질이 멈췄다.

노인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물었다.


“무엇이.”


“이곳을 떠나는 게요.”


말은 공중에서 잠시 머물다 천천히 가라앉았다. 사내는 난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노인을 보았다.


“등대 안에서는 모든 게 분명했습니다. 해야 할 일이 있었고, 하루의 리듬이 있었고… 제 안의 폭풍도 잦아들었죠.”


해언은 생선을 뒤집으며 다시 칼을 들었다.


“당신 덕분에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도마 위에서 생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제가 다시 바다로, 저 소란스러운 세상으로 돌아갔을 때도 지금처럼 단단할 수 있을까요? 다시 파도를 만나면… 또 무너지는 건 아닐지 두렵습니다.”


해언은 칼을 내려놓고 사내를 바라보았다. 노인의 눈동자에는 지는 해의 잔상이 남아 불꽃처럼 일렁였다.


“자네,”

그가 낮게 말했다.


“등대가 왜 바닷속이 아니라 이 절벽 위에 서 있는지 아나.”


“가장 높은 곳에서 빛을 멀리 보내야 하니까요.”


“그것도 맞지.”


해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바람이 지나가며 창틀을 울렸다. 사내는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노인은 그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네.

등대는 머물기 위해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라네.”


사내는 미세하게 눈을 찌푸렸다.


“이곳은 항구도 아니고 집도 아니야. 항해사들이 길을 잃었을 때, 잠시 방향을 확인하고 다시 제 갈 길을 가게 하는 표지판일 뿐이지.”


해언은 평상에서 일어나 사내 곁으로 다가왔다. 거칠어진 손이 사내의 손등을 툭, 두드렸다.


“자네는 지금 이곳의 평온함에 조금 기대고 있군.”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파도에 젖지 않는 배는 배가 아니며, 풍랑을 겪지 않는 항해사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네.”


사내는 숨을 들이마셨다.


“다시 바다로 나가는 게 두려운가? 당연한 일이지. 두렵지 않다면 자네는 아직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을 걸세.”


해언의 말 사이로, 사내는 자신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자네는 이제 예전의 조난자가 아니야. 자네 안에는 이미 빛을 닦는 손과, 리듬을 기다릴 줄 아는 몸이 생겼지.”


사내는 고개를 숙였다.


“세상은 등대처럼 정직하지 않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사람들은 여전히 저를 손가락질할 겁니다. 빚은 따라올 거고요. 그런 현실 앞에서… 이 모든 말들이 무슨 힘이 있을까요.”


해언은 잠시 사내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철학이 밥을 먹여주지는 않지.”


사내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하지만,”

해언은 말을 이었다.


“굶주린 속에서도 자네의 영혼이 썩지 않게는 해주네.”

노인은 사내의 가슴을 가리켰다.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자네는 더 낮게 엎드려 자네만의 리듬을 타게나. 손가락질은 바람 소리로 흘려보내고, 빚은 언젠가 갚아야 할 짐으로 받아들이게.”

사내는 노인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등대를 떠난 자가 챙겨야 할 단 하나의 나침반은 이것이네. 어떤 상황에서도 내 안의 불을 끄지 않겠다는 마음.”


사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어둠은 여전히 깊었지만, 이전과 달리 그 어둠이 자신을 시험하는 무대처럼 느껴졌다.


“노인장…”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신을 다시는 못 볼까 봐, 그게 가장 두렵습니다.”

해언은 짧게 웃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나는 바다의 말을 기록하는 자라고.”

그는 사내의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자네가 바다 위에서 제대로 항해하고 있다면, 자네는 매 순간 내 목소리를 듣게 될 걸세. 파도가 때릴 때, 안개가 가릴 때… 자네가 다시 렌즈를 닦듯 마음을 정갈히 한다면.”

해언은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이 곧 나의 등대일세.”

사내의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두려움이 아니라, 다시 삶에 몸을 던져보고 싶다는 감각이었다.


밤은 깊어갔다.

등대의 불빛은 이제 사내의 등 뒤가 아니라, 그의 앞길을 비추고 있었다.

사내는 알았다.

등대는 끝이 아니라, 돌아가기 위한 시작이라는 것을.